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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53화 (453/649)

〈 453화 〉 6. 존재 증명(41)

* * *

나는 어떻게든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살갗을 스치는 보드라운 감촉, 탄력 있는 살덩어리가 마찰하며 푹신한 촉감을 선사했다. 아찔할 만큼 강렬한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무언가 향을 피우기라도 한 걸까.

치밀어 오르는 음심이 척추를 슬금슬금 타고 올라왔다. 마력이라도 돌리면 좀 낫겠는데, 구속구의 효과 탓인지 체내의 마력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감각이 유달리 예민하다. 전신의 솜털이 곤두선 듯한 감각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아직까지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까닭.

그것은 전적으로 내 동료의 덕이었다.

엘시 선배와 셀린, 그리고 실종되었던 리아까지.

지금 내 어깨에 짊어진 목숨만 무려 셋이었다. 다들 목숨을 잃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내가 정신을 잃으면 어떤 꼴을 당할지 몰랐다.

그 사실을 몇 번이고 되새기고 나서야 내 호흡이 정돈되었다.

소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몽롱한 금빛 시선이 내 얼굴을 핥아내고 있었다.

이따금씩 제 둔부를 은근슬쩍 비벼대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버틸 만했다. 내 잇새로 신음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곳은, 어디야……?”

“성국 모처에 마련된 은신처. 그리고 나와 오빠가 지낼 사랑의 보금자리!”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는지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하지만 정작 내 입가에는 헛웃음이 맺히고 말았다. 내 눈이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밀실이었다.

하늘에서 흐릿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으나, 절대적인 광량이 부족했다. 더불어 가구나 장식품 하나 없는 실내의 풍경이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보아도 사람이 살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이를 입증하듯, 엘시 선배의 앞에는 개 밥그릇이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엘시 선배의 목에 달린 구속구 또한 개 목줄을 본뜬 모습이었다.

악독한 취미였다.

놀라운 사실은, 차라리 엘시 선배는 대접이 나은 편에 속한다는 점이었다. 셀린과 리아의 곁에는 어떠한 식량이나 식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최저한의 응급 처치는 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까닭은 모르겠으나, 소녀는 일단 내 동료들을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우선 그 가설에 안도감을 느꼈다.

자연스레 내 입에서 이죽이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요즘 사랑의 보금자리는 사람을 매달아 놓는 게 유행인가?”

“아하, 그 점이 불만이었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가 날 받아들이기만 하면,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갈 테니.”

소녀의 상반신이 포개지듯 내 몸에 기대어졌다. 흉부에서 느껴지는 아늑한 감촉과 향긋한 살내음, 진득한 유혹의 목소리가 연달아 내 오감을 강타했다.

“부귀영화? 산해진미? 주지육림? 말만 해! 무엇이든 줄 수 있으니까… 오빠가 내 것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경쾌한 윤율을 형성하던 속삭임이 끄트머리에서 차갑게 식었다. 희열에 물들어 있던 그 금빛 눈동자조차 일순 한기를 품었을 정도였다.

소녀는 유독 내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가족이라서?

유력한 추론이었다. 소녀를 버리기로 한 날, 그 결정에 관여하지 않은 페르쿠스는 내가 유일했다. 그러니 소녀가 '혈연'이라 부를 인물 또한 내가 유일할 수밖에.

하지만 이 가설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지점이 존재했다.

소녀는 여동생이 아닌 여자로서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지 못한 탓일까. 그렇다면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아직은 단서가 부족했다.

사실 지금의 내게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이기도 했다. 당장 동료들의 목숨이 걸린 판인데, 소녀의 감정이 어떻든 간에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녀는 아직도 내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틈을 노려, 나는 구속구에 살짝 마력을 흘려보냈다.

마력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의 원리를 응용하기 시작하자, 실낱 같은 오러가 구속구를 톡톡 두드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과연 대륙의 단 셋뿐인 마스터, 대마녀의 비기다웠다.

조금만 더 빈틈을 보인다면 구속구를 해제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일단 소녀를 찔러 보기로 했다.

“나는 아직 네 것이 된다고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야 당연하지, 이제부터 말하게 될 테니까! 자, 봐?”

소녀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묶인 여인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상대는 셀린이었다.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내 소꿉친구는, 눈을 감은 채 끙끙거리는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뺨을 따고 흐르는 식은땀이 셀린의 악몽을 증언하고 있었다.

“우선 셀린 언니! 마음 같아서는 좀 더 교육을 하고 싶지만, 내 소중한 거래 상대니까? 일단은 넘어가 줄게!”

생글생글 웃는 낯이던 소녀의 분위기가 일변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반항적인 금빛 눈동자가 소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거울을 보듯 똑 닮은 두 사람이었지만, 그 행색은 정반대였다.

흙투성이에, 누더기가 된 원피스를 걸친 리아.

그리고 칠흑의 사제복을 걸친 채 이를 내려다보는 소녀.

리아는 그 사실이 못내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이에 맞서 소녀는 픽, 하는 조소를 터트렸다.

“또, 우리 가짜… 진작 죽여서 없애야 하지만, 좀 특별한 개체거든? 그러니까 일단은 살려 줄게. 연구 자료는 소중하니까.”

“웃기지 마.”

목울대를 긁으며 흘러나온 사나운 목소리였다.

오랜만에 만난 리아는 악에 받혀 있었다. 그동안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였다.

