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6화 〉 6. 존재 증명(44)
* * *
빛과 열이 춤을 춘다.
백열하는 세계는 소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이명만이 멀어버린 청각을 채울 뿐이다.
이따금씩 터져 나오는 섬광이 망막을 뒤덮었다. 매캐한 탄내음이 코를 뚫고 뇌리까지 치달았다.
시각도, 청각도, 후각도 무의미한 공간이었다.
심지어 따끔거리는 열기에 촉각조차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탈색된 세계 속을 나를 비롯해 셋이나 되는 인원이 누비고 있었다.
경지를 이룬 무인들은 상식이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땅을 울리는 진동만으로 시야조차 닿지 않는 곳의 발소리를 눈치 채는 이들이었다. 오감을 넘어선 영역의 직감이 내 몸을 멋대로 추동하고 있었다.
진심을 내보인 대마법사는 과연 강맹했다.
공세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찰나의 틈조차 주지 않고 쏟아져 내리는 뇌전의 폭풍은 이미 실내를 반파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에 못지 않은 괴물이었다.
“어리석어…….”
으득, 으득.
소녀가 이를 가는 소리에 맞추어 핏빛 채찍이 춤을 춘다.
뱀처럼 꿈틀거리던 핏빛이 일직선의 광선이 되어 일대를 휩쓸었다.
그러자 수십 개에 달하는 전뇌의 구체가 일제히 폭발했다. 하나둘씩 허공을 메우던 뇌전의 창이 뒤이어 쏘아졌으나, 핏빛의 채찍이 다시금 세상을 횡으로 절단하니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고밀도로 응축된 마력을 간단히 박살내 버리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마력.
악신의 힘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작금의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폭력이었다.
만일 ‘하이 익스퍼트’의 경지에 다다르면 모를까.
내가 숨을 죽이고 틈을 노리고 있는 사이, 소녀는 더욱 짙은 분노를 담아 읊조렸다.
“어리석어, 어리석어, 어리석어… 내가 말했잖아, 구원 따위는 없다고!”
비명과 함께 허공에 떠오른 핏빛 태양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
그리고 태양을 중심으로 솟아나오는 핏빛의 촉수들, 그 숫자만 족히 수백에 이르는 살덩어리가 기괴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수상한 조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를 직감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조카사위!”
나는 레이놀드 씨의 부름에 발맞추어 바로 도약을 시도했다. 핏빛의 촉수들은 어느덧 무수한 실선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단단한 결정처럼 맺혀 있던 은빛의 오러가 풀어 헤쳐졌다.
안개처럼 펼쳐진 은빛의 경계가 곧바로 핏빛의 실낱들을 파고들었다. 툭, 툭, 하고 무수히 많은 실들이 제 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끊겨 나갔다.
그럼에도 한계였다.
모든 실을 처리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내 몸이 정상이었던 때조차 두 번에 걸친 오러 폭발을 거친 뒤에야 가까스로 걷어내지 않았던가.
한계를 직감한 내 입에서 경고가 터져 나왔다.
“레이놀드 씨, 조심… 컥!”
그러나 내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핏빛의 실뭉치가 내 옆구리를 강타했다.
허공을 유용하던 몸뚱어리에 이를 받아칠 여력이 남아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곧장 쿵, 하고 벽에 쳐박힌 뒤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일순 정신이 흔들릴 만큼 강렬한 충격이었다.
무척이나 아프다.
무심코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소녀가 내 몸에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전신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 덕에 실내의 상황을 면밀히 살필 수 있는 만큼 내 통각 또한 예민해져 있었다.
못해도 몇 배는 되는 통증이었다.
본래라면 정신을 잃었어야 하는데, 전투의 흥분으로 각성된 뇌는 쉽사리 의식을 잃지 않았다. 내가 난생 처음 느껴보는 통증을 감내해야 했던 이유였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손이 덜덜 떨렸다.
통증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이러한 단계는 지나 왔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레이놀드 씨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쾅, 쾅, 쾅!
연달아 폭음이 울려 퍼졌다. 핏빛의 실들이 사방으로 뻗치며 응집되고 있던 마력의 구체를 파고들더니, 이내 마법을 핏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폭발이 일어난 것은 그 직후였다.
레이놀드 씨가 이를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그 또한 땅을 구르며 어떻게든 폭발의 반경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으니까.
