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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58화 (458/649)

〈 458화 〉 6. 존재 증명(46)

* * *

난데없는 기습에 내 입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 나왔다.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나는 차마 신음을 토해내지 못했다.

한도를 초과한 통증이 근육을 섬찟 굳게끔 했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정신을 잃은 셀린의 몸이 삐걱거리며 행동을 개시했다. 팍, 팍, 연달아 내 복부를 걷어찬 다리가 이내 내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쿵, 하고 내 몸이 허공에서 뒤집혀 머리부터 떨어졌다.

정신이 아찔했다. 나는 일순 끊어진 의식 사이로, 셀린의 몸을 파고든 미세한 핏빛의 실을 확인했다.

“이런, 씹……!”

그나마 엘시 선배가 있어 다행이라고, 말하려던 찰나.

“말했잖아! 신 따위는 없다고!”

광증에 절절히 젖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윽, 아아아아악!”

엘시 선배가 난데없이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목에 매인 개 목걸이에서 파직거리며 전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마 손도끼를 목을 칠 수는 없어 줄만 분리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레이놀드 씨 또한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크억!”

핏물을 한 웅큼 토해내며, 레이놀드 씨가 무릎을 꿇었다.

그 눈동자가 어느덧 흐려져 있었다. 마력의 역류를 견디지 못한 듯했다.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나도 시야가 흐릿했다. 애초에 조종당하는 셀린의 근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화된 채였다.

제압당한 순간부터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마 끝을 소꿉친구의 허벅지 사이에서 맞이하게 될 줄이야.

허무하고 어이가 없었다.

허벅지가 내 목을 더욱 조여왔고, 나는 신음을 흘리며 버둥거렸다.

얻어맞은 충격으로 검과 손도끼는 이미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주, 주인… 아아아아아악!”

엘시 선배가 어떻게든 손을 뻗었지만, 전기 충격이 가해지는 와중에 영창 따위는 불가능했다.

이 밀실에서 두 발로 서 있는 존재는 오직 소녀뿐이었다.

신음하고, 널브러진 이들을 보며 소녀가 소리 높여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풉, 큭! 내가 말했잖아? 아무 소용도 없다고… 절망하게 해주겠다고!”

사뿐사뿐, 소녀가 걸음을 내딛었다.

나를 향해서는 아니었다. 무릎을 꿇고 쓰러진 레이놀드 씨를 향해서였다.

중년의 푸른 눈동자에서 타던 불길이 희미했다. 그 또한 타격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늙다리 주제에… 뭐라도 된 줄 알았어?! 고작 대마법사라 해서… 으응?”

그렇게 분노를 토해내던 소녀의 고개가 갑작스레 갸웃 기울었다.

내게서 등을 돌린 채라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몇 번을 더 소녀의 고개가 기울었을까.

소녀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 아하하하핫! 아하, 그랬구나! 그래, 그래… 우리 만난 적이 있었지?”

중년의 의아한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소녀는 이제 손뼉까지 치며 상반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뻔했다.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눈을 빛내고 있겠지.

요사스럽게도.

“몇 년 전인가? 성국에서 그랬을 거야. 내가 처음으로 받은 임무였거든.”

무슨 소리냐고, 레이놀드 씨는 그렇게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소녀는 즐거워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때 날 봤잖아! 아직 어린 시절이었는데!”

그러자 레이놀드 씨의 낯빛이 단번에 허망해졌다.

부릅떠진 두 눈이 소녀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기억을 일부러 애매하게 해놨으니까, 몰라 보더라도 어쩔 수 없네? 그런데 어쩌다 나를 찾게 되었을까… 당신, 도망쳤잖아? 연인도 동료도 전부 잃은 뒤에.”

두리번두리번.

그 까닭을 알아보겠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던 소녀의 시선이 어딘가에 꽂혔다.

그 끝에는, 주저앉은 채 신음하고 있는 리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항.”

소녀는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싱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는 붙임성 좋은 상인처럼.

“절 닮은 가짜를 보시고 기억이 되살아 나셨군요? 이처럼 귀한 고객이신 줄 알았다면, 진작에 좀 더 챙겨 드렸을 텐데…….”

“……네, 네가.”

핏물을 다시 한 웅큼 토해내며, 레이놀드 씨는 더듬거리는 의문을 토해냈다.

“네가, 그 소녀라고……?”

“맞아요, 맞습니다. 고객님… 제 첫 손님이 물어보시니 정직하게 답하는 수밖에!”

사뿐, 소녀는 제 다리를 교차하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다시 한 번 소개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탐욕’! 불행한 자들의 운명을 사는 잡상인이죠.”

“그럼, 내 동료들은…….”

“네, 제가 죽였냐고요?”

빙글, 하고 소녀의 몸이 춤을 추듯 그 자리에서 한 차례 회전했다.

