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4화 〉 6. 존재 증명(32)
* * *
밀실에 내려앉은 정적은 길지 않았다. 머지 않아 소녀가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고아한 유령이 춤을 춘다.
새하얀 원피스를 걸친 여인의 걸음걸이는 사뿐했다. 어느덧 몸을 일으킨 채로, 치맛자락을 들고 가슴에 손을 얹은 소녀는 극단의 무용수라도 되는 듯했다.
무방비하고 위태롭다.
논리적으로는 당장 검을 뽑아 들어야 옳았다.
이처럼 빈틈이 무수한 작태다. 상대를 적으로 인식한 이상, 자비는 없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차마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유렌과 셀린, 엘시 선배 또한 예외 없이 몸을 굳히고 있을 따름이었다.
손이 덜덜 떨린다.
땀 한 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본능이 내게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섣불리 행동에 나서면 죽는다.
단 몇 초 사이,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이 일대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발끝으로 땅을 톡톡 두들기며, 소녀의 몸은 회전과 회전을 반복했다.
장난스러운 콧노래와 함께.
“아아, 들켜버렸네. 들켜버렸네… 어쩌다 들켜버린 걸까?”
빙글, 빙글. 소녀의 무도에 맞추어 얼굴 없는 존재들이 흉측한 소리를 내질렀다.
크어억, 키엑, 케에엑!
성대를 긁는 불쾌한 소음, 그럼에도 음정과 박자를 갖추고 있어 더욱 기괴했다.
유령의 춤이 멎은 곳은 핏빛 태양의 아래였다.
촤르륵, 하고 태양에서 흘러내린 촉수가 의자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곳에 망설임 없이 걸터앉으며, 여인은 턱을 괴고 권태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뒤로 얼굴 없는 괴물들이 칼 같은 군무를 보이며 사열했다.
하늘 위에는 대롱대롱 매달린 핏빛의 고치, 배후에는 일그러진 피부의 군대가 수십. 이 기괴한 풍경화의 한가운데에서, 오직 소녀의 미모만이 고고했다.
금빛 눈동자가 이채를 발하며 나를 향했다.
“어떻게 안 거야? 나름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자, 봐. 쇄골의 점도 제대로 구현했다고.”
그러더니 슬쩍 어깨 끈을 끌어내리며 새하얀 쇄골을 드러내기까지.
내가 숨통을 옥죄던 압박감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드디어 적응을 끝낸 쪽에 가까웠다.
이 묵직한 공기와 저릿한 분위기, 당장이라도 어떠한 사건이 발생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위축되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애써 침착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내 여동생은 어디 있지?”
가까스로 짜낸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성녀에게 억지까지 부려 가며 내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 그것은 바로 내 여동생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였다. 섣불리 상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실종된 내 소중한 가족을 되찾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내 눈앞의 소녀는 리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저 리아를 가장하고 있는 누군가일 뿐이지.
이 사실을 눈치 챈 이후, 나는 애 타는 심정으로 매일 밤을 지새워야 했다. 혹시나 리아가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어디서 울고 있지는 않을까.
이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던진 물음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대답 대신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여동생?”
“그래, 내 여동생… 리아 말이야.”
으득, 하고 이를 갈면서 재차 내뱉은 말이었다.
소녀는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후 입술을 깨물며 억누르려 들기는 했으나, 끅끅거리며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마저 틀어막지는 못했다.
나는 울컥한 심장에 한 걸음을 내딛었다.
마음 같아서는 칼부림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리아와 핏빛 고치에 갇힌 여자아이가 치러야 할 가능성이 컸다.
인내해야만 했다.
그렇게 내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고 있자, 소녀는 박장대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여, 여동생? 푸흐, 쿡쿡, 아하하하하하하하! 조, 좋아! 알려줄게. 알려줘야 하고 말고?”
팡팡, 소녀의 손이 핏빛 의자의 손잡이를 두들길 때마다 파장이 일었다.
