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47화 (447/649)

〈 447화 〉 6. 존재 증명(35)

* * *

가까스로 전투에서 해방된 엘시 선배의 숨결이 거칠었다.

그 눈망울에 맺힌 초점이 흐릿해지고 있던 참이었다. 숨조차 고르지 못하고 괴물의 습격을 맞이해야 했으니, 힘에 부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그나마 수많은 실전 경험 덕에 목숨을 부지했으리라.

입꼬리를 타고 흐르는 핏줄기가 애처로웠다. 흐트러진 호흡 사이로 울컥 배어나오는 한 줌의 핏물, 엘시 선배의 부상이 여전하다는 증거였다.

다행이었다. 처음으로 해방된 이가 엘시 선배라서.

유렌과 셀린은 아직 여유가 있어 보였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밀리는 저 둘이 될 테지만, 그럼에도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둘이서 합을 맞추는 괴물에 대항해서, 두 사람은 연수합격을 이루고 있었다. 유렌의 활약까지는 예상했으나 셀린의 선전은 의외였다.

실력이 많이 늘기는 했구나.

그렇게 내가 한 숨을 돌린 사이, 엘시 선배의 푸른 눈동자에 분한 기색이 떠올랐다.

욱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그마한 체구가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땅을 딛고 섰다. 두 손에서 파직, 거리며 전하가 튀고 있었다.

“감히, 이 엘시 라이넬라를 물 먹였겠다……!”

전격으로 이루어진 창이 점점 더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위력은 알 수 없었으나, 최소한 공을 들여 준비할 만큼의 마법임은 확실했다.

어떻게든 한 방 먹여주고 싶은 심정이겠지.

하지만 엘시 선배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 돼!”

그 다급한 고함에 엘시 선배의 몸이 멈칫했다.

나와 엘시 선배의 이목이 소리의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섬광처럼 검을 휘두르면서, 칠흑의 마력을 뒤집어 쓴 팔다리를 막아내고 있는 유렌이 서 있었다.

“’계약’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해! 방해하지 마,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싱긋, 하고 어둠 속에서 진득한 호선이 떠올랐다.

핏빛 조명을 받은 소녀가 두 팔을 벌린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금빛 눈동자에 일렁이는 빛무리가 의미심징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엘시 선배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엘시 선배는 칫, 하고 혀를 차면서 품을 뒤적거렸다.

힐링 포션을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소녀의 나른한 제안이 이어졌다.

“자, 어서 계약을 이행해야지? 1분 이상, ‘진심’으로 안아줘야 해.”

끄응, 하고 내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귀찮은 조건이 붙었다. ‘진심으로’라니, 심지어 내가 자원해서 내뱉은 조건이라 철회조차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털레털레 소녀에게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캉, 캉, 캉!

옆에서 날붙이가 충돌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유렌과 셀린이 무투가 괴물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는 소리였다.

어느덧 내가 소녀를 목전에 두었을 무렵이었다.

소녀는 낯빛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하나만으로 괜찮겠어?”

내 몸이 멈칫했다.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이 소녀를 향했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죄인이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내 잃어버린 여동생이었다.

우리에게서 버림받은 가족.

무려 암흑교단에 붙잡혀 있었던 여인이었다. 당연히 온갖 끔찍한 실험을 당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 저만한 힘을 다룰 수는 없었다.

그 갈등 어린 시선이 못내 기분이 좋다는 듯, 소녀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재차 물었다.

“저 두 사람, 구하지 않아도 괜찮아? 거래 조건을 추가해도 될 텐데…….”

“듣지 마, 이안!”

또 다시 유렌의 비명 소리였다.

그는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나와 소녀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 여자는 상인이야! 상인이 이득도 없는 거래를 할 리가… 크윽!”

물론 소녀가 딱, 하고 손을 퉁기자마자 말문이 틀어막혔지만 말이다.

핏빛의 실들이 춤을 추듯 유렌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얼굴 없는 괴물의 팔다리에 실선이 하나둘씩 달라붙자, 주먹질과 발길질의 속도가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라졌다.

위력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나는 다시금 갈등하는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엘시 선배 하나로는 부족했다. 나 혼자로서는 전황을 뒤집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추가적인 조건을 걸어야 하나?

쾅, 하고 어디선가 폭음이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화들짝 놀란 내 시선이 어느 지점을 향했다. 그곳에는 두 팔을 교차시킨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얼굴 없는 괴물이 보이고 있었다.

이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크기의 도끼였다.

배틀 엑스.

셀린은 눈에 핏발이 서도록 전력을 다해 도끼를 연달아 휘둘렀다.

쾅, 쾅, 쾅!

크억, 켁, 크에에에엑!

처음에는 버티는 듯하던 괴물의 몸뚱어리가 지반을 파고들며 박히기 시작했다. 세네 번의 도끼질이 더 이어진 이후에는, 땅에 박힌 말뚝처럼 반신이 파묻혀 있었다.

괴물은 팔을 허우적거리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들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 볼 셀린이 아니었고, 날아오는 공을 쳐내듯 시원스러운 일격이 이어졌다.

빡!

