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9화 〉 6. 존재 증명(47)
* * *
당장이라도 채찍을 휘두를 듯하던 소녀의 몸짓이 멎었다.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잔불만이 남은 눈동자가 소녀를 직시하고 했다.
“내가 도망쳤다고 했나?”
“물론이죠.”
소녀는 노래하듯 맑은 목소리로 답했다.
“가문으로 도망쳤잖아요? 복수도 잊고, 원한도 잊고… 그렇게 묻고 살았으면 편했을 것을.”
“……그랬군.”
중년의 푸른 눈동자가 흘깃 옆으로 샜다.
그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꽤 비겁했었군.”
탄식과도 같이 내뱉은 한 마디.
그것이 끝이었다. 다시금 차륜이 맹렬한 전하를 토해내기 시작했고, 소녀도 그에 발맞추어 핏빛의 채찍을 연장시켰다.
이어질 충돌의 결말은 뻔했다.
이미 레이놀드 씨는 한 차례 소녀와 격돌한 바 있었다. 그때도 당해내지 못했는데, 내장이 온통 진탕이 된 지금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를 깨달은 직후였다.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나는 어느덧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육체에 도대체 이만한 힘이 얼마나 남아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크엑, 켁… 레이, 레이놀드……! 레이놀드 씨!”
하지만 몸부림은 몸부림에 불과했다. 난데없이 발버둥을 친다고 해서, 느닷없이 뾰족한 수가 나타날 리는 없었다.
이미 두 남녀는 충돌 직전이었고, 나는 두 사람과 너무나 먼 거리에 있지 않은가. 하물며 옴짝달싹도 할 수 없다면야.
그때였다.
팍, 하고 셀린의 몸을 껴안은 누군가가 땅 위를 데구르르 굴렀다. 셀린의 몸이 발버둥을 쳤으나, 그 위에 올라탄 여인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리아였다.
리아가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리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어서, 가… 오빠!”
마치 새하얀 벼락이 척추를 관통하는 듯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땅바닥에 떨어진 검과 손도끼를 쫓았다. 내 애병들은 어느덧 저 멀리까지 굴러가 있었다.
이미 시한은 분초를 다투고 있는데!
이를 악물고 걸음을 내딛은 그때.
“주, 주인님……!”
으득, 으득.
이를 갈면서 엘시 선배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영창을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구속구를 풀고 나서, 영창에 들어가 봐야이미 늦었으니까.
그럼에도 엘시 선배는 내게 눈짓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충돌하려는 지점을, 계속해서.
내가 그 뜻을 깨달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급히 몸을 날린 내 손이 엘시 선배의 자그마한 체구를 들었다.
그러자 지지직, 하고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아찔한 통증.
“크으, 아아아아아악!”
수축하려는 근육을 애써 잠재우고.
나는 엘시 선배를 들어서, 저 머나먼 곳을 조준했다.
그곳에는 웃음을 터트리며 막 채찍을 휘두르려던 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 한 번, 저승에서 후회해 봐! 어리석은 선택을 한 자신을……!”
훅, 하고 전력을 다해 던진 엘시 선배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핏빛의 채찍이 세계를 가른 것은 그 직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녀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아마도 그 뜻은 이루어졌으리라.
엘시 선배가 없었다면 말이다.
느닷없이 눈앞에 출현한 엘시 선배를 두고, 나와 소녀의 시간이 일순 정지했다.
곁눈질로 보이는 광경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늘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자와, 땅을 딛고 선 자.
두 소녀의 낯빛이 명백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파르르 떨리는 미소를 지우지 않는 엘시 선배.
반면 부릅떠진 두 눈과, 악문 잇새 사이로 경악을 토해내는 소녀.
“무슨, 말도 안 되는…..!”
카가각, 마치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핏빛의 채찍이 멋대로 바스라졌다.
계약 때문이었다.
소녀는 오늘 하루, 엘시 선배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계약했다.
묶여 있는 동안 내가 얌전히 어리광을 받아주는 대가로.
하지만 나는 풀려났고, 이미 지불한 대가를 돌려받을 수단은 없었다.
지금껏 소녀가 거래한 상대들이 그랬듯이.
웅웅, 대기가 운다. 질풍이 환희에 젖어 내달리고 있었다.
그 사이 소녀는 어떻게든 몸을 굴려 엘시 선배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어차피 엘시 선배는 감전 탓에 옴짤달싹 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 피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판단을 한 듯했다.
옳은 판단이었다.
다만 엘시 선배가 시간을 벌어다 준 쪽은 레이놀드 씨뿐만이 아니었다.
헐레벌떡 내달린 내 손에 검과 손도끼가 하나씩 들렸다.
은빛의 궤적이 세계를 찢고 지나간다.
다급히 몸을 날리던 소녀의 손목을 팍, 하고 도끼날이 파고들었다.
