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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41화 (441/649)

〈 441화 〉 6. 존재 증명(29)

* * *

드디어 상행의 날이 밝았다.

그 본심은 알 수 없었으나, 페리는 흔쾌히 우리의 동행을 허가했다. 오히려 리아를 설득할 빌미가 생겨 잘 됐다고 말할 정도였다.

나도 이미 들은 바 있던 소식이었다.

페리는 일전에 리아를 상행에 초대했다.

리아는 막대한 물량의 마수 시체를 쥐고 있었다. 샤일록 상회의 본단으로 가는 길에 동행시켜, 여러 가지 사업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듯했다.

그럴싸한 핑계였다.

리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매달려 왔다.

“혹시 질투 나?”

“딱히.”

나는 드물게도 메마른 목소리로 그리 답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아는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속이 뻔히 보인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

입술이 귓바퀴에 맞닿을 듯 다가왔다. 이내 물기 어린 속삭임이 고막을 적시고 지나갔다.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으니까.”

그러든 말든 내 입에선 끄응, 하고 옅은 신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내 눈이 흘깃 주위를 훑었다. 벌써부터 일행들은 떠나갈 채비로 분주했다.

셀린과 유렌은 각자의 짐을 짊어진 채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고, 엘시 선배는 뚱한 표정으로 레이놀드 씨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다.

잔소리 지옥이 괴로운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도우러 가야 할 듯 싶었다.

내가 슬그머니 걸음을 내딛자, 리아의 눈꼬리가 묘한 호선을 그렸다.

“흐응, 아직 인사를 나눌 사람이 남아있나 봐?”

“엘시 선배가 불쌍하잖아. 벌써 1시간째 저러고 있는데.”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던 리아는 흐응, 하고 또 다시 묘한 소리를 냈다.

이마저도 잠깐.

어쩔 수 없다는 듯, 리아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다만 그 눈빛에서 은근한 불만이 읽히고 있었다.

“오빠는 라이넬라 양한테 너무 약하다니까.”

“예쁘잖아.”

그렇게 대화를 일단락 지은 내 몸이 저벅저벅 엘시 선배에게로 나아갔다. 엘시 선배는 이제 지긋지긋하는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달한 듯했다.

나는 숙질간의 다툼을 미연에 방지하기로 했다.

“또 내가 용병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절대 사람을 함부로 믿지 말고…….”

“레이놀드 씨.”

내 나지막한 호명에 중년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여전히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눈빛이었으나, 일순 그 망막을 스치고 지나간 광채만은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나도 꽤 환영 받는 손님이 된 모양이었다.

“왔나, 조카사위? 마침 잘 됐군. 내가 대규모 상행을 호위할 때의 주의점을 알려 주려고 했는데…….”

물론 레이놀드 씨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내가 말을 건 틈을 타, 엘시 선배가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그, 그럼 둘이서 이야기 나눠! 난 이만 가볼게!”

“엘시, 엘시! 어디를 가는… 후우, 못 말리겠군.”

처음에는 엘시 선배를 붙잡으려 했던 레이놀드 씨였으나, 이내 소용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어느덧 가까워진 두 사람의 사이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만 봐주시죠.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경험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도 맞는 말이네만…….”

늘어지는 말꼬리가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미처 하지 못한 잔소리가 내게 쏟아져 내릴까 싶어, 나는 재빨리 화두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 검은 머리의 소녀를 쫓아가시겠다고요?”

“응? 아, 아아… 그렇지. 아무래도 갚지 못한 빚이 남아있으니 말이야.”

그와 동시에 레이놀드 씨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품을 뒤적거렸다. 그러기를 잠깐, 중년의 손에 자그마한 구슬이 딸려 나왔다.

“혹시 관련된 정보를 접하면 연락하게.”

“이 물건은 뭡니까?”

내 의아한 반문에도 레이놀드 씨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칠 뿐이었다.

“부적이라 생각하게. 그럼, 우리 엘시를 잘 부탁하지.”

그 작별 인사를 끝으로 레이놀드 씨는 망설임 없이 떠나갔다.

언제 보아도 참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그 등장처럼 퇴장 또한 자유로웠다.

나는 그 뒷모습을 얼마쯤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주위를 둘러봐도 정작 내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로 성녀였다.

