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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45화 (445/649)

〈 445화 〉 6. 존재 증명(33)

* * *

내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고, ‘계약’ 또한 나를 더 채근하지 않았다.

오직 나만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을 뿐.

이래서 이야기하기 싫었는데.

모두가 어떠한 반응을 보여 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소녀의 입에서 순수한 경탄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동그랗게 뜨인 금빛 눈동자가 소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이는 동요의 기색이었다.

“진짜 기분 나쁘다… 어떻게 여동생의 체향을 그렇게 맡지? 혹시 변태야? 금단의 사랑을 꿈꾸거나 해?”

“……닥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내 손이 벼락 같이 검을 뽑아 들었다.

칼끝이 소녀를 겨누었으나, 정작 그 낯빛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흥미진진하다는 듯 미소를 깨물었을 뿐.

나는 으득으득 이를 갈면서 질문을 던졌다. ‘계약’한 대로였다.

“약속대로 말해. 내 여동생은 어디에 있지? 설마 모르겠다고 하진 않을 테고…….”

“재촉하지 마, 그러지 않아도 알려줄 생각이었으니까.”

하품을 내쉬면서, 소녀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일행들이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야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마당이었다.

경계심을 최대로 올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신의 소중한 여동생은 말이죠, 바로바로…….”

고혹적이고 치명적인 미소가 떠오른다.

소녀는 나긋한 몸짓으로 제 가슴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짠! 이곳에 있답니다?”

당연하게도, 정적이 이어졌다.

내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한 대가가 고작 이거라니.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일행이 행동에 나서기 직전, 내 입에서 분노에 젖은 음색이 토해졌다.

“그게, 무슨 개소리……!”

훅, 하고.

내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소녀가 내 눈앞에 당도해 있었다.

섬뜩할 만큼 새파란 미소를 짓고서.

“나야, 오빠.”

그리고 콰직, 하고 맹렬한 충격이 발등에서 느껴졌다.

나는 무심코 비명을 내지르려다 말고 검을 휘둘렀다.

무너진 자세에서 쏘아졌다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쾌속의 일격, 그러나 내 발등을 짓이긴 소녀는 홍소를 터트리며 빙글 몸을 회전시켰을 따름이었다.

소녀의 몸이 내 품을 파고든다.

그때까지도 나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한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몸이 뇌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더듬더듬, 소녀가 내 굳어버린 손을 멋대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핫! 진짜, 아직도 모르겠어?”

우선은 쇄골로부터 젖가슴까지.

내 손가락을 마찰력 없이 여인의 피부 위를 미끄러졌다. 이내 탄력 있는 촉감이 전해질 때까지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든 말든, 소녀는 내 손으로 제 몸을 더듬어 갔다.

“자, 봐. 이 가슴부터 시작해서, 허리, 골반… 또, 오빠가 좋아하는 엉덩이까지.”

신체 부위가 읊어질 때마다 내 손이 소녀의 몸을 타 내려갔다.

한 손으로 움켜쥐어도 제대로 붙잡히지 않을 둔부부터 시작해서, 단단하면서도 말랑한 살집을 자랑하는 허벅지까지도.

그렇게 내 손이 여체를 강제로 유린할 때마다, 소녀의 숨소리는 차츰 거칠어졌다. 종래에 이르러서는 숨을 헐떡이며 허벅지를 오므렸을 정도였다.

이대로 두면 사타구니까지 손을 움직일 기세였다.

고막을 함뿍 적실 만큼 습한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떻게든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짜냈다.

“이제 그만……!”

“하아, 하아… 아직도, 아직도 모르겠어? 응? 응응? 그럴 리가 없는데?”

금빛 눈동자에는 기묘한 열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욕망과 집착이 뒤섞인 그 감정은 자라리 광증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강렬했다. 나조차도 일순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녹아내릴 듯 뜨거운 목소리로, 소녀는 속삭였다.

“우리, 하나의 자궁에서 나왔잖아.”

그때였다.

새파란 뇌광이 폭발하며 시야를 달구었다. 빛의 궤적은 명백한 살의를 담아 소녀를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주인님!”

정작 소녀는 등을 뒤로 젖히며 간단히 피해 버렸지만.

그제야 나는 신체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소녀와 거리를 벌리기 위한 필사적인 도약이 이어졌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뇌리를 징징 울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소녀의 말소리가 뇌의 혈관 구석구석을 헤집는 느낌이었다.

뭐였지?

도무지 음모나 거짓을 말하는 이의 태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의 농도가 너무 높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배후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행들이 내게 모여든 것은 그때였다.

“이안!”

“주인님!”

“이안 오빠!”

각자의 호칭을 부르며, 내 동료들이 나를 에워싸며 호위를 시작했다. 허벅지를 짚은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자, 유렌이 한껏 미안하다는 목소리로 사죄를 건넸다.

“미안하다, 이안… 우리도 움직이고 싶었는데, 잠깐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

과연, 그랬나.

왜 지원이 오지 않나 했더니, 이 또한 저 소녀의 능력 중 하나인 듯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금 소녀를 향했다.