그 소리에 맞추어 얼굴 없는 괴물들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이 공간이 저 소녀의 제어 하에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해 보였다.
한참이나 웃음을 터트리던 소녀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 혼자만 알려주는 건 불공평하잖아? 거래를 해야겠어, 그래… 계약.”
그와 동시에 쾅, 하고 소녀가 의자의 손잡이를 강하게 두들겼다.
어디선가 나타난 핏빛 동전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회전했다. 그러더니 이내 새하얀 손바닥 위에 안착하는 동전.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주인님.”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나는 엘시 선배의 걱정을 일단락 지어야 했다.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인질을 잡힌 시점부터 이미 열세는 각오해야 했다.
내 진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계약이라니? 무슨 소리지?”
“너무 경계하지 마, 난 아주 공정하거든? 단지 우리는 상호 간의 합의에 의해 파기할 수 없는 약속을 하려는 거야. 그래야 공정하니까… 좋아, 첫 번째 계약은 이렇게 할까?”
애초에 내 의견 따위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는 듯, 소녀는 엄지로 핏빛 동전을 퉁겨 올렸다.
그러자 허공에 핏빛의 저울이 나타났다. 그 한 켠에 핏빛 동전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탁, 하고 저울이 기울기 시작한다.
“갑의 정체가 탄로 난 경위와, 갑은 을의 ‘여동생’의 행방을 교환한다.”
내 앞에 핏빛 운무가 맺히기 시작했다. 이는 곧 동전의 형상을 이루었고, 무심코 내가 손을 내밀자 그 위로 서서히 내려앉았다.
함정인가?
아직 확실하지 않았지만, 더는 수가 없었다. 소녀의 느긋한 채근이 이어졌다.
“어떻게 할래? 승낙도, 거절도 자유야. 대신 계약은 절대적이라, 맺어진 순간부터 속임수 따위는 불가능해.”
인질을 잡아놓고 선택은 자유라.
우스운 소리였다. 나는 은근슬쩍 엘시 선배와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면, 우리가 먼저 대비해야 했다.
필요한 정보를 얻거나 속았다는 판단이 즉시 기습한다.
이러한 무언의 합의가 일행 간에 오고 갔다.
묘한 긴장감 사이에서, 나는 핏빛 동전을 퉁겨 올랐다.
핑그르르 허공을 날던 동전은 당연하다는 듯 저울의 맞은편에 안착했다.
쿵, 하고 저울의 균형이 맞는다.
“좋아, 받아들이… 크억!”
느닷없이 느껴지는 통증에, 내 손이 가슴 부근을 움켜쥐었다. 이에 깜짝 놀라 일행이 앞으로 나섰을 무렵이었다.
소녀는 별 것 아니라는 태도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계약 성립, 이제부터는 딴 소리 하면 안 돼? 지금부터 계약을 이행해야 하니까… 그래, 계약에 명시된 내용 이외의 말도 불허야.”
꽤 강제성이 강한 계약이었다.
이를 어기면 어떤 꼴을 당할지, 나는 욱신거리는 심장을 보며 금세 짐작해 낼 수 있었다.
내 뒤에 선 일행들이 무척 불안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대로 두면 준비가 끝나기도 전에 전투가 시작될 판이라, 나는 얼른 말을 주워섬겨야 했다.
“사실 처음부터 이상했지.”
호오, 하고 소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 말해 보라는 듯, 오만한 턱짓이 이어졌다. 나는 흥분한 척을 하며 은근슬쩍 한 걸음을 내딛었다.
거리를 차근차근 좁혀야 했다.
그리고 또, 내 여동생이 언제, 어디서 사라졌는가.
이를 먼저 밝힐 시간이었다.
“왜 하필 마수들이 그날 군영을 습격했을까? 심지어 얼굴 없는 괴한들은 리아만을 노렸지.”
“암흑교단의 물건이잖아?”
기분이 나쁠 정도로 가감 없는 반론이었다.
