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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50화 (450/649)

〈 450화 〉 6. 존재 증명(38)

* * *

마주 선 두 남녀의 몰골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다.

우선 내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억지로 핏빛 실을 쥐어뜯으며 내달린 뒤였다. 피부 곳곳에 긁힌 자국이 남아있었고, 짓밟힌 발목은 피와 살이 뒤섞여 끔찍한 꼴을 하고 있었다.

부러진 오른 손목이 칼을 쥔 채 덜렁거렸다. 흉물스러운 모습이었다.

반면 내 앞의 소녀는 아무런 생채기조차 없었다.

새하얗고 깨끗한 피부는 여전히 윤택이 돌았다. 헐떡거리며 숨을 들이마시는 나와 달리 호흡도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순백의 도화지 위에 번진 유독 정열적인 색조.

어깨에 틀어박힌 손도끼로부터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녀의 심장 박동에 따라 푸슉, 하고 핏물이 이따금씩 뿜어져 나오기도 했다.

그 상처 하나가 또 하나의 결정적인 대비를 만들었다.

나는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웃는 낯이었으나, 소녀의 낯은 당혹과 수치로 물들어 있었다. 분하다는 듯 악물어진 잇새로 옅은 열기가 새어 나왔다.

설마, 나 따위에게 당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하지만 뿜어져 나오는 핏물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신음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승패는?”

소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금빛 눈동자가 원망을 담아 나를 째려보았으나, 소녀는 차마 내게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한 ‘계약’이었으니까.

본심을 내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승패는 정해졌다.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

결국 소녀는 패배를 시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 내가 졌어.”

그와 동시에 얼굴 없는 괴물들의 발버둥이 멈췄다.

셀린의 일격에 날아간 괴물들은 땅바닥에 엎어져 잃어버린 팔다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전투가 무의미해졌으니, 괴물들 또한 제 몸을 수복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혹은 소녀가 일부러 그렇게 지시를 내렸던가.

그제야 팽팽히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풀렸다. 셀린과 엘시 선배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나는 맥이 탁 풀려 주저앉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나는 소녀의 어깨에 박혀 있던 손도끼를 회수했다. 통증이 심할 텐데도 소녀의 낯빛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치 이만한 고통쯤은 수없이 겪어봤다는 듯이.

내 눈이 흐릿한 연민이 스치자, 소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여태껏 내가 당해 왔던 일에 비하면, 아픈 축에도 들지 않으니까……”

이를 증명하듯 소녀의 어깨에 곧장 새 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마른 우물에 빗물이 차오르는 속도조차 이보다 빠르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침묵.

잠시 머뭇거리던 내 입에서, 씁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미안하다.”

진작에 했어야 할 말이었다.

무엇이 미안한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모든 것이 죄스럽고 불쌍했다.

소녀가 홀로 감내해야 했던 고통이 어땠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더불어 우리는 서로 너무 먼 길을 떠난 사이였다.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하고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소녀의 죄가 너무나 깊었으니까.

물론 그 죄가 오롯이 소녀의 책임만은 아니리라. 이는 힘없는 꼬마 아이를 져버린 나와 우리 가족의 책임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소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소녀가 더 이상의 죄를 짊어지지 않는 것.

그것이 내게 주어진 최소한의 의무였다. 아마도 소녀 또한 우리 가족을 영원히 용서하지 못하겠지.

이처럼 여러 감정을 담은 사죄였다. 혹은, 이별의 인사라고 해도 좋았다.

소녀의 입술은 굳게 맞물린 채 열리지 않았다. 당장 내게 대답을 돌려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소녀는 단지 등을 돌리고 사뿐사뿐 걸어, 다시금 핏빛의 태양 아래에 섰다. 어느덧 그 자리에는 핏빛의 권좌가 나타나 있었다.

권좌에 착석하기 직전, 소녀의 금빛 동공이 나를 쫓았다. 요사스러운 미소가 지독히도 어울리는 눈빛이었다.

“벌써부터 사죄하지 마. 아직 우리의 만남이 끝난 건 아니잖아?”

“곧 끝날 예정이지.”

“그건, 내가 정해.”

탁, 하고 자리에 앉은 채 나를 응시하는 소녀의 낯빛에는 한 점의 의심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거짓이나 허세를 입에 담는 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다.

그렇게 미간을 좁히며, 내가 소녀에게 무어라 되묻기 직전.

“나는, ‘탐욕’이야.”

손가락을 퉁기는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가져야 해.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일생토록 바라마지 않던 존재가 나타난 거야…….”

그러자 핏빛 태양이 이글거리며 그 규모를 키워 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내뿜는 선홍빛의 구체는 압도적이었고, 또 섬뜩했다.

이변의 조짐이었다.

발작처럼 여인의 손이 쾅, 하고 팔걸이를 강타했다. 그 낯빛을 물들이는 환희가 색정적인 채도를 품고 파도쳤다.

“이걸 어떻게 놓쳐?! 어떻게 포기할 수 있어?!”

나로서는 황당한 소리였다.