“난 네 가짜 따위가 아니야… 심리적인 약점을 노리고 남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게, 상인이라고? 넌 단지 사기꾼에 불과해.”

싸늘한 반론이었으나, 소녀는 딱히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단지 흐응, 하고 눈을 가늘게 떴을 따름이었다.

이내 소녀의 두 손바닥이 짝, 하고 맞부딪혔다.

흥미 없다는 뜻이었다. 요사스러운 황금빛 눈동자가 다음 희생양을 찾아 움직였다.

“뭐, 그 점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하고… 우리 강아지?”

소녀의 입가에 다시 한 번 호선이 떠올랐다. 애정을 가장한 그 낯빛은 지나치게 어색해서, 작위적인 느낌을 일부러 주는 것만 같았다.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은 소녀의 손길이 엘시 선배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렸다.

개 목줄을 한 엘시 선배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짜증이 가득 배인 그 눈빛으로 엘시 선배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짜증을 넘어 수치와 분노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하의 여자아이한테 애완견 취급을 당하고 있는 마당인데, 화가 나지 않으면 이상했다.

왜 연하의 남자인 나는 예외였는지 모르겠지만.

엘시 선배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감정이 극에 달했다는 증거였으나, 소녀는 가학적인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보금자리에 우리 둘밖에 없으면 심심하잖아? 그래서 오빠가 귀여워하는 애완견도 한 마리 기르려고. 하지만 말이야…….”

호들갑스럽게 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머리채를 휘어 잡힌 엘시 선배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바둥바둥 몸부림을 치기도 했으나, 두 손과 두 발이 모두 묶인 터라 제대로 된 반항조차 불가능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엘시 선배!”

키득키득, 기대하던 대로의 반응이라는 듯 소녀가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자랑하듯 엘시 선배의 고통에 찬 얼굴을 전시하며, 장난스러운 협박이 이어졌다.

“오빠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할지 몰라?”

이가 으득으득 갈렸다.

당장이라도 구속구를 풀고 검을 쥐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 무장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내 앞의 소녀가 지닌 무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좀 더 빈틈을 노려야 한다.

냉정한 판단을 끝마친 내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장단을 맞춰 주는 수밖에 없나.

그러한 결론을 내렸을 무렵이었다.

“……지랄하지 마.”

엘시 선배가 애써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나와 소녀의 멀뚱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엘시 선배는 진심으로 우습다는 표정이었다.

“애정 결핍 꼬맹이 주제에… 누가 누굴 교육해? 너, 단 한 번도 사랑 받아 본 적이 없잖아.”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어질 때마다 소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져 간다.

“그래서 ‘계약’이니, ‘주종관계’ 같은 소리가 없으면 안심이 안 되는 거야… 조건 없이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거든. 풉, 푸흐흐… 이 엘시 라이넬라가, 그따위 어린애 장난에 어울려 주길 바라?”

“……암캐 주제에.”

종래에 이르러 소녀의 표정은 이보다 차가워질 수 없을 만큼 굳어 있었다. 탁, 하고 펼친 손바닥 위로 핏빛의 채찍이 맺혔다.

“아직 교육을 덜 받았구나? 으응, 좋아… 정 원한다면 내가 직접 교육해 줄게!”

쾅, 하고 이를 악문 소녀가 휘두른 채찍이 지면을 강타했다.

다시 보아도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저 채찍에 얻어맞는다면 엘시 선배도 목숨을 부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소녀를 만류하기로 했다.

“그만!”

막 채찍을 움직이려던 소녀의 몸이 멈칫했다. 의아한 시선이 나를 향하자, 내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내가 어울려 주면 되잖아… 대신, 엘시 선배는 건드리지 마.”

엘시 선배는 내 말에 울컥해 무어라 말하려는 듯했지만, 내 무언의 제지를 받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눈꼬리에 옅은 이슬이 맺혀 있었다.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수치는 잠깐이고, 목숨을 부지하다 보면 복수의 때가 오기 마련이었다.

머뭇거리던 소녀의 입에서 신중한 반문이 이어졌다.

“……어울려 주다니?”

“네 마음대로 하라고. 어차피 내가 묶여 있는 동안은, 뭘 해도 안 되잖아? 최소한 이곳에 묶여 있는 동안은 어울려 줄게.”

은근슬쩍 ‘묶여 있는 동안’이라는 조건을 추가했으나, 소녀는 딱히 그 점에 주목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한동안 풀려날 일은 없으리라 확신하는 듯했다.

틈만 주어진다면.

나는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태연함을 가장했다. 내 시큰둥한 태도에 소녀는 그제야 반색하며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그럼 오늘 하루 저 암캐를 건드리지 않는 대신. 오빠는 나랑 어울려 주는 거야?”

“그래, 묶여 있는 동안은 얼마든지… 대신 나도 하루 동안만.”

내 의무적인 흥정에도 소녀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계약 체결이었다.

핏빛의 저울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소녀는 이제 엘시 선배에게 일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소녀가 나를 껴안기 직전.

“그 전에, 하나만 물어도 되냐?”

“응?”

느닷없는 말이었다. 소녀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지만, 나는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고 물음을 이어갔다.

“넌 왜 나한테 집착하냐?”

그러자 소녀의 걸음걸이가 맺었다.

흐음, 하고 턱을 손가락으로 짚은 소녀가 고심을 반복했다. 어느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이내 소녀는 새하얀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좋아, 이야기해 줄게. 내 어린 시절.”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웃음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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