목을 간단히 절단한 은빛의 사선이 드높이 연장되었다. 그 경계면을 타고 괴물의 머리와 핏물이 하늘 위로 비산했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방울 속에서 셀린이 외쳤다.

“우린 괜찮아!”

그 직후 땅을 박찬 셀린의 몸이 유렌에게로 쏘아졌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소녀의 눈꼬리가 불만을 담아 움찔 떨렸다.

“아아, 아끼던 장난감이었는데…….”

“새로운 거래는 필요 없어.”

기껏 셀린이 열어 준 활로였다.

무의미하게 만들 수는 없어서,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재차 선언했다.

“이대로 계약을 이행하자고.”

칫, 하고 소녀가 자그맣게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기대되는 마음을 감출 수는 없는지, 살짝 상기된 볼로 다시금 두 팔을 벌릴 뿐이었다.

“그럼, 얼른 안아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조우한 여동생이었다. 이렇게 다시 감격의 상봉을 나누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게 자격이 있기는 한 걸까.

일순 망설이던 나였으나, 이제 와서 그러한 자문을 던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나는 조용히, 힘 주어 소녀를 품에 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전해진다. ‘진심’이라는 조건이 붙어있었으므로, 지금만큼은 소녀를 내 여동생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프고 힘들었을 테지.

그래서 가족에게 집착한다. 증오하고 원망하면서도, 내게 사랑을 갈구하는 그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내 거래 제안을 받아들인 까닭도 알 것만 같았다.

‘진심’이라는 표현이 소녀의 의중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지도.

단 한 번도 가족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였다.

사랑과 애정 따위는 믿을 수 없다. 언제든지 꾸며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따라서 굳이 ‘진심’이라는 조건을 달아야 했다.

사람과 달리 계약은 믿을 만할 테니.

침묵 속에서 소녀의 보드라운 몸이 내 품을 가득 채웠다.

하아, 하아.

소녀의 숨소리가 다소 거칠어졌다. 몽롱한 눈빛과 당황한 얼굴, 제 스스로도 이 감정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1분.

길었는지, 짧았는지. 나는 시간조차 제대로 체감하지 못한 채 서서히 소녀로부터 떨어졌다.

소녀는 넋을 놓은 지 오래였다.

살짝 달아오른 볼과 갈피를 잡지 못하는 초점, 달뜬 호흡이 그녀의 상태를 짐작케 할 뿐이었다.

최소한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포옹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소녀가 멍하니 읊조렸다.

“……안 되겠어.”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도 전에.

소녀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뒷짐을 지고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는 그 황금빛 눈동자, 너무나 강렬한 욕망이 들끓는 색조였다.

차라리 광기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무심코 내가 뒷걸음질을 칠 때마다, 소녀는 걸음을 내딛어 나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그때부터 고저 없는 중얼거림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나, 가져야겠어… 오빠가 없으면 안 돼. 가지고 싶어, 가지고 싶어, 가지고 싶어… 무슨 수를 써서든… 그래!”

짝, 하고 손뼉을 치며 소녀의 낯빛에 화색이 돌았다.

명안이라도 떠올렸다는 태도였다. 정작 그 동공은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여전히 음영조차 엿보이지 않았지만.

“우리, ‘계약’을 하자!”

해맑은 제안에 내 미간이 좁아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물며 거래 대상이 나라면 더 이야기할 가치도 없었다.

내 고개가 곧장 내저어졌다.

“무슨 말을 해도 계약은 못…….”

“살려줄게!”

마치 선심이라도 쓴다는 양,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손을 제 가슴 위에 얹었다.

“전부 다! 대신, 오빠는 내 것이 되는 거야.”

우리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는 듯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이안… 고맙다. 네 희생은 잊지 않으마.”

“지랄하지 마.”

나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는 문제라며 얻어낸 잠깐의 말미.

내가 일행의 품으로 돌아오자, 유렌은 눈물을 훔쳐내는 척을 하며 내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말만 들으면 이미 내 희생이 결정되었다는 투였다.

물론 나는 이를 시시한 장난쯤으로 치부하고 넘길 뿐이었다.

솔직히 화를 낼까 싶기도 했지만, 유렌의 몸 곳곳에 피와 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 또한 최전선에서 시간을 벌고 있던 인물이었다.

등을 믿고 맡겨야 할 전우에게 목청을 높이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벌컥 화를 낸 쪽은 셀린과 엘시 선배 쪽이었다.

“미쳤어, 선배?! 농담도 때와 장소가 있지……!”

“우리 주인님을?! 절대로 안 돼! 저 눈빛 안 보여?”

엘시 선배의 말에 일행의 시선이 살짝 이동했다.

소녀는 꿈을 꾸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에게 안긴 이후부터, 쭉.

엘시 선배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우리 주인님이 잡아먹힐 거야, 위험해…….”

두 사람의 반대에도 유렌은 끄응, 하고 신음을 토해낼 뿐이었다.

그가 다소 피로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우리 전력은 객관적으로 저 여자한테 안 돼요. 저 여자는 ‘칠죄성’ 중 하나라고요.”

“칠죄성?”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았던 말이었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