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7화 〉 6. 존재 증명(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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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가 시간을 끌면 몰라도, 마법사가 시간을 끌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검사가 짧은 시간 동안 해낼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놀드 씨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그러는 사이 자네가 이목을 끌 만한 짓을 한 번 해보게. 그럼 아무리 나를 신경 쓰고 싶어도 한 눈을 팔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어떻게…….”
“자네를 믿고 있네. 약혼자 정도는 구할 수 있는 남자라고.”
단순히 떠넘기기에 불과한 말이 아닌가.
나는 당황해서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소녀의 입이 열렸다.
“아아, 언제 들어도 감미롭고 즐거운 음악이야… 어리석은 자들의 비명이란, 어찌나 이리 달콤한지.”
촤르륵, 하고 그 희열에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핏빛의 커튼이 다시 닫혔다.
마구잡이로 떨리는 핏빛의 태양을 따라 실낱들이 명멸한다.
그리고 한계까지 달아오른 핏빛의 실들은, 곧장 비명을 내지르는 얼굴 없는 괴물들을 향했다.
수백 개의 실들이 살점을 관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불쾌한 소리에 내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몇 배는 더욱 커진 성량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온몸이 붉게 물든 괴물들이 실낱을 뚫고 뛰쳐나오고 있었다.
레이놀드 씨가 내 등을 짝, 하고 한 번 내리친 것은 그때였다.
“그럼, 시작!”
직후, 뇌전의 폭풍이 다시금 지상을 달구었다.
쾅, 쾅, 쾅!
폭음이 터져 나왔으나 붉게 물든 괴물들은 호락호락 당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전격의 포화를 맞으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으며 우리에게 달려들기까지 할 정도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횡으로 그었다.
은하수가 궤적을 남기며 쏟아져 내린다.
은빛의 오러에 닿은 괴물들의 혈색이 점차 옅어졌다. 선명한 붉은 빛을 띠던 괴물들이, 은빛의 안개를 통과하던 도중에 채도를 잃고 풀썩풀썩 쓰러져 내렸다.
어차피 망설일 틈은 없었다.
달음박질을 치는 내 다리가 본능처럼 소녀의 등 뒤를 향했다. 엘시 선배와 셀린, 그리고 내 여동생 리아가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그러자 핏빛의 채찍이 쾅, 하고 내 눈앞을 가르며 지반을 터트렸다.
금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맺힌 짙은 미소와 함께.
“어디를 가려고, 오빠?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과 실컷 놀아줘야지… 그 가짜한테 해주었던 것처럼!”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발악과 같이 내지른 고함이었다.
단두대처럼 두 줄기의 채찍이 번갈아 가며 땅을 두드렸다. 나는 그 핏빛의 강선에 당하지 않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굴러야 했다.
앞으로, 뒤로.
그마저도 안 되면 검으로.
쿵, 하는 둔중한 충격파와 함께 내 허파가 쪼그라들었다. 그 운동량을 온전히 이겨내지 못한 내 몸이 한 치 정도 땅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나마 결(?)을 써서 버틸 수 있었다.
만일 해(?)를 써서 채찍을 흩어버리려 들었다면, 나는 이미 전투 불능이 되어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터였다.
소녀가 나를 죽일 작정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진작에 한 줌의 핏물로 화했겠지.
내 몸부림을 보며 소녀는 흥겨운 콧노래를 불렀다.
“좋아, 좋아! 멋진 춤인데? 나도 그에 응해서……!”
팍, 하고 하늘로부터 수직의 선이 그어졌다.
그 금빛의 선을 목도한 소녀의 눈이 멍하니 하늘 위를 향했다. 그 실선이 노리고 있는 방향은, 명백히 소녀가 서 있는 자리.
황금빛 굉음이 터져 나왔다.
뇌전의 기둥이 소녀에게 직격으로 내리꽂혔다. 그 여파만으로도 근육이 저릿저릿 떨려올 지경이었다. 나는 그 폭음의 파도를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를 낚아챘다.
“조카사위! 어서!”
꽤나 힘에 겨운 음색이었다.
나는 레이놀드 씨가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다시 땅을 박찼다. 얼핏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위력의 마법이었으나, 그것이 벌어 준 틈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팍, 하고 점막을 찢듯 뇌전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안에는 화가 단단히 난 낯빛의 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뒤이어 높아지는 목청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 늙다리가, 진짜… 지금 해보자는……!”
그러던 금빛 눈동자가, 무심코 나를 쫓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목적을 이루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온힘을 다해 땅을 박차고 있었다.
그 끝은 명확했다. 숨길 생각조차 없었으니까.
인질들이 구속되어 있는 곳.
그리고 내 손에 들린 검신에서, 다시 은빛의 오러가 흩어지고 있었다.
소녀의 망막 위를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 생각해 봐라.
내가 어떻게 구속구를 풀었을까.
조각난 단서들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소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가, 이내 악물어졌다.
황금빛 눈동자가 맹화처럼 타오른다.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핏빛의 채찍이 날아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팍, 하고 뽑아든 손도끼가 곧장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구속구를 부쉈다.
리아였다. 파리한 안색의 리아를 보고, 나는 허겁지겁 안부를 물었다.
