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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55화 (455/649)

〈 455화 〉 6. 존재 증명(43)

* * *

“……그래서 이 가짜가 특별하다는 거야.”

나는 소녀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차마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내가 여동생에게 쏟은 애정이, 소녀에게 비뚤어진 애정을 심어 주었을지는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이는 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녀의 발이 리아를 툭툭 차고 있었지만, 리아는 불만 대신 침묵을 택했다. 옅은 신음과 흐르는 식은땀만이 그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물론 소녀는 우리의 반응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까짓 과거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금빛 눈동자는 학구열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나와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특수한 개체거든. 그런데 미트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얼마 전부터는 이 가짜가 내 힘의 일부를 쓰기 시작했어… 감각 공유가 끊긴 건 덤이고.”

소녀의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최근 들어 리아가 무심코 보이던 근력과 순발력, 그것이 소녀에게서 빌려 온 힘인 듯했다.

소녀는 그 점이 못내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미트람한테 물어보고 싶지만,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고… 뭐, 어쩔 수 없지? 내가 알아서 연구해 보는 수밖에.”

그것이 소녀가 리아에게 보인 마지막 관심이었다.

이내 해맑은 소녀의 미소가 나를 향했다.

“그보다, 웃기지 않아? 이 구도 말이야… 예전의 나랑 비슷하네?”

“무슨 소리지?”

버림 받은 여동생의 물음을 차마 무시할 수만은 없어서, 나는 그렇게 되물었다.

소녀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다.

“나도 그렇게 구속당해 있었거든. 하늘에 빌고, 부모를 찾고… 그래도 구원 따위는 찾아오지 않았어. 사실, 구원은 남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야.”

사뿐, 사뿐.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소녀의 입가에 맺힌 호선이 짙어진다. 그 금빛 눈동자에 차가운 불꽃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애증이다.

소녀가 지닌, 나를 향한 감정은 그렇게 정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증오하고 미워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원하는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잃어버린 그녀의 인생을 완성하는 유일한 퍼즐이었으므로.

웃긴 꼴이 아닌가.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 신 따위는 없어. 절망하고, 울부짖고… 이제 진리를 받아들여, 오빠.”

“……유렌은.”

가까스로 짜낸 또 하나의 물음이었다.

도무지 소녀의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또 몰랐을 터다.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나 자신을 저버리며 나아가면 그만이다.

요행이 겹쳐 이루어진 업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행운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줄만 알았다.

정작 그 기적이 얼마나 많은 고아의 피를 대가로 한 것인지도 모른 채.

그러니 이 반문은 일종의 발악에 불과했다.

“유렌은, 어디로 갔지?”

“성녀를 찾으러 갔어.”

짧고 담백한 답변, 내 눈앞이 암담해지기엔 충분했다.

“그 여자는 위험하거든. 오빠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알면, 바로 무슨 수를 동원해서든 찾아낼 거야. 그러다 혈정의 정체가 알려지기라도 하면, 성녀도 위험해지겠지? 그래서 동업자 양반이 호위기사로서 찾아간 거야.”

“무슨, 짓을 하려고…….”

“감금해 둬야지?”

쿡쿡, 하고 뭘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소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호위기사를 의심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동업자는 곧장 자취를 감추는 거지. 그리고 성국에 혼란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짠!”

소녀의 두 팔이 높이 들리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리가 준비해 둔 계획이 하나둘씩 시작되는 거야! 멋지지, 재밌겠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위선자들이 울부짖을지……!”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틀렸다. 진작에 성녀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리아가 납치되었다는 생각에 눈이 멀었다. 보다 신중히 접근하면서, 차라리 유렌이 배신자라는 사실까지만 알았어도 이만큼 벼랑 끝에 몰릴 일은 없었을 텐데.

성녀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신의 존재를 의심했다.

정녕 이제 끝이란 말인가. 구원 따위는 없단 말인가.

소녀는 희열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내게 다가오기 직전.

웅웅, 하고 내 품속의 무언가가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소녀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뭐야, 이 소리는?”

나도 깜짝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눈이 곧장 가슴팍을 향했다.

그곳에서 구슬 하나가 진동을 토해내고 있었다.

일순 뇌리가 새하얘진 내가 그 구슬의 연원을 되짚어 가려던 찰나.

쾅, 하고 어디선가 폭음이 일었다.

자그마한 소리였지만, 고막을 울리는 이 진동은 진짜였다. 나를 비롯한 좌중의 시선이 모두 그 진원지를 향했다.

저 멀리에서 오고 있다. 무언가가.

쾅, 쾅, 쾅!

폭음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 속도가 상상 이상이라, 소녀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멍하니 읊조려야 했다.

“침입자? 하지만, 어떻게……? 너무 빠르잖아. 집단이 들어왔다면, 내가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웅웅.

구슬이 점점 더 격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폭음과 함께 공동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서는 돌 가루가 우수수 떨어지고, 견디다 못한 소녀가 시선을 홱 하고 돌렸을 무렵.

