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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60화 (460/649)

〈 460화 〉 6. 존재 증명(48)

* * *

새하얀 뇌전이 대지를 불태운다.

쏟아져 내리는 빛과 열의 폭우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단지 그 자리에 엎어져서, 감당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백열하는 세계는 한참 동안이나 빛을 잃지 않았다.

압도적인 폭력 앞에 인류가 분류한 사물의 속성 따위는 무의미했다. 도체와 부도체를 불문하고, 이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이 붉게 달아오르며 타올랐다.

어째서 나는 살아있는가.

진작 몸이 불타서 재가 되어야 정상이었다. 최소한 전류에 감전되어 기절해야 정상이었으나, 내 몸은 멀쩡했고 의식 또한 온전했다.

단지 폐부를 가득 채우는 탄 내음을 느꼈다.

삽시간에 높아진 온도가 피부를 태울 듯이 이글거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벼락의 해일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항아리에 담긴 물을 개미집에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스러지고 나서야 이 재앙이 끝나리라.

그렇게 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사위에 정적이 가라앉았다.

대기 중의 먼지조차 불타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공기에서 이처럼 낯선 냄새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 고개가 조심스레 들려졌다.

공동은 완전히 무너져 내린 뒤였다. 무지막지한 전압을 이겨내지 못한 돌덩어리들이 새까맣게 타서 흩어져 있었다. 그을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장소는 얼마 존재하지도 않았다.

나를 비롯한 동료들, 그리고 이 천재지변을 불러온 장본인인 대마법사의 주변뿐.

엉금엉금 기어,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잔류하고 있는 전하로 근육이 따끔거리며 수축했다. 한껏 달아오른 열기가 한참은 남아있을 마도 한데, 어떠한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돌 바닥을 걸을 만은 했다.

하늘의 균열이 닫히며 모든 힘이 자취를 감춘 것만 같았다.

그 틈새로부터 쏟아져 내리던 뇌전의 홍수가 말이다.

얼마쯤 넋을 놓고 있었을까.

털썩, 하고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눈이 급히 그 진원지를 향했고, 그곳에는 피를 울컥이며 토해내는 레이놀드 씨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내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레이놀드 씨!”

엘시 선배를 비롯한 나머지도 소녀의 마수에서 해방된 듯했다.

개 목걸이는 더는 전류를 흩뿌리지 않았고, 악몽을 꾸는 듯하던 셀린도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더불어 허공에 떠오른 핏빛 태양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승패는 명백했다.

대마법사가 승리했고, 소녀는 패배했다.

그러나 그 명료한 대비에도 나를 비롯한 모두는 웃지 못했다. 낯빛이 창백해진 레이놀드 씨의 모습이 누가 보아도 심각해 보였던 탓이었다.

나를 따라 엘시 선배가 헐레벌떡 레이놀드 씨의 주위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레이놀드 씨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전신에 검푸른 자국이 번져 있었다. 혈관이 모조리 터졌다는 뜻이었다.

살아 숨 쉬는 것이 기적이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속을 더듬었다. 내 기억에, 힐링 포션이 하나 남아있을 텐데.

“……소용 없네.”

“삼촌!”

비명은 엘시 선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감전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엉망인 몰골이었다. 심지어 소녀에게서 학대를 당하기도 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시 선배는 어떻게든 제 삼촌을 살려보고자 열심이었다.

품을 뒤적이고,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무어라도 도움이 될 물건을 찾고.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은 채, 마법사가 울먹임을 토해냈다.

“어, 어떻게든… 어떻게든 방법이!”

“심장이 터졌다.”

그 담백한 선언으로 충분했다.

나는 암담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고, 엘시 선배의 몸은 빳빳이 굳어 버렸다.

“이것이 ‘계약’을 어긴 대가겠지… 피조차 마력으로 강제로 순환시키고 있어. 하지만, 이조차도 몇 분 남지 않았구나.”

“사, 삼촌…….”

엘시 선배의 눈에 맺힌 물방울이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빗물은 그을음을 씻어내지 못했다. 처량한 빗소리를 흉내 낼 뿐.

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대마법사’라 불리는 인물이 남긴 자평이었다. 틀림 없는 사실이리라.

레이놀드 라이넬라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기적을 바라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한때 불꽃처럼 타던 레이놀드 씨의 안광이 사라져 있었다.

흐릿한 시야, 초점이 잡히지 않은 망막이 사내의 최후를 예고했다.

“엘시, 울지 말거라… 이것이 내가 정한 운명이다.”

“하, 하지만… 하지만 삼촌…….”

“넌 나보다 위대한 마법사가 될 테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레이놀드 씨는 칠흑의 막대를 제 가슴 위에 올려두었다.

그 이상은 힘이 없어 움직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엘시 선배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물기 가득한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대화는 필요 없었다. 나는 그저 눈짓으로 레이놀드 씨의 손을 가리켰다.

칠흑의 막대를 꼭 움켜쥔 그 손을.

엘시 선배는 내 뜻을 깨달았는지, 떨리는 두 손을 레이놀드 씨의 손 위로 포갰다.

“나는 겁이 많았고, 비겁했다. 이제야 깨닫는구나… 가문을 떠나, 사랑을 택했을 때만 해도 결코 꺾이지 않으리라 다짐했거늘.”

텅 빈 목소리가 재가 된 세상을 울린다.

