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1화 〉 6. 존재 증명(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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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어려운 제안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첫 번째, 믿기 어려울 만큼 좋은 조건이라 당장 받아들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 상대도 바보가 아니므로 속임수가 숨어있을 위험이 크다는 점.
느닷없는 항복 선언에 일순 정신이 멍해졌던 나였으나, 이내 입술을 짓씹으며 다시 전열을 정비했다. 무엇보다 나와 소녀는 이미 강을 건넌 사이였다.
상대는 끔찍한 죄를 저지른 괴물이었다.
비록 태생이 악마는 아니겠으나, 가련한 일생이 소녀에게 악귀의 탈을 씌웠다. 그 죄에 일조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는 하나뿐이었다.
죽인다.
그렇게 해서, 소녀가 더 많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한다.
후일 소녀의 무덤에 가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바닥에 찧더라도 이 명제는 변하지 않으리라.
이러한 판단 속에 내가 다시금 긴장의 끈을 쥐었을 때였다.
“……괜찮겠어?”
항복의 표시로 든 두 손을 팔랑팔랑 흔들면서, 소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마치 의기소침했던 처음의 모습이 기만이라도 된다는 듯이.
“나랑 싸우면, 무조건 한둘은 죽어? 나는 오빠를 생각해서 한 제안이야.”
“널 어떻게 믿고 항복을 받아들이란 거지?”
나는 우선 침착을 가장한 목소리로 그렇게 반문했다.
내 눈이 힐끔힐끔 등 뒤를 살폈다. 엘시 선배는 아직 반응이 없었으나, 슬슬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려는 듯한 기미가 보였다.
가족이 살해 당한 직후였다.
엘시 선배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절로 내 표정이 다급해졌다.
그러든 말든, 소녀는 여전히 이죽거리는 태도였다.
“내가 언제 무조건 투항이라도 한댔어? 단지, 우리 둘이 보다 합리적인 합의점을 도출하자는 뜻이지.”
“그게 무슨…….”
“날 얌전히 풀어줘. 그럼,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나.”
나는 침음을 삼키며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내 눈이 날카롭게 소녀의 상태를 훑어보았다. 확실히 몸이 정상은 아닌 듯했는데, 저 말이 과연 허장성세에 불과한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단 협상을 요청했다는 점부터 소녀의 전력이 온전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랬다면 다짜고짜 우리를 습격하는 편이 옳았다. 대마법사를 잃은 우리로서는 소녀를 정면에서 상대하기 불가능했다.
고민이 되는 지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설령 우리 중 누군가 죽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저 괴물을 이곳에 매장할 수 있다면, 인류로서는 이득이 아닐까?
무려 칠죄성의 이름을 받은 소녀였다. 이대로 두면 차후에는 마스터에 준하는 힘을 얻어 되돌아올지도 몰랐다.
단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차마 떠올리지도 못했을 발상이었다. 그만큼이나 소녀의 실력이 내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갈팡질팡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야.”
사납게 달구어진 목소리가, 내 옆에서 새어 나왔다.
나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엘시 선배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채 서 있었다.
눈물 자국조차 아직 지우지 못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 처량한 겉모습과는 달리, 엘시 선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라앉은 살기를 품고 있었다.
팍, 하고 세상이 한 차례 점등했다 켜진다.
어느덧 뇌전으로 이루어진 무수한 구체가 하늘을 점령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엘시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 전에도 영창이 빠르기는 했지만, 이처럼 복수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는 아니었다. 의문을 품은 내 시선은 이내 엘시 선배의 굳게 쥔 주먹을 향했다.
칠흑의 막대가 유독 눈에 띄었다.
“너 미쳤냐? 왜 하필 지금 내 앞에 나타나서……!”
그러나 차마 그 분노가 모조리 토해지기도 전이었다.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린 소녀의 손이 한 차례 주위를 휩쓸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뇌전의 구체들이 하나둘씩 폭발하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새하얗게 물든 시야 속에서, 누군가 땅을 박차고 도약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내가 검극의 방향을 정하기도 전이었다.
팍, 하고 소녀의 발길질이 엘시 선배의 명치를 강타했다. 뒤늦게 내 검이 소녀를 노리고 쏘아졌으나, 그보다 먼저 소녀의 손이 엘시 선배의 목을 틀어쥐었다.
빛살을 그리던 내 검이 그 자리에 멎었다.
소녀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서 바둥거리는 엘시 선배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늙다리도 날 죽이지 못하는데… 네까짓 게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애완견?”
크윽, 켁, 켁.
엘시 선배는 발버둥을 치면서도, 눈동자에서 타는 불길을 잠재우지는 않았다. 그 모습조차 가소롭다는 듯 소녀는 조소를 머금었다.
“아직도 교육이 부족해? 그럼, 내가 뼈 마디마디에 새겨줄게… 누가 주인인지, 그리고 날 볼 때마다 오줌을 지리도록…….”
“그만.”
나지막한 제지였다.
슬슬 열기를 더해가던 소녀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어야 했다.
“받아들이지, 그 조건. 그러니까 당장… 엘시 선배를 놓고 꺼져.”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소녀를 이곳에서 끝장내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동료들의 목숨을 판돈으로 걸기에는 내 동료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녀는 살풋 미소를 머금으며 손에 힘을 풀었다.