파직, 하고 흐릿한 전하가 두터운 철제 문 너머에 스쳤다.

이를 본 소녀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콰쾅!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굉음이 대기를 후려쳤다. 그 충격파에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이내 거칠게 젖힌 철제 대문 너머에서 매캐한 탄내음이 일었다.

키에에엑!

크엑!

숯덩이가 된 얼굴 없는 괴물들이 꿈틀거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죽기 직전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전신의 혈맥과 신경이 모조리 타버린 괴물들의 숨이 곧 끊어졌다.

그때까지도 소녀는 우뚝 선 채 반응이 없었다. 단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정면을 응시할 뿐.

그곳에 장신의 사내가 서 있었다.

휘리릭, 탁.

칠흑의 막대가 허공을 유영하다 낙하한다.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 푸른 안광이 도깨비불처럼 타올랐다.

“하도 연락이 없어 찾아와 봤는데…….”

감정이 마모된 목소리가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중년의 푸른 눈동자가 좌중을 번갈아 가며 보기 시작했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소녀와 리아, 그리고 엘시 선배까지.

무감정한 눈빛을 한 채로, 사내가 물었다.

“조카사위. 하나만 묻지… 혹시 이것도 자네가 지닌 특이 성벽의 일환인가?”

하도 어이가 없는 물음이라, 나는 제대로 된 사고조차 거치지 못했다.

내 대답은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미쳤습니까?”

“그래, 그렇군…….”

휘리릭, 탁.

다시 한 번 허공을 날던 칠흑의 막대가 다시금 사내의 손에 도달했다. 조용히 눈을 감은 중년의 기세는 태풍을 앞둔 바다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소녀의 목에 핏대가 섰다.

“당신, 도대체 누구……!”

“용병 시절에는 ‘전장의 뇌신’이라 불리기도 했네.”

의외로 담담한 어조에 소녀의 몸이 흠칫 떨렸다.

사내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강렬한 안광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진리의 끄트머리를 본 자.

단신으로 전황을 뒤바꾸며, 지형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진정한 강자들.

“가문으로 돌아와, 조직에 몸담으며 한동안 성질을 죽이고 살았지… 그러던 어느 날, 웬 꼬맹이 하나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가슴 속 등불에 불을 붙이더군.”

대마법사가 한 걸음을 내딛는다.

아지랑이처럼 대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고밀도의 마력만이 보일 수 있는 이상 현상이었다.

흘깃, 푸른 눈동자가 나를 눈짓했다.

“내 조카사위일세.”

높낮이조차 없는 목소리로 이루어진 선언이었다. 그 난데없는 소리에, 넋을 놓고 있던 소녀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푸, 풉큭… 아하하하하하하! 이 삭아빠진 늙탱이가, 뭐라는 거야! 혹시, 대마법사라고 해서 단신으로 날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착각도 유분수지……!”

“왜 내가 혼자 자네를 상대해야 하나?”

허공에 핏빛의 태양이 출현하기 직전, 레이놀드 씨가 던진 반문이었다.

그 저의를 짐작하지 못한 소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리고 그때, 뇌전의 채찍이 세상을 반으로 찢었다.

파직거리는 소리에 귀가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새하얗게 시야를 물들이며, 하늘로부터 지상을 양단하는 채찍의 위용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소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캉, 하고 소녀의 팔을 휘감은 핏빛의 채찍이 뇌전의 채찍을 쳐냈다.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한 채찍은 하늘 위로 튕겨저 오르더니, 이내 토막이 나 흩어졌다.

소녀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 고작 이따위 마법으로……!”

하지만 그 여유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토막 난 뇌전의 파편 사이로, 낯익은 날붙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그 무장들은 내게도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검과 손도끼.

나는 그동안 몰래 모아두었던 오러를 일시에 해방했다.

캉!

강철로 된 구속구가 형편없이 깨져 나가며 흩어졌다. 소녀가 미처 대응을 보이기 직전, 검과 손도끼가 차례로 내 두 손에 안착했다.

그리고 검과 손도끼를 정면으로 교차하며 결(?)로 방어 자세를 취하기까지.

완벽한 협공의 태세였다.

순식간에 뒤바뀐 전세에, 소녀는 그만 얼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대마법사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협공도 전술의 하나일세. 특히, 용병과 싸울 때는 말이지. 아무튼 간에…….”

하지만 그 메마른 웃음소리에는 감정이 섞여 있지 않아서.

소녀는 으득, 하고 이를 갈며 핏빛의 태양을 급히 띄워 올렸다. 목적을 달성하기 직전에 방해를 받은 탓일까, 그 눈빛에는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섬뜩한 떨림이 서서히 공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웅웅, 벌써부터 떨리는 검과 손도끼가 다가올 뇌전의 폭풍을 암시하는 듯했다.

“슬슬, 내 조카를 데려간 대가를 받아볼까?”

“웃기지 마, 늙다리 주제에……!”

그렇게 두 강자의 목소리가 교차한 직후.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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