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8화 〉 6. 존재 증명(36)
* * *
델피렘이 지은 태초의 일곱 죄를 상징하는 별, 그리고 그 별의 힘을 이어받은 암흑교단 최강의 전력들.
내 반문에 유렌은 마침 잘 됐다는 듯 음색을 내리깔았다.
“잘 들어, 칠죄성은 암흑교단에서 델피렘 다음 가는 괴물들이야.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흠집도 못 내! 그나마 ‘하이 익스퍼트’나 ‘대마법사’쯤은 돼야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지.”
“그럼 마스터는?”
“미쳤냐? 아무리 칠죄성이라도 마스터한테는 한 끗 딸리지… 아직까지는.”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의미심장했다.
‘아직까지는’, 다시 말해 칠죄성이 마스터와 맞먹는 수준까지 성장할 수도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랬다가는 종말이었다.
마스터 수준의 강자가 일곱? 암흑교단이 더는 은거를 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었다.
이미 갖춘 전력만으로도 대륙을 쓸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더더욱 이곳에서 얌전히 탈출할 수가 없어졌다.
무엇보다 걸리는 점은 아직 남아 있었다.
내 눈이 흘깃 하늘 위에 떠 있는 핏빛의 태양을 향했다. 그리고 여자아이를 감싼 핏빛의 고치까지도.
본체를 찾아냈으니 아이를 돌려받아야 하는데, 그럴 만한 틈이 나지 않았다. 어서 저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
이러한 내 심정을 짐작했는지, 유렌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 꼬마는 괜찮을 거야.”
“어떻게 알아?”
“’계약’했으니까.”
아주 간단한 문제라는 듯, 유렌은 그렇게 단언했다.
“계약이 강제되는 건 쌍방이 똑같아. 멀쩡히 살려서 돌려주겠다고 했으니, 고치에 갇혀 있을 뿐 아이는 위험한 상태가 아닐 가능성이 크지. 다시 말해, 우리가 살 길만 찾으면 된단 소리야.”
“그게 날 갖다 바치는 거고?”
그러자 유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굳이 널 바쳐야 할까? 조금만 더 조건을 조정해 봐. 딱 봐도 저 여자, 너한테 아주 단단히 홀렸던데… 널 놓치느니 차라리 까다로운 조건을 감수하려 들 수도 있어.”
“그보다 나를 제외한 모두를 죽여 버리는 편을 더 선호하지 않을까?”
그제야 되돌아오는 반박이 사라졌다.
유렌과 셀린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고, 엘시 선배는 턱을 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 또한 침묵 속에서 유렌과 나누었던 대화를 되짚어갔다.
엘시 선배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이 핏빛 실들…….”
좌중의 시선이 엘시 선배를 향했다. 그녀는 주위에 늘어선 핏빛의 실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이 밀실 전역에 퍼진 핏빛 실은 소녀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함부로 도주를 감행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차피 모든 행동 반경이 핏빛 실에 의해 점거당한 뒤였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네.”
“당연한 소리를.”
유렌이 헛웃음 대신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대마법사’.
다시 말해, ‘하이 익스퍼트’의 수준에 아주 잠깐이라도 도달할 수 있다면.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내 자그마한 중얼거림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금 내게로 모였다. 특히 유렌에 이르러서는 얼굴을 처참히 구기고 있을 정도였다.
내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할지 두렵다는 듯.
하지만 이미 내친김이었다. 나는 곧장 설명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은 아니야. 대신, 전투에 들어서면 시간을 좀 끌어줘야겠는데…….”
“시간?”
셀린이 고개를 갸웃했고, 유렌은 본능적으로 내 눈동자가 향하는 방향을 쫓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 말뜻을 깨달은 유렌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쳤냐?”
물론 헛된 저항에 불과했다.
나머지 두 여인의 강력한 찬동에 의해 뜻을 꺾은 유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말했다.
“이안, 너 할 수 있겠냐?”
굳은 결심을 한 내 발걸음이 흠칫 멎었다.
백 마디의 반론보다, 그 한 마디의 물음이 더 무서웠다.
“네 여동생이야… 망설이지 않을 수 있겠냐고.”