“물론이죠! 아니, 따지고 보면 손님의 탓도 있답니다… 손님이 보다 강했다면, 그럴 일은 없었잖아요?”

쿡쿡, 하고 음산한 웃음 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원하셨기에, 힘을 선사해 드렸습니다… 진리의 끝을 열어젖힐 수 있는 물건을.”

소녀의 얼굴이 살짝 틀어졌다. 레이놀드 씨의 시선 또한 자연스레 그 끝을 따라갔다.

손에 쥔 칠흑의 막대기.

예전부터 범상치 않았다 느낀 물건이었다.

“소지자의 마력을 증폭시킬 뿐만 아니라, ‘경계’를 넘어 진리의 끄트머리를 강제로 유도하는 기능이 있는 지팡이죠. 심지어 부작용도 없이! 얼마나 귀한 물건일까요… 무엇을, 대가로 바쳐야 했을까요?”

기대가 돼서 미쳐 버리겠다는 듯, 소녀가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려왔다.

“……당신의 연인.”

공동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한순간에 거대한 공동 묘지가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죽였고, 전류에 고통스러워하던 엘시 선배조차 경악을 담은 시선을 보냈다.

레이놀드 씨는 멍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준 마지막 선물이에요. 물론, 그 외에도 사소한 대가가 있긴 했지만… 푸흐, 아하하하하하핫!”

배꼽을 감싸쥐고 웃으며, 소녀는 한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야말로 유쾌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손님, 특별히 살려 드리죠. 제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고객이시니… 앞으로는 가까스로 건진 목숨을 함부로 버리지 마시길. 그럼, 이만!”

유쾌한 인사와 함께 소녀의 한 팔이 번쩍 들렸다.

그리고 뒤돌아서, 우리를 향해 걸음걸이를 옮기기 시작하는 소녀.

점점 내 시야가 좁아지고 있었다.

호흡이 막힌다. 그러지 않아도 몽롱하던 정신이 흐려지고 있었다.

끝인가.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더 이상의 발버둥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과연, 그 말대로인가.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구원도 없다.

내가 일군 기적 또한 누군가의 피를 대가로 했을 뿐.

흐흐, 하고 자조 섞인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어떻게, 당신은 이길 수 있었지.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로, 어느 사내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외롭고 황량한 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길을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예전에는 그 등이 참 멀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느덧 나는 깨닫고 말았다.

사내의 어깨가 참으로 쓸쓸하구나.

차라리 전부 다 맡겨 버리면 되지 않을까.

나약하면서도 합리적인 판단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사내의 발을 붙잡고만 싶었다.

그래, 이대로 조금만 더.

바로 그때.

휘리릭, 탁.

들릴 리가 없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 왔다. 화들짝 놀란 내 시야가 단번에 맑아졌다.

세상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소녀가 발을 내딛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금빛 눈동자조차, 멍하니 등 뒤를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휘리릭, 탁.

칠흑의 막대가 허공 위를 돌다 떨어진다.

비틀거리며, 사내 하나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녀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간, 어리석기는… 기껏 살려준다고 했는데.”

휘리릭, 탁.

그러든 말든 사내는 기어이 두 발로 땅을 딛고 섰다.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흐릿해진 안광이 그 또한 한계에 달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쯧, 하고 혀를 차며 소녀가 다시 사내를 마주해 섰다.

“아직도 절망이 부족해?”

휘리릭, 탁.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직도 패배가 부족해?”

휘리릭, 탁.

소녀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두 팔 벌려 맞이했다.

“그렇다면, 기꺼이… 얼마든지 선사해 드리죠.”

핏빛의 채찍이 이글거리며 텅 빈 허공에 궤적을 그렸다.

불길과 같이 등장한 채찍의 기세는 여전했다. 밀집된 마력의 양만 하더라도 위압감이 일 지경이었다.

그 위력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사내는 아직도 걸음을 걷고 있었다.

비록 두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휘청이기는 했으나.

휘리릭, 탁.

푸른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그리고 사내가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은 직후.

대마법사가 되돌아왔다.

등 뒤에 떠오른 뇌전의 차륜들이 일제히 맹렬한 회전을 개시했다. 여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파지직, 거리는 전하가 마구잡이로 튀며 시각과 청각을 교란했다.

이를 두고도 소녀는 여유가 넘치는 표정이었다.

“아아, 그 분노에 가득 찬 눈동자… 절망으로 물들어, 꺾이면 얼마나 아름다운 보석이 될까.”

나는 넋을 놓고 레이놀드 씨를 바라보았다.

그가 움직이는 까닭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수를 써도 이곳에서는 승리를 노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하는 편이 더 낫지 않냐고.

나는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중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질문은, 내가 아닌 소녀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헐떡이면서, 중년이 토막 난 의문을 토해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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