등을 젖히고 있던 소녀는 그제야 서서히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눈동자에는 어느덧 짙은 권태가 배어 있었다.

“아아, 시끄러워라…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걸까?”

엘시 선배는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한 기색이었다.

정체조차 불분명한 여자가 짝사랑하는 사내한테 달라붙은 꼴이었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이상했다.

분을 이기지 못한 엘시 선배가 주먹을 바르르 떨며 물음을 토해냈다.

“야, 너! 도대체 누구야! 가정교육 독학으로 받았냐?! 어디서 잘못 배워쳐먹은 썅년이길래 남의 약혼자를……!”

“……나?”

그리고 소녀가 훗, 하고 웃음을 머금었다고 생각한 찰나.

엘시 선배가 허공을 날고 있었다.

허를 찔렸다는 표현조차 애매했다. 나도, 유렌도, 셀린도 차마 반응할 수 없는 속도였으니까.

어느덧 엘시 선배의 허리에는 핏빛 채찍이 휘감겨져 있었다.

소녀의 손이 능숙하게 마력의 채찍을 조종했다.

마치 팽이 끈처럼 엘시 선배를 휘감은 마력의 선이 고속으로 풀려나갔다. 어어, 하는 사이 엘시 선배는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허공을 빙글빙글 돌아야 했다.

뒤이어 이어지는 강격.

쾅, 하고 핏빛의 강선(??)이 엘시 선배의 몸을 강타했다.

자그마한 체구로서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엘시 선배는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한 채, 땅바닥 위를 몇 번이나 퉁기며 구석에 쳐박혔다.

후드득, 하고 박살 난 암반의 파편들이 쏟아져 내렸다.

바위조차 박살 내는 일격, 모골이 송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내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엘시 선배!”

정작 이 참상을 만들어 낸 소녀는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였다. 도리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최고의 애견 훈련사이자!”

“이안, 라이넬라 선배를 챙겨! 도주한다!”

유렌이 그렇게 목청을 높이며 땅을 박찼다.

그 목적지는 핏빛 채찍을 든 소녀였다. 나와 엘시 선배가 몸을 추스르는 동안, 유렌이 시간벌이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유렌은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쾅, 하고 유렌이 급히 검면을 세워 날아드는 채찍을 막아냈다. 소녀의 남은 손에도 어느덧 핏빛의 채찍이 들려 있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전투 방식이었다.

미트람, 그가 황녀의 시녀장에 빙의했을 때 이와 비슷한 양상의 전투를 벌였던 기억이 났다.

그 위력은 천지차이였지만.

채찍의 운동량을 견뎌내지 못한 유렌의 몸이 고무공처럼 튕겨 나갔다. 그의 입에서 토막 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커헉!”

“거짓에 현혹된 자들을 구원할 성녀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셀린의 판단은 재빨랐다.

유렌이 땅을 박찬 순간부터, 셀린은 이미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유렌보다 낮은 신장을 이용해 채찍질을 피해낸 셀린의 몸이 소녀와의 간격을 좁혔다.

그리고 온힘을 다한 내려찍기.

쿠웅, 하고 일순 공기가 뒤틀리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폭심으로부터 터져 나온 바람이 마구잡이로 나부끼며 일대를 휩쓸었다.

그래서 더욱 비현실적이었다.

셀린의 배틀 엑스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더 내려가야 하는데, 이를 가로막은 것은 소녀의 가녀린 손이었다.

아니, 맨손은 아니었다. 그 손 위를 핏빛의 채찍이 덮고 있었으니까.

셀린이 당황해서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소녀의 발길질이 그 옆구리를 강타했다.

디딤발을 축으로, 골반을 틀며 깔끔히 틀어박힌 일격.

셀린의 몸이 대기를 찢으며 벽면에 틀어박혔다. 쿵, 하는 충격파가 그 아픔을 대변하고 있었다.

“재능 없는 자들의 소원을 사는 잡상인!”

엘시 선배를 향하려던 나는 제자리에 서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다들 당한 뒤였다.

누구 하나를 구하려다간 내가 당할 터였다.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버텨내는 수밖에 없었다.

사뿐사뿐, 핏빛의 조명을 받으며 소녀가 걸어온다.

그 금빛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선연한 빛을 품고 있었다. 요사스러운 미소가 초생달처럼 어우러졌다.

“부디, ‘탐욕’이라고 불러주시길… 혹은, ‘리아 페르쿠스’라고 불러도 좋아.”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소녀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특별히, 오빠만 말이야.”

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미 내 두개골을 쑤시고 들어오는 가설이 하나 있었으니까.

내 여동생은 하나가 아니었기에.

공포와 불안, 그리고 초조한 마음에 나는 말라붙는 입술을 자꾸 침으로 적셨다.

안 돼.

이래서는 안 되는데, 절대로 안 되는데.

나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한 마디를 토해내고 말았다.

"……리아?"

그 한 마디에, 소녀는 더없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정답! 오빠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리아에요!"

증오와 원망으로 범벅이 된 눈을 번뜩이면서.

"……가짜 따위가 아니라, 오빠의 '진짜' 여동생."

나는 그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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