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9화 〉 6. 존재 증명(37)
* * *
어안이 벙벙하다는 눈빛이 나를 응시했다.
“그래서 일부러 남을 도발하고, 미움을 살 짓을 반복하잖습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게, 무슨…….”
“배신을 당했으니까요.”
여인은 이제 토막 난 의문마저 제기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한숨과 함께 추론을 마무리 지었다.
“믿고 있던 모든 것에… 그러니까, 더는 믿고 싶지 않겠죠. 이해합니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여인은 내 낯빛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기를 얼마쯤.
말없이 고개를 돌린 여인이 다시금 술을 들이켰다. 나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당신도 그런가요?”
이제는 내가 허를 찔릴 차례였다.
내 몸이 흠칫 떨리며, 얼떨떨한 시선이 여인을 향했다. 그녀는 내게 눈길조차 보내지 않고 있었다.
“당신도 무서워 하잖아요. 그래서 감정이 마모된 인간인 양 행동하죠… 왜 그렇죠?”
그제야 나는 여인과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진중한 연분홍빛 동공 앞에서, 차마 거짓을 꺼낼 수는 없었던지라.
내 시선이 살짝 측면을 향했다.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아서.”
여인은 조용히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헐떡이면서, 어떻게든 말을 끝맺어야 했다.
“두렵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봐… 너무나 소중한 이들이었으니까.”
바람만이 귓가를 스친다.
풀이 눕고, 일어서는 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 습기를 머금어 다소 먹먹한 공기가 나와 여인 사이에 내려앉았다. 하늘에 뜬 달과 별만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여인의 손이 움직였다.
탁, 하고 나는 얼떨결에 날아든 호리병을 받아들었다. 성녀가 언제나 입에 달고 사는 술병이었다.
내가 무슨 뜻이냐고 되묻기도 전이었다.
“……닮았네요, 우리.”
그렇게 홀로 읊조리는 여인의 모습은, 지독히도 아름다워서.
나는 그녀가 올려다보는 것이 달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지상에 달이 뜬 줄만 알았다. 떠올린 내 자신조차 부끄러워 헛기침과 함께 지워버린 감상이었다.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길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호리병이 기울었고, 내 목을 열기가 타고 내려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서로의 과거를 털어놓았던 바로 그 비탈길에서, 나와 여인은 이끌리듯 입을 맞추었다.
“이 또한 ‘순명’해야겠죠.”
뜻 모를 소리와 함께, 애틋한 미소를 지으며.
“정정당당히, 운명에 눈 돌리지 않도록.”
나는 사랑을 했다. 봄의 끝물, 짧은 빛의 축제를 여는 반딧불이처럼.
*
거친 숨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체감만으로는 며칠이 지났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외부의 시간은 그다지 흘러 있지 않았다.
캉, 캉, 캉!
유렌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셀린의 도끼가 얼굴 없는 괴물 중 하나의 허리춤을 베고 지나갔고, 하늘에서 몰아친 벼락의 호우가 핏빛의 채찍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새 내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안 오빠, 더는 버티기 힘들어……!”
“어, 어어.”
나는 멍한 정신으로 검과 손도끼를 뽑아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만 본능이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내달려라.
그리고 정정당당히 맞서라.
운명에 눈 돌리지 않도록.
쾅, 하고 폭음이 내 고막을 두드린 직후였다.
“이안, 무슨……!”
경악에 잠긴 유렌의 망막에 내 모습이 비쳤다.
보이지 않는다. 지나치게 빨랐다.
하지만 이마저도 느리다.
시간이 점점 더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핏빛의 채찍이 뱀처럼 엘시 선배를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손도끼를 내던졌다.
궤적을 따라 은빛의 은하수가 흩어진다.
쿵, 하고 땅바닥을 파고든 손도끼를 중심으로 은빛의 폭발이 일었다. 핏빛의 채찍들이 제멋대로 흐트러지며 궤도를 틀어댔다.
태연자약하던 소녀의 눈빛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바로 눈앞에 틀어박힌 손도끼의 위력이 상정 외라는 듯이.
당혹, 의외, 그리고 불안.
그래, 그래야지.
변수를 마주하는 상인의 태도는 으레 그래야만 했다. 나는 온힘을 다해 폐부를 짜올렸다.
“엘시 선배, 뒤로 빠져요!”
“네, 넷!”
그러자 드르륵, 하고 핏빛의 실이 춤을 춘다.
수백, 수천, 수만에 이르는 실낱들이 나를 포위하듯 움직였다. 이미 나는 이 기술에 옴짝달싹 하지 못하도록 제압을 당한 적이 있었다.
두 번이나 당해 줄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문 턱이 덜덜 떨렸다. 들불처럼 타오르던 은빛의 오러가 점점 더 그 규모를 키워가고 있었다.
이전과는 달랐다.
나는 이미 충분한 시간을 들여 검에 오러를 모아두고 있었다. 유렌과 셀린, 엘시 선배가 벌어준 틈을 모으고 모아 만들어 낸 최후의 기회였다.