인사조차 나누고 싶지 않은지, 성녀는 우리를 마중하는 자리에도 불참했다. 나는 절로 씁쓸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유렌에게 사정 설명을 부탁했는데도 이 꼴이었다. 일순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후회가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묵은 앙금은 돌아와서 털어놓아도 늦지 않았다. 그렇게 고아원을 일별하려던 내 눈에, 어느 꼬마아이의 모습이 밟혔다.

내게 여동생을 구해 달라던 사내아이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내 발걸음이 아이를 향했다. 마침 잘 됐다 싶었다.

물기 맺힌 눈망울이 나를 향했다. 그 망막에 비치는 풍경이 일렁이고 있었다.

턱, 하고 내 손이 꼬마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잘 될 거야.”

“지, 진짜죠?”

나는 힘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품속에서 은빛의 로자리오를 하나 꺼냈다.

“대신 나도 부탁 하나만 하자… 이 목걸이를 성녀님께 전해 줄래?”

얼핏 보아도 비싼 태가 나는 물건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은제 목걸이에 꼬마아이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이, 이렇게 비싼 물건을 어떻게…….”

“널 믿으니까.”

최대한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는 사내아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니까 너도 날 믿어라. 자고로 훌륭한 기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거든.”

사실 이 사내아이가 기사를 꿈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넋을 놓은 꼬마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시금 여행길에 올랐다.

**

상행은 평온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예상대로였다. 수행하고 있는 인력의 규모도 컸고, 얼핏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실력자들이 호위를 서고 있는 행렬이었다.

마수조차 기가 죽을 판이었다. 이를 건드릴 만큼 간 큰 도적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며칠 사이 여러 가지 사건이 있긴 했다.

나를 비롯한 일행은 상인들과 따로 야영지를 마련했다. 굳이 위화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다 보니 밤마다 일행끼리 친목을 다질 때도 많았다.

예를 들어, 동료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는 명목으로 나에 관한 퀴즈를 낸다든가.

특히 셀린과 엘시 선배가 열성적이었다.

승부욕에 불이 붙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난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하지만 함께 지낸 세월의 차이가 있다 보니, 이 내기에서는 셀린이 근소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우쭐해진 셀린과 이를 바득바득 가는 엘시 선배.

두 사람의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유렌이 다음으로 낸 문제 때문이었다.

“자, 그럼 마지막 문제. 이안의 물건은 크기가 얼마나 될… 컥!”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내뱉은 발언이었으나, 성희롱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너무나 다분했다. 나는 그 자리에 드러눕듯 유렌의 옆구리를 걷어차야 했다.

그럼에도 이미 늦은 뒤였다.

셀린과 엘시 선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수리에서 흐릿한 김이 피어오르는 환각이 보일 지경이었다. 한 술 더 떠 유렌은 뻔뻔스럽게도 억울하다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한창 재미있었는데, 왜 발로 차고 난리야?!”

“미쳤냐, 그딴 걸 문제라고 내? 그걸 도대체 누가 맞추…….”

그때였다.

귓볼까지 새빨갛게 붉힌 엘시 선배가 소심하게 손을 든 것은.

유렌을 포함해서, 모두의 몸이 일시에 정지했다. 정적 속에서 엘시 선배는 조심스레 두 손의 간격을 벌렸다.

“……이, 이만큼?”

유렌은 멍하니, 엘시 선배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 개새끼가! 감히 우리 누님을 두고 바람을 피워?!”

목에 핏대를 올리며 내게 주먹질을 시작했다.

결국 나는 다급히 변명을 주워섬겨야 했다.

“야, 아니야! 오해라고!”

하지만 뒤이어 분기탱천한 셀린이 합류하며, 그날 밤의 나는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했다.

다음날, 멍이 온전히 지워지지 않은 내 얼굴을 보며 리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은 즐거웠나 봐?”

“아마도.”

흥, 하고 리아의 질투심 어린 눈초리가 셀린과 엘시 선배를 향한 것은 덤이었다.

물론 즐거운 한때는 오래 가지 못했다.

우리가 중도에 상단과 찢어지면서, 비로소 진정한 임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리아는 상단을 따라가며 일부러 나를 도발하기까지 했다.

“아아, 어떡하지? 페리 님이 요즘 나한테 자꾸 관심을 보이네. 곤란하네, 나는 누구밖에 모르는데…….”

그러면서 힐끔힐끔 내게 눈치를 주기까지.

내 입에서 허, 하고 메마른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헛소리 하지 말고 가라.”

“치, 오빠 바보!”