풀썩, 하고 자그마한 체구가 땅에 떨어진다. 소녀가 그렇게 고혹적인 걸음걸이를 옮겼을 찰나였다.
“……후, 회.”
헐떡이면서, 엎어진 작은 마법사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불길이 타올랐다.
그럼에도 소녀는 흘깃 무감정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후, 회할 거야… 날 죽이지 않은 것. 우리와 마주친 것… 그리고 우리 삼촌의 유지를 내가 잇게 한 것.”
대답조차 돌아오지 않을 결의였다.
코웃음을 치며, 소녀는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진득한 목소리를 귀에 속삭였다.
“쓸 생각이었지? 그 ‘용혈 문자’…….”
나는 아무런 반응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기에 우리 둘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두고 다투는 사이였다.
싱긋, 소녀의 눈웃음이 지었다.
“황제 폐하와, 그 가신 라이넬라를 위해 만세! 내 멋진 계획을, 아주 멋지게 박살내 주셨어… 그리고 오빠?”
애정과 증오가 질척하게 뒤섞인 음색이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 다시 오빠를 가지러 올게. 난, ‘탐욕’이니까.”
그리고 한 눈을 찡긋, 하면서 소녀는 천진난만한 인사를 남겼다.
“그때까지 ‘가짜’와 가족놀이를 실컷 즐기시길! 그럼, 이만!”
훅, 하고 소녀의 신형이 흩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기척이 사라졌다.
추적을 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이미 약속까지 한 마당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손으로 낯가죽을 훑어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 이곳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상태인 리아에게 말했다.
“리아, 일단 이곳을 좀 수습하고 있어 줘. 엘시 선배와 셀린이 몸을 추스르면 근처의 도시로 가서 연락하고… 난 먼저 가볼게.”
“어디를 가려고?”
당연한 되물음이었다.
물론 나 또한 준비해 둔 대답이 있었다.
“반드시 구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
유렌은 성녀를 찾아갔다고 했다.
나는 성녀를 구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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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는 오늘만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의 탁자 위에는 은으로 된 십자가 목걸이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얼마 전, 고아원의 꼬마 하나가 찾아와 건네준 물건이었다.
이안이 전해 달라고 했댔지.
그러면서 성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싸운 후에 마음이 불편하긴 했나 보지? 하기야, 그러지 않을 리가 있나.
성녀의 미모는 유명하다 못해 신성시 될 정도였다. 손이라도 잡아보려 안달이 난 남자로도 산을 쌓을 수 있었다. 아무리 아닌 척을 해봐야, 성녀가 신경 쓰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 분명히 그럴 텐데.
어느덧 성녀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있었다. 못내 서운한 마음에 성녀는 몇 번이고 옷소매로 제 눈가를 찍어냈다.
“……진짜, 바보.”
좀 편 들어 주면 덧나나?
아무리 돌이켜 봐도 성녀의 판단이 옳았다. 이 문제는 함부로 접근할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내심으로는 사랑하는 사내의 편을 들어 주며 점수를 따고 싶었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이처럼 중대한 판단을 사적 감정에 따라 내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자 쪽이 한 번쯤 굽혀 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난, 난 지금껏 몇 번이나 고집을 들어줬는데!
심지어 성추행도 참아 오지 않았던가. 아니, 사실 그건 어느 정도 유도된 감이 있긴 하지만…….
하여튼, 울컥하는 감정에 성녀는 은빛 로자리오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마치 그것이 이안의 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론 이마저도 한순간에 불과했다.
결국 성녀는 맥없이 고꾸라지며 탁자 위에 볼을 문댔다.
“보고 싶다…….”
못 본 지 고작 며칠 됐다고.
스스로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올 만큼 소녀 같은 대응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은근슬쩍 추억을 담은 선물을 건네다니.
아무런 흑심 없이 한 짓이라면 사형이었다. 순수한 여심을 농락한 죄는 죽어도 쌌다.
그렇게 성녀가 은빛 로자리오를 보며 배시시 웃음을 터트릴 무렵.
“……누님?”
성녀는 화들짝 놀라 상반신을 추케 세웠다. 그리고 다급히 책상 위의 은빛 로자리오를 품속에 숨겼다.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표정을 가라앉히기를 몇 초.
그제야 성녀의 입에서 윤허의 말이 흘러 나왔다.
“들어 오세요.”
소리조차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낯익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옥빛 머리카락, 중성적인 외모를 지닌 쾌검의 달인.
유렌이었다. 고아원 시절부터 성녀의 심복으로 함께했으며, 부모가 없는 성녀에게 있어 유일한 가족이라 해도 좋을 존재였다.
반가운 낯을 하던 성녀의 표정이 이내 의아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렌, 왜 벌써 돌아왔어요? 그동안 연락도 없더니, 이안과 다른 사람들은 어쩌고…….”
“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유렌은 무척이나 진지한 낯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안이 위험해요.”
달이 중천에 뜬 밤.
짐승의 꼬리가 사내의 그림자로 나타날 듯하다가, 스러졌다.
사랑에 눈이 먼 여인을 홀로 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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