이를 악문 소녀의 눈동자가 원망스레 나를 향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팍, 하고 연달아 내던져진 칼날이 소녀의 무릎 측면을 강타했다.
핏물이 뿜어져 나오며 소녀의 자세가 살짝 흔들렸다. 그래봐야 주어진 틈새는 고작해야 몇 초, 모두의 이목이 일순 하늘로 쏠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와장창, 하고.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천장이나 지붕 같은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허공이 말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흠집에 불과했지만, 이내 그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후두둑 파편을 떨어트렸다.
보인다.
저 너머에, 백색의 뇌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한한 공간에서 혀를 낼름거리는 전하가 인류의 상식을 정면에서 들이받는 듯했다.
어찌 일개 하나의 피조물이, 이러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소녀조차 할 말을 잃고 하늘을 쳐다보았을 정도였다.
들끓는 목소리가 악물어진 잇새를 타고 새어 나왔다.
“이래서는, 안 돼……!”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면서, 소녀는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어깨가 처음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어느 정도 타격이 누적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새파란 호선을 입에 깨물었다.
아직 한 수가 남아있다는 듯이.
휘리릭, 탁.
대마법사의 시선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그 푸른 불길을 마주하며, 소녀가 힘 빠진 웃음을 토해냈다.
“좋아, 좋아. 인정해 주지… 레이놀드 라이넬라, 당신은 날 놀라게 만들었어.”
“유언은 그게 끝인가?”
“아니.”
으득, 하고 이를 갈며 소녀가 손을 퉁겼다.
그러자 칠흑의 막대를 던지려던 손이 멈칫했다. 내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흐릿한 핏빛의 실이 그 팔에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셀린이 조종을 당할 때처럼.
“내가 말했잖아… 구원은 없다고! 신도 없어! 오직 절망뿐이야! 당신은, 그 절망의 끝에서 내게 운명을 팔아버린 거야!”
대마법사의 눈동자가 말없이 제 손을 향했다. 더는 뇌의 지시를 듣지 않는 그 손은, 마치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아무런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소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흐, 아하하하하! 이제, 이제야 증명했구나… 아무도 당신을 구해 주지 않아.”
팍, 하고 제 가슴을 두드리며 강변이 이어졌다.
“오직 스스로만이! 신을 버린 인간만이 자기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거야! 애초에 감정 따위에 취해서, 살려 주겠다는 내 자비를 거부했을 때……!”
휘리릭, 탁.
소녀의 말문이 단숨에 막혔다. 멍청한 눈빛이, 하늘 위를 유영하다 떨어지는 칠흑의 막대를 향했다.
“……그렇군.”
소녀의 시선이 서서히 대마법사의 손을 향했고, 나 또한 그 시선을 따라가고 나서야 겨우 눈치 챌 수 있었다.
지직, 거리는 전하가 오른팔을 감싸고 있었다.
감전을 유도해 근육을 굳혀버린 것이다. 꼼짝도 할 수 없도록.
핏빛의 실이 애를 쓰며 그 팔을 당기려 들어도, 대마법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로지 남은 손으로 칠흑의 막대를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을 뿐.
이윽고 하늘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 건… 계약 위반이야!”
소녀는 비명을 내지르며, 핏발이 선 눈으로 외쳤다.
“당장 계약을 이행해, 레이놀드 라이넬라! 네 운명은 내 것이야! 편법으로 계약을 위반하려 들면, 너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심장이 터져서……!”
“마침 좋은 기회인 듯하니, 우리 라이넬라 가문의 가훈을 알려주지. 사돈 아가씨.”
울컥, 하고 핏물을 토해내며 대마법사는 미소 지었다.
이와 동시에 휘리릭, 하고 내던져진 칠흑의 막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의 균열이 이미 지상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순백의 뇌전이 더는 참기 힘들다는 듯 파직거리며 제 존재를 과시했다.
소녀의 금빛 눈동자에, 처음으로 공포가 차올랐다.
이를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그것은, 번개로 이루어진 고래였다.
아무리 목을 빼고 한없이 올려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끝을 감히 가늠해 보려는 시도조차 불경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뇌전의 거인이 경계를 타넘는다.
쿵, 하고 찢겨진 하늘의 틈새로 빛과 열의 정수가 손을 뻗고 있었다.
“라이넬라의 운명은…….”
그제야 소녀는 다급히 제 몸을 핏빛의 실로 감쌌다. 하지만 그마저도 안전을 담보하지는 못하리라.
황금빛 눈동자에 맺힌 선명한 두려움, 그리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이 이를 증언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계가 뇌전의 바다에 잠기기 직전.
“말도 안 돼……!”
불신을 가득 담은 소녀의 비명이 새어 나왔고.
“……라이넬라가 정한다.”
찢어진 하늘의 틈새.
모든 것을 뒤덮을 뇌신의 진노가, 지상에 강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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