나는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시선이 측면을 향했다가, 아래를 향했다가, 입술이 떼어지고 다시 닫히기를 몇 번.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궤적을 따라 묵직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네가 선택한 거다, 이안.”
굳이 육성으로 된 대답을 돌려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말없이 유렌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렸다. 그리고 앞으로 나서, 기대감으로 가슴이 잔뜩 부푼 소녀에게 권했다.
“계약 조건을 수정했으면 좋겠는데.”
눈을 반짝이며 내 응답을 고대하고 있던 소녀의 낯빛이 일순 미묘해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태도였다.
이내 쯧, 하고 소녀의 입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차게 식은 눈빛이 나를 향한다.
“오빠,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어떻게든 이 난관을 돌파할 수 있다, 포기하지 않으면 길은 보인다…….”
푸흡, 하고 소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조차도 잠깐.
쾅, 하고 소녀의 분노를 담은 일각이 지반을 터트리며 내리꽂혔다.
으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이어진다.
“웃기지 마! 그딴 건 존재하지 않아!”
“그럼 증명해 봐.”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그렇게 소녀의 말에 맞섰다.
“조건을 수정하자. 우리가 제압 당하기 전, 네게 자그마한 상처라도 입힌다면… 더는 건드리지 마.”
쿡쿡, 하고 소녀의 입에서 자그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득한 미소가 소녀의 입가에 맺힌다. 가소롭다는 듯이.
“좋아, 어디 한 번 해 봐… 내게 자그마한 상처라도 입힌다면, 최소한 오늘은 오빠를 건드리지 않을게. 그럼 되겠지?”
“’계약’이야.”
흥, 하고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어느덧 나와 소녀의 손에 핏빛 동전이 들려 있었다. 두 개의 동전이 팅,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우리 사이에 나타난 핏빛의 저울을 향했다.
빙글, 빙글.
핏빛의 동전이 각 쟁반 위를 돌다 쓰러지는 찰나.
유렌이 나지막히 읊조렸다.
“이안, 명심해… 너는 선택을 한 거야.”
이후 핏빛의 실들이 교차하며 거미줄을 이루었고, 얼굴 없는 괴물들이 땅을 박차고 뛰쳐 들었다.
더불어 소녀의 손에는 다시 핏빛 채찍이 들리기까지.
그 모든 공세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일행들이 뛰쳐나간 직후, 나는 검을 손에 쥐고 눈을 감았다.
집중해야만 한다.
그날 보았던 풍경을 재현하기 위해서.
*
한 꺼풀 의식이 심층으로 잠겨 들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고함, 비명, 그리고 날붙이가 부딪히며 내는 소음.
잊어야 했다.
나는 애써 과거의 어느 지점을 더듬거렸다. 대마법사와 맞서 싸우던 날, 넌지시 보았던 그 경계의 너머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내가 가야 할 길이었다. 이제 곧 닿을 것만 같은 곳이었다.
그날 이후 몇날며칠을 불면증에 시달렸다. 내가 보지 못했던 진리의 파편을 상상하면서.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보이지 않는다.
검을 불태우는 은빛의 불꽃만이 내 심상을 비추는 유일한 조명이었다.
자신은 있었다.
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가망 없는 도박에 소중한 동료들의 목숨을 걸 리가 없었다. 찾고 찾다 보면, 길이 보이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만이 답이라면.
내 손이 어둠 속을 더듬었다. 어느덧 나의 공간은 정적과 칠흑 속에 잠겨 있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찾아내야 하는데.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하도 애를 쓰느라 안면이 구겨지고 펴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톡, 하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진 순간.
“……불가합니다.”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내 몸은 벌판 위에 서 있었다. 수많은 천막들이 저 멀리에서 진용을 이루었고, 어둑한 밤의 장막 아래서 열을 이룬 횃불들이 흔들렸다.
멋대로 내 입이 움직여 내뱉은 말에, 열기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어째서죠?”
“물자가 부족하니까요.”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음성.
반면 내 옆에 선 여인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더니, 이내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고, 종래에는 화를 삭이듯이 애꿎은 땅을 몇 번 찼다.