하지만 워낙 광범위한 폭발이었다. 누구든 그 여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외마디 신음과 함께 중년의 몸이 벽면에 부닥쳤다. 마침 나와 인접한 지점이라, 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재빨리 레이놀드 씨의 곁으로 합류했다.
촤르륵, 하고 어느덧 사위를 메운 핏빛의 실선들이 커튼처럼 양옆으로 펼쳐졌다.
그 중앙에는 칠흑의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핏빛의 태양을 조명 삼은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한 손은 앞으로, 나머지 한 손은 등 뒤로.
기묘한 교차를 이루는 두 팔과 살포시 엇갈린 두 발이 마치 무용의 준비 자세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녀가 다시금 눈을 뜬 순간, 핏빛의 태양이 다시금 진동을 개시했다.
웅웅거리는 떨림과 함께, 소녀는 금빛의 눈동자를 희번뜩 뜨며 읊조렸다.
“얼마나 더 절망해야 알겠어……? 얼마나 더 무너져야 알겠어?!”
레이놀드 씨는 끄응, 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등허리를 두드렸다.
대마법사도 세월을 속일 수는 없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장의 뇌신이 그래도 됩니까?”
“뇌신은 얼어죽을… 허세 넘치는 별명 하나 있어야 지명의뢰가 잘 들어오니 그런 거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농담을 따먹기는 했으나, 우리 둘의 이마는 이미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상대가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실감하고 있던 탓이었다.
소녀의 읊조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정 바란다면, 좋아… 어리석은 자들아!”
그 부르짖음이 마치 기나긴 노랫소리 같았다.
높디 높은 곡조에 맞추어 핏빛의 태양이 더욱 커다란 공명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이내 화살처럼 뿜어져 내리는 핏빛의 실낱들.
그것은 새까맣게 탄 괴물들의 정수리를 노리고 있었다. 핏빛 실낱에 관통당한 얼굴 없는 괴물들이 좁아터진 실눈을 찢어져라 뜨며 섬뜩한 흉광을 토해냈다.
크어억, 케엑, 크억!
괴로워하듯이, 제 목을 감싸쥔 얼굴 없는 괴물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흉측한 비명 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온다.
키에에에에에에엑!
그리고 잦아들기 시작한 비명 소리는, 점차 경쾌한 운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아아악! 크엑! 크어어억!
둥, 둥. 흥겨운 북소리에 맞추어 울부짖는 소리가 연출하는 끔찍한 무도곡.
소녀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고개까지 까닥이는 폼이, 이 흉측한 곡조가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를 본 레이놀드 씨의 감상은 담백했다.
“혹시나 해서 묻네만… 혹시 여동생한테 정신적 문제가 있지 않았나?”
“저 여자는 제 여동생이 아닙니다. 아니, 여동생이 맞긴 한데…….”
하아, 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할 틈은 없었다.
“아무튼 암흑교단의 핵심 간부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엘시와 나머지의 안전은?”
그 물음에 내 눈이 자연스레 소녀의 후방을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손과 발이 묶인 채 매달려 있는 세 명의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셀린이나 리아는 건드리지 않아야 할 이유를 직접 들은 뒤였고, ‘계약’에 의해 엘시 선배도 일단은 안전한 상태이리라.
“보장되어 있습니다.”
“좋아, 그럼…….”
큰 걱정거리를 던 레이놀드 씨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파직, 거리며 그의 눈동자 주위로 일순 전하가 튀었다.
다시 봐도 놀라운 경지였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마력을 치환하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듯, 이 또한 마땅한 이치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것만 같았다.
정작 레이놀드 씨는 내가 감탄을 하든 말든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직 주위의 상황을 살피며,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받을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군.”
“방법이 있겠습니까?”
“시간만 주어진다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법사는 검사보다도 시간에 예민한 존재였다. 오랜 영창을 거칠수록 정교한 술식을 사용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최대의 화력을 투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레이놀드 씨는 영창할 틈을 벌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도 바보는 아니었다. ‘대마법사’의 호칭까지 받은 인물의 전력을 맞상대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을 터였다.
소녀의 견제를 이겨낼 만한 실력이 우리 일행에게는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실력이 너무 부족했다.
지금도 통증의 잔흔으로 팔이 덜덜 떨리고 있는 판이었다. 몸이 정상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당장 내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이따금씩 견제를 가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두터운 손이 내 등을 탁탁 두드렸다.
“아직 수는 남아있네… 우선은 내가 시간을 끌지.”
“네?”
통상적인 전략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