“리아, 리아… 많이 무서웠지? 이제 괜찮… 커헉!”
“오빠!”
캉, 하고 내 옆구리를 후려치는 핏빛의 채찍.
가까스로 손도끼로 막아냈으나, 가해지는 충격을 온전히 상쇄할 수는 없었다. 꽤나 진심이 담겼는지 그 여파만으로도 옆구리가 얼얼한 지경이었다.
몇 배로 민감해진 감각이 내 뇌리로 아찔한 통증을 전달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아냈다. 일부러 따스한 표정을 연출하면서, 내 손이 더듬더듬 리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물론 손도끼는 멈추지 않았다.
캉, 캉!
마치 대장장이가 망치를 내리치듯, 나는 손도끼를 힘 주어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리아를 감싸고 있는 구속구가 하나씩 벗거져 나갔다.
리아를 달래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괜찮아, 괜찮아. 리아… 내가 구해줄 테니까.”
그러자 으드득, 하고 악물어진 치아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계까지 분노를 억누른 소녀의 눈동자가 증오와 질투를 기름으로 활활 타고 있었다. 사실 내가 의도하던 대로였다.
눈을 뗄 수가 없겠지.
넌 그렇게 탄생했으니까.
그 점이 못내 안타까우면서도, 이를 어떻게든 이용해 먹는 내 꼴이 역겨웠다.
그만큼이나 난 내 동료들을 구하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비슷한 부류가 아닌가.
입가에 나 자신을 향한 조소가 흐릿하게 맺혔다. 여태껏 나는 다르다고 우쭐하고 있었지만, 위급한 상황이 오면 누구나 타협을 하기 마련이었다.
내가 만일 과거로 돌아간다면.
과연 혈정을 쓰지 말자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랬다가는 나는 반병신이 되었을 테고, 땅 위를 악신의 권속이 활보했을 텐데.
답은 알 수 없었다. 혹시 또 몰랐다.
소녀가 말한 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비겁하더라도 나는 현실과 타협하는 쪽을 택했다.
“감히, 감히… 어떻게! 내 앞에서!!”
한도를 넘은 분노는 오히려 행동을 지연시킨다.
그 틈에 나는 리아를 전부 풀어주고, 등을 한 차례 토닥였다.
“어서 피해, 리아. 널 죽이지는 않을 거야.”
“오, 오빠는?”
난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주르륵 밀려나갔다. 핏빛의 채찍뿐만이 아니었다. 피의 실낱들이 내 주위를 거미줄처럼 둘러싸며 포위를 좁히고 있었다.
“그깟 가짜한테!!!”
그러든 말든 나는 내달려 엘시 선배에게로 향했다. 한 손에 들린 검을 푹, 하고 지반에 박아 넣으면서.
핏빛의 실낱들이 내게 다가왔을 무렵이었다.
쾅, 하고 폭음과 함께 은빛의 오러가 핏빛의 실낱들을 찢으며 퍼져 나갔다.
벌써 한계였다. 마력을 바닥까지 쥐어짠 탓인지 혈도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리아가 다시금 핏빛의 채찍을 휘두르기 직전.
웅웅, 하고.
고요하던 대기가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조차도 무시하려던 소녀였으나, 이내 새파랗게 세상을 물들이는 고밀도의 마력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질풍의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 대마법사가 침묵을 지키며 서 있었다.
등 뒤로 떠오른 뇌전의 바퀴들이 전하를 토해내며 맹렬한 회전을 개시하고 있었다. 그 회전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대마법사를 중심으로 뿜어져 나오는 기파는 점점 더 강해져 갔다.
어느덧 그 주위에 멀쩡히 선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녀의 입에서 신음과 같은 경악성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휘리릭, 탁.
땀과 피, 흙먼지를 뒤집어 쓴 중년은 지친 낯빛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에 들린 칠흑의 막대를 던졌다 받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대마법사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떡하겠나?”
그 한 마디에 소녀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레이놀드 씨를 견제하면, 인질을 포기해야 한다. 그럴 경우 나와 레이놀드 씨의 선택지는 간단해진다.
도주하면 된다.
굳이 소녀를 맞상대해야 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인질을 지킨다면?
대마법사의 전력을 다한 마법을 감당해야 했다. 이는 아무리 소녀라도 부담이 되는 선택지였는지, 쉽사리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 틈에 엘시 선배를 마저 해방시켰다.
소녀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흐, 흐흐흐…….”
포기한 것일까.
소녀의 핏빛 채찍이 차륜처럼 회전했다. 그것이 노리는 쪽은, 대마법사.
나는 재빨리 셀린에게로 다가가 손도끼를 휘둘렀다.
캉, 캉!
구속구가 벗겨지는 와중에도 셀린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끙끙거리며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내 입에서 다급한 부탁이 새어 나왔다.
“일어나, 일어나. 셀린!”
쾅, 쾅!
채찍과 벼락이 맞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이놀드 씨도 호락호락 영창을 취소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겼다.
내가 그러한 확신을 가지려던 찰나.
“푸흐,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소녀의 광소가 울려 퍼졌고.
콱, 하고 막 해방해 두었던 셀린의 발길질이 내 명치를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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