“악신의 권속을 앞두었던 그날, 나는 비슷한 판단을 내렸다. 도망치고 싶었고, 또 도망치려 했지… 그리고 너도 그럴 줄만 알았다, 엘시.”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레이놀드 씨는 제 조카를 흐릿한 망막 위에 담았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웃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지.”

대마법사의 힘겨운 숨소리가 이어졌다. 엘시 선배가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상반신을 기울였으나, 그런다고 해서 마땅한 수가 나올 턱이 없었다.

“이 지팡이를 받거라.”

엘시 선배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꺾었다. 하지만 잇새로 새어 나오는 흐느낌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단지 그 자그마한 손으로, 힘 주어 칠흑의 막대를 쥐었을 뿐.

“한때 나는 두려워 이 지팡이를 쥘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져버리고, 그 기억이 아픈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기에 차라리 잊고 살아 보려고 했지… 하지만, 끝내는 내 손으로 돌아왔구나.”

그러면서 중년은 다소 편안해진 미소를 지었다.

슬슬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은 서서히 통각으로부터 멀어지는 제 자신을 발견한다.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미 몇 번은 본 적이 있던 광경이라, 나는 애써 눈을 감고 비통한 심정을 삼켰다.

“이제야 네게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겠구나… 아니, 사실은 오래 전부터 내게 하고 싶던 말이었지.”

대마법사의 손이 미끄러지듯 유품을 놓았다.

“네 인생을 살아라, 엘시… 라이넬라답게.”

“……네.”

칠흑의 막대를 꼭 움켜쥐며, 엘시 선배는 눈물과 함께 고개를 힘 주어 끄덕였다.

라이넬라 씨의 시선이 내게 닿은 것은 그때였다.

“……조카사위.”

“네, 처삼촌.”

달라진 내 호칭에 레이놀드 씨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맺혔다.

못 말리겠다는 낯빛이었다.

“엘시를 부탁해도 되겠나?”

“그건 부탁이 아닙니다.”

나는 흐릿해지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짜내며, 그렇게 답했다. 결의를 다진 내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러니, 마지막 부탁은 따로 하셔도 됩니다.”

핏물이 섞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주 야트막한 소리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 정도로도 구원을 받은 기분이었다.

레이놀드 씨가 보다 편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 욕심을 내보지…….”

숨을 가다듬으며, 대마법사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살다 보면, 언젠가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있을 걸세. 누구나 그렇지. 때로는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더 편한 길이 있는데 어째서 이 길을 고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오네… 허나.”

그로부터 유훈이 하나씩 내 가슴에 얹어진다.

“도망치지 말게.”

하나.

“비겁하게 굴지 말게.”

또 하나.

“하나, 둘씩… 그렇게 포기하다 보면, 더는 아무런 길도 고를 수 없게 되니까.”

나는 돌탑처럼 쌓인 소망을 심장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레이놀드 씨는 비로소 한 점의 미련조차 남기지 않은 평온한 표정이 되었다.

“잘 부탁하네.”

희미해지는 숨결.

엘시 선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리아는 내 등 뒤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고, 나는 조용히 대마법사의 최후를 시야에 새겼다.

“엘시를, 그리고 이 세상을……..”

그것이 마지막 호흡이었다.

대마법사의 영혼은 그렇게 해방되었다.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하는 법이었으므로.

우리의 묵도 속에서 위대한 마법사 하나가 제 인생을 완결 지었다.

*

슬픔에 잠겨 있을 여유는 많지 않았다.

나는 주섬주섬 무장을 챙긴 뒤, 못 박힌 듯 제자리에 앉아 있는 엘시 선배를 바라보았다. 평생 동경해 왔던 마법사이자, 제 혈육의 죽음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리아가 조심스레 내게 물어왔다.

“……괜찮겠어?”

“놔둬.”

하지만 나라고 해서 마땅한 대책을 가지고 있을 턱이 없었다.

엘시 선배의 아픔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오직 스스로 감내하고 받아들여, 극복해 내는 수밖에.

그렇게 내가 셀린을 깨우려 걸음을 내딛었을 때였다.

달그락, 하고 돌무더기 하나로부터 묘한 소음이 일어났다.

이상을 직감한 내 눈이 황급히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리고 그 직후.

쾅, 하고 폭음이 터져 나오며 사방에 돌덩이가 비산했다.

나는 멍하니 그 폭심을 쫓았다.

칠흑의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핏물에 젖은 금빛 눈동자에서는 살기를 넘어선 귀기마저 일렁이고 있었다. 으득으득, 갈릴 대로 갈린 이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마찰했다.

살아있단 말인가.

울컥, 하는 감정이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레이놀드 씨는 목숨까지 버렸다. 그렇게 해서 가까스로 따낸 승리였다. 하지만 악의 명줄은 어찌나 길고 질긴지, 소녀는 죽지 않고 또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물론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칠흑의 사제복은 곳곳이 찢겨 나가 엉망진창이었다. 피와 먼지로 얼룩진 피부와, 불타버린 오른발과 다리는 흉측하게도 근육과 혈관을 노출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재생 중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력이 바닥 나 오러를 쓸 수는 없었지만, 내게는 아직 비장의 수가 하나 남아있었다.

용혈 문자.

그것을 쓴다면, 유효타를 가할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잠깐!”

당장이라도 우리를 죽일 듯하던 소녀의 태도가 단숨에 누그러졌다.

내 시선이 의아함으로 물들었을 찰나.

소녀는 살짝 내 시선을 피하며,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항복이야…….”

실로 상상도 못했던 전개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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