그 기세는 소녀조차 무시하지 못할 만큼 무시무시했다.
소녀의 손짓이 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수십에 달하는 얼굴 없는 괴한들이 일제히 땅을 박차고 내게로 쏘아졌다. 내 입에서 다시금 고함이 터져 나왔다.
“셀린!”
쾅, 하고 폭음이 대지를 울린다.
내게 얼굴 없는 괴물의 관심이 쏠린 사이, 마력을 온존해 두고 있던 셀린의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땅이 한 웅큼이나 패이고 괴물들의 비명 소리가 허공을 뒤덮었다.
크에에에에엑!
땅을 딛고 있었으면 몰라, 태반의 괴물들은 나를 덮치고자 도약을 한 뒤였다. 후폭풍을 이겨내지 못한 얼굴 없는 괴한들이 질풍에 휩쓸리는 나뭇잎처럼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그 와중에도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오는 핏빛의 실낱.
탁, 하고 내가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은빛의 폭포수가 핏빛의 실을 가로지르며 쏟아져 내렸다. 일순 버티는 듯하던 핏빛의 실들은 이내 속절 없이 끊겨 튕겨나가기 시작했다.
해(?).
대륙에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가 만든 비술이었다. 상대가 암흑교단의 칠죄성 중 하나라고 해도, 오러만 충분하다면 맞상대가 가능했다.
하나, 둘.
내 검이 은하수를 흩뿌릴 때마다 핏빛의 실들이 툭툭 끊겨 나갔다. 소녀는 이제 더없이 당황한 얼굴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막아, 막아…당장 막아!”
핏빛의 태양이 촉수를 뻗기 시작했다.
후두둑, 삽시간에 수백 개의 실들로 분열한 촉수가 나를 노리고 피의 호우를 내렸다. 하지만 이미 나와 소녀의 거리는 지근거리.
그렇게 내 검이 소녀에 닿기 직전이었다.
콱, 하고 소녀의 발길질이 내 명치를 파고들었다. 검을 높이 치켜들었던 만큼 내 몸에는 빈틈이 많았고, 이를 정확히 파고든 일격이었다.
자세를 정돈할 틈새는 없었다. 나는 그 일격을 고스란히 허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울컥, 하고 핏물이 새어 나오며 내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수백 개의 핏빛 실이 나를 포박했다. 승리가 눈앞이었는데, 검에 담긴 오러가 아슬아슬하게 한계를 맺고 말았다.
핏물을 머금은 채로, 내 몸이 비틀비틀 자세를 바로 잡았다.
팔은 이미 묶어 움직이지 않았다. 경계를 지우지 않은 채 주위를 둘러보던 소녀는, 그제야 마음을 터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흐, 아하, 아하하하하하하핫!”
물론 그 광소는 길지 않았다.
으득, 하고 이를 갈며 소녀의 금빛 눈동자에 다시 증오와 멸시의 감정이 타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를 좋아하는 건지, 미워하는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었다. 아마도 두 가지 감정 모두 진심이겠지만.
“고작, 고작해야 이거야?! 온힘을 짜냈지만, 안타깝게 됐어! 어떻게 단기간에 이렇게 오러가 정교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승리야.”
원색적인 비난이었다.
소녀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나는 소녀 앞의 죄인이었고, 또 패배를 앞둔 기사였으니까.
소녀의 발이 콰직, 하고 내 발등을 짓밟은 것은 그때였다.
나는 무심코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어떻게든 참아냈다. 그럼에도 일그러지고 마는 내 표정을 보며, 소녀는 생글생글 예쁜 미소를 머금었다.
“진작 포기하라고 했잖아? 내 말을 진작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응? 그리고 이 발, 이 발은 뭐야? 뭘 그렇게 밟고 있는데? 어차피, 검에 맺힌 오러는 이미 소진…….”
그렇게 말하며, 소녀의 시선은 서서히 내 발밑을 향했고.
우뚝 멎었다.
은은한 은빛이 내 발밑에서 잔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멍하니, 소녀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제야 나는 쿨럭, 하고 핏물을 내뱉으며 웃었다.
“……여동생을 위한 깜짝 선물.”
쿵, 하고 폭발이 이는 듯하더니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삐이이 하는 이명이 고막의 혹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내 눈이 놓치지 않고 있는 광경이 있었다.
하늘을 빙글빙글 돌며 튕겨 오른 손도끼.
이것이 폭발의 근원이었다. 지난번 대마법사와 전투를 벌였을 때, 나는 발을 통해 손도끼에도 오러를 퍼부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응용이었다.
새하얀 빛의 세계를 견디지 못한 핏빛의 실선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입술을 짓씹은 소녀의 수도가 다급히 내 손목을 후려쳤다.
우득, 하고 손목이 꺾인다.
괜찮았다. 내 무장은 그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내 남은 손이 곧장 허공을 유영하던 손도끼를 낚아챘고.
“……아.”
소녀의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탄성과 함께, 새하얗게 물든 시간 속.
핏물이 무지개를 그린다.
도끼날이 소녀의 어깨를 파고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