재미있는 여인이었다.
한때는 그 본성을 숨기고 살았다는데, 이제는 이토록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다니.
째릿, 하고 여인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후우, 좋아요… 그러니까 한없이 부족한 보급품을 가지고 한 달 이상 전선을 유지하라는 소리죠? 그래야만 새 보급품이 도착하고, 심지어는 그 양도 장담 못하는데?”
“어느 전선이든 사정은 비슷합니다.”
“자랑이에요?!”
더는 화를 참을 수 없었는지, 여인은 거친 손짓으로 천막이 늘어선 자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나같이 지친 표정을 한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물이 끓고 있으나 끼니를 때울 식량은 부족했다. 그들은 육포를 입에 머금은 채, 따스한 물을 몇 번이나 들이키고 있었다.
짠맛이라도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어요. 다들 목숨을 걸고 있다고요! 최소한 전장에서 죽게 해주세요. 보급이 부족해서 굶어죽을 수는……!”
“순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심코 욱, 해서 내뱉은 말이었다.
나조차도 입에 담고 나서 아차, 했을 만큼 도발의 의도가 명백한 말귀였다. 이미 화가 잔뜩 나 있는 여인이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리는 없었다.
나도 너무 지쳐 버렸다는 증거였다.
모든 전선의 상황이 최악이었다. 아직 전열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모든 이들이 내게 보급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서 없는 물자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논쟁을 수백 차례 겪다 보니, 나 또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말았다.
실수였다.
목숨을 걸고 전장에 선 이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곧장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됐어요.”
묘하게 쓸쓸한 어조였다.
성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허리춤에 매달고 다니던 호리병을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병을 기울이더니 꿀꺽꿀꺽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주량도 강하지 않은 주제에.
뒤이어 성녀는 풀이 자란 비탈길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허탈한 심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낯빛이었다.
내 마음은 더욱 죄스러워졌다.
“당신도 인간이었군요… 하! 왜 몰랐을까요. 보급을 해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해주고 싶은 사람이 당신일 텐데.”
“……죄송합니다.”
내 입에서는 연달아 사죄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든 말든, 여인은 삐뚠 조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또, 당신이 교리에 무지하다는 사실도 잘 알겠네요. ‘순명’이라… 후후, 당신이 그 뜻을 알기나 해요?”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인의 지적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자 여인은 곧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성직자가 맞는데.
어쩌다 삐뚤어지고 만 것일까.
“’순명’이란, 바람이 거세다고 해서 얌전히 엎어지고 쓰러지란 뜻이 아니에요. 요행을 바라며 고개를 빳빳이 들라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죠.”
“그럼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내 반문에, 여인은 훗, 하고 우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스로 답을 찾으세요. 난 성격이 나쁜 여자라, 순순히 답안지를 보여주지 않거든요.”
그럼 그렇지, 나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제 여인과 알고 지낸 지도 이래저래 몇 달이 넘었다.
그 꼬인 성정을 모를 만큼 내가 어수룩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요즘에는 그 이면에 자리한 여인의 상처가 얼핏 보이기도 했다.
여름을 지난 밤, 쌀쌀한 바람이 얇은 옷가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꼴깍꼴깍 술을 들이키는 여인의 차림은 더욱 얇았다. 보급품을 아끼기 위해 일부러 염가의 천으로 의복을 만든 대가였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여인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술이 들어가면, 우선은 몸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술에 취할수록 체온은 점점 더 낮아져 가기 마련이었다.
결국에는 추위에 더욱 취약한 상태가 된다는 뜻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여인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그 어깨를 덮어 버렸다.
난데없는 호의에 여인의 몸이 움찔, 하고 굳었다.
이 또한 잠깐이었다.
흔해빠진 감사의 말 대신, 여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놀려 댔다.
“아하, 이 틈에 작업을 한 번 걸어 보시겠다? 그야 배배 꼬인 성질머리만큼이나 제 미모가 유명하긴 하죠. 결국, 당신도 내게 군침을 흘리는 널리고 널린 남자 중 하나…….”
“이유 없는 호의가 두렵습니까?”
그 짧은 반문에, 여인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