나는 리아를 함부로 말하는 소녀의 태도에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당연히 회수하고 싶을 수도 있지. 심지어 그 가짜 말이야, 소중한 복제품이라고? 특별한 물건이란 말이지…….”
“왜 그럼 리아가 멀쩡했지?”
흐음, 하고 소녀의 입이 그제야 다물어졌다.
나는 더욱 강경한 추론을 이어갔다.
“리아는 전투 능력이 없어. 심지어 내가 도착했을 때, 저항하고자 하려는 기색조차 없었지. 얌전히 주저앉아 덜덜 떨고만 있었잖아?”
일행은 그 사이에도 슬금슬금 진형을 정비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소녀는 이를 딱히 신경 쓰는 모습이 아니었다.
소녀가 시선을 옮기기라도 할까 싶어, 내 강변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상했던 건, 당신이 레이놀드 씨를 제압했을 때야.”
“아, 그때? 기분 좋았지… 기분 나쁜 아저씨의 뒤통수를 후리는 건 언제나 짜릿하거든.”
그러면서 소녀는 찡긋, 하고 동의를 구하듯 내게 눈짓을 보냈다.
물론 내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나는 내 추론을 이어갔을 뿐이었다.
“아무리 전투 중이라지만, 대마법사에 이른 인물이 기척을 눈치 채지 못해?”
“아하핫, 알겠다! ‘우리’들의 기척이 유독 옅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박수와 함께 터져 나온 소녀의 웃음에, 얼굴 없는 괴물들이 일제히 기괴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으케억, 끄억, 크케켁!
그 흉측한 풍경에 내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으나, 소녀는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사려 깊지 못했네, 인정!”
‘사려’는 남을 배려할 때 쓰는 말이라고, 지적하고 싶었으나 나는 일부러 참아냈다.
어차피 이 대화가 끝나자마자 서로의 목을 노릴 사이였다.
굳이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너 말이지, 너무 겁이 없어.”
“으응?”
이건 또 의외라는 듯 소녀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나는 또 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며 말을 덧붙였다.
일행들의 서로 눈짓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은밀한 신호가 내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리아는 원래 겁이 많거든. 당장 죽을 뻔했는데, 다음날 돈 이야기에 신이 나서 전부 잊어 버리지를 않나… 울면서 내게 매달린 다음날에 아무렇지도 않게 시내에 나가 웃고 떠들어?”
흐응, 하고 소녀의 시선이 슬쩍 측면을 향했다.
제 행적을 되짚어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오를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항, 내가 마음이 좀 급했구나?”
무엇이 급했냐고 되물어 볼 생각은 없었다.
단지 또 한 걸음, 나와 소녀 사이에 놓인 거리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게 결정적인 근거까지는 아닐 텐데? 사람의 마음이야 간사한 것이고, 그 늙다리가 유독 방심을 했을 수도 있잖아? 또, 습격 때도 납치 직전에 도착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쏟아져 내리는 반론에 내 걸음걸이가 멈칫했다.
확실히 그랬다.
어쩌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면 애초에 성녀의 협조를 구했을 터였다.
이처럼 일부러 확인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페리의 뒤를 따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저 소녀가 내 여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럼에도 내가 직감적으로 소녀를 의심한 이유.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나는 묵비권을 행사하려 들었다. 그러자 욱씬, 하고 가슴에 느껴지는 통증.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소용 없다는 듯 소녀가 생글생글 웃었다.
“숨기려고 해도 소용 없어, ‘계약’했잖아?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켜야지.”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과연, 이러한 속셈도 있었나. 어찌할 도리가 없는 판이었다.
결국 내 입에서 한숨 섞인 고백이 새어 나왔다.
“……냄새가.”
느닷없는 소리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녀는 물론이고, 비밀스러운 작전을 준비 중이던 일행의 이목조차 내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체향이 달랐어. 그리고 리아는 볼보다는 입에 뽀뽀하는 편을 더 선호…….”
그리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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