내기에서 승리한 쪽은 나였다. 당연히 내게는 계약의 이행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내 목청이 곧바로 높아졌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설마 ‘계약’을 어길 생각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계약’은 지켜져야만 하니까.”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핏빛의 물결이 이어진다.

여울을 탄 피의 급류가 소녀의 새하얀 원피스를 물들이고 있었다. 최초에는 핏빛, 뒤이어 검붉은빛, 종래에는 칠흑으로 변모하는 옷가지.

두터운 천으로 이루어진 사제복은 차라리 죄수복을 연상케 했다. 검은 바탕에 새하얀 실선이 테두리를 장식한 그 복장의 한복판, 핏빛의 악귀가 꿈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델피렘, 인류 최초의 죄인을 상징하는 표식.

소녀가 상쾌한 미소를 깨물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광증을 보이던 인물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계약대로, ‘나’는 ‘오늘’ ‘오빠’를 건드리지 않을 거야.”

무슨 소리냐고, 내가 울컥해서 되물으려던 찰나였다.

소녀가 쯧쯧, 하고 혀를 차며 검지를 흔들었다. 이 또한 예상하던 바라는 듯했다. 그 황금빛 눈동자에 질척한 애증의 늪이 일렁였다.

“그러니까 계약 조건은 자세히 들었어야지? 내게 자그마한 상처라도 입힌다면, ‘오늘’은 ‘오빠’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주어가 빠져 있는데?”

“당연히 ‘나’지!”

쿡쿡, 하고 유독 억지스러운 주장을 하며 소녀는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한 말이니까, 그 편이 자연스럽잖아?”

“그게 무슨 헛소리…….”

“내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이곳에 왔을 것 같아?!”

또 다시 소녀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여인의 감정이 초마다 흥분과 평온 사이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흥분’의 차례인 듯했다.

달뜬 음성이 나를 쏘아붙인다.

“아주 오래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어. 계속, 계속… 십수 년 동안이나 상상했거든? 오빠를 다시 그 가짜한테 뺏어올 그 날만을… 그런데, 날 너무 만만히 본 것 아니야?!”

내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 나왔다.

십수 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다. 리아가 페르쿠스 저택에 처음으로 도착했을 떼가 그 무렵이었으니, 소녀의 진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소녀가 나를 아주 오래 전부터 지켜봐 왔다는 소리가 아닌가.

너무나 잔혹한 이야기였다.

자신을 제외한 가족의 단란한 한때를 본다. 심지어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가슴이 너절해질 만큼 고통스러운 일일 터다.

차마 내 입술이 떨어지지 않던 틈에, 소녀의 선언이 이어졌다.

“대가 없는 거래 따위는 없어… 전원 기립!”

팍, 팍, 팍.

핏빛 광선이 엎어진 괴물들의 신체를 꿰뚫었다. 얼굴 없는 괴물들은 이에 호응하듯 기나긴 울음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

비척, 비척.

몸을 일으킨 괴물들이 서로를 육신을 습격하며 물어뜯었다. 아그작, 아그작. 불쾌한 소음이 이어지자 나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당장 저 괴물들을 막아!”

즉각 응수에 나선 쪽은 셀린과 엘시 선배였다.

오랜 실전 경험은 인간을 하나의 병기로 제련하곤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저 두 사람이었다.

셀린과 엘시 선배는 이미 내 지시 한 마디에 언제든 요격에 나설 준비를 끝마친 뒤였다.

핏물과 전하의 폭풍이 대기를 진동시킨다.

핏빛 태양은 건재했으나, 우리를 제압하고 있던 핏빛 실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이전처럼 소녀가 이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최소한 그때까지는.

다급히 땅을 박차려던 나와 소녀의 눈이 마주쳤다.

비틀린 미소가 내 망막에 떠올랐다. 소녀는 단 한 치의 의심조차 없어 보였다.

승리한다.

그 외의 가능성을 거세한 자의 얼굴이었다. 내 시선이 자연스레 그 동공을 따라갔다.

셀린이 눈에 띄었다.

어라, 하는 사이 셀린의 도끼가 엘시 선배의 어깨를 찍어 내리기 시작했다.

“어, 어?”

엘시 선배는 비명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부릅뜬 눈으로 셀린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셀린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오직 셀린의 팔을 은은히 타고 오르는 핏빛의 마력만이 단서를 제공할 뿐이었다.

‘계약’이었다.

도대체 어느새?

이러한 의문이 내뱉어지기도 직전.

“……동업자, ‘계약’을 이행해야지?”

푹, 하고 내 복부를 꿰뚫고 은빛의 검신이 등장했다.

핏물이 울컥울컥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나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부릅뜬 시선을 배후로 전달해야 했다.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느꼈으나 무시했다.

옥빛의 머리카락, 중성적인 외모를 가진 사내가 그보다 더 참혹해질 수 없는 얼굴로 읊조렸다.

한숨을 뒤섞으면서.

“내가 도망치자고했잖아, 이안…….”

배신자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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