베에, 하고 혀를 내밀며 내게 화를 낸 리아는 종종걸음으로 상행의 뒤를 쫓았다.

우리 추적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숨소리마저 죽인 채, 행렬의 뒤를 쫓는 여정은 지난했다. 그나마 보조 도구가 없었다면 더욱 힘들었을 터였다.

유렌은 여전히 못미덥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 주문서, 효과 확실한 거야?”

“제국 첩보부에서 받은 물건이라니까. 특정 사물에 시전하면 최소 2주 이상은 위치 추적이 가능해.”

그리고 그만큼 값이 비싸기도 했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제국 황실에 썩어 넘치는 것이 돈이었으니까 말이다.

어느덧 산마루에 붉은 태양이 걸릴 무렵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의 강행군 탓에 셀린과 엘시 선배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나와 유렌 단 둘이 추적에 임하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흐릿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페리와 그 무리였다.

나와 유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한 채였다. 점차 페리의 상행이 향하는 길목이 좁아지고 있었던 탓이었다.

상단이 굳이 대로변을 피해야 할 까닭은 없었다.

오직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좁디 좁은 길목에 들어설 뿐이었다.

나는 그 모종의 사유가 참으로 궁금했다.

하지만 상행이 비밀스러운 길로 접어들수록 경계 또한 극심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나와 유렌은 정체된 상행의 흐름을 얌전히 지켜만 보아야 했다. 그러기를 벌써 몇 시간째였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내가 먼저 유렌에게 말을 걸었다.

“……성녀님은 잘 계시려나?”

흥, 하고 유렌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호위를 잔뜩 증원했으니 괜찮겠지. 누님은 워낙 신의 사랑을 잔뜩 받는 사람이라… 그보다는 우리를 걱정하는 편이 나을걸.”

나는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려다가, 문득 의문이 들어 유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심드렁한 표정.

일말의 존경이나 경외조차 느껴지지 않는 낯빛이었다. 성녀와는 영 딴판이었다.

성녀는 천신의 존재를 입에 담을 때마다 깊은 신앙을 드러내곤 했다.

“너 말이야, 성기사 맞긴 하냐?”

내 농담에 유렌은 제 검집을 손가락으로 톡톡, 하고 건드렸다.

“실험해 볼래? ‘시엔델의 벼락’이라고 불리던 쾌검술을 보여주지.”

“아니, 아니… 너, 그러고 보면 ‘임마누엘’ 같은 말도 잘 안 쓰잖아. 딱히 천신교의 교리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없고.”

흐음, 하고 유렌은 내 이어지는 질문에 노골적으로 시시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의 눈이 다시금 머나먼 곳에 위치한 페리 일행에게 고정되었다.

“이안, 고아는 말이야… 살아남기가 참 힘들어.”

언제나와 같은 음색이었으나, 나는 묘하게도 그 고백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던 말이었다.

성녀도 지난번에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가.

“걸핏하면 실종되고 사라지기 일쑤지. 그 아이들이 전부 어디로 갔을까? 난, 어린 시절부터 내가 고아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어.”

“그게 신앙과 관련이 있나?”

“당연하지. 넌 세상이 원망스러운데 신에게 감사하고 싶겠냐?”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는 반박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러는 사이, 유렌의 신세 한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럴 수 있는 인간은 아주 소수야. 정신적으로 강인하고 꺾이지 않는 사람… 우리 누님이 그랬지.”

향수에 젖은 유렌의 동공이 흐릿해졌다. 그의 시야는 과거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을 터였다.

“누님은 우리 같은 고아가 고통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말했어. 내게는 불가능했지만, 우리 누님이라면 가능하리란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우리 누님 입장도 생각해 달라는 거야.”

그러면서 유렌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나 또한 그에 발맞추어 날카로운 시선을 저 너머로 보냈다.

드디어 움직인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거든.”

나는 대답 대신 딱, 하고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은은한 진동이 땅바닥에 놓인 마력의 끈을 타고 전해졌다. 셀린과 엘시 선배에게 신호가 성공적으로 닿았다는 뜻이었다.

“……그거 참 공감이 가는 말인데?”

상행은 이어진다.

숲의 깊고 깊은 곳으로, 외딴 구석에 위치한 오두막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세상을 위해서라도, 저 친구들은 죽어줘야 할 것 같거든.”

대바늘처럼 뇌리를 관통하는 피 냄새가 났다.

암흑교단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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