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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62화 (462/649)

〈 462화 〉 6. 존재 증명(50)

* * *

정신을 차리니, 성녀는 어딘지도 모를 곳에 서 있었다.

아직도 손이 덜덜 떨렸다. 명석한 두뇌와 냉철한 상황 판단 능력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사랑하는 사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뇌리를 가득 채운 순간, 성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탓에 자세한 사정을 캐물어 볼 여유조차 가지지 못했다.

어째서 남몰래 잠행을 해야만 하는지.

성국에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될 까닭이나, 하다못해 아카데미에 남은 동료들을 부르지 않는 사유도 듣지 못했다.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마다 유렌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며 말했다.

“누님, 급합니다. 일단은 절 믿고 따라오셔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낯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딱딱히 굳어 있었다. 마치 이 비밀스러운 내막의 이면이 밝혀지면 당장 이안이 죽기라도 한다는 듯.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웃기지 말라며 코웃음을 쳤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유렌이 아닌가. 고아 출신인 성녀에게 있어 유일한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더불어 성녀는 바짝바짝 타는 가슴을 진정시킬 길이 없었다.

이안이 죽는다니.

상상만 해도 손이 덜덜 떨렸다. 그가 없는 미래 따위는 단 한 번도 구상해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가정을 이루고 오손도손 살아가는 미래라면 모를까.

사랑은 때때로 가장 총명한 인간마저 바보로 만든다.

성녀도 그 태곳적의 저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목적지조차 알 수 없는 여정은 반나절이나 이어졌고, 이윽고 도달한 장소가 바로 이 자그마한 오두막이었다.

아무도 모를 산속에서도 외진 곳이었다.

이러한 오지에 오두막이 위치하고 있는 까닭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얼핏 드는 생각으로는, ‘은신처’로 마련된 장소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난데없이 왜 은신처에?

이러한 의문을 떠올린 성녀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을 무렵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유렌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성녀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잡념에 빠져 있을 틈은 없었다. 일단은 이안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머지는 그 후에 고민해 봐도 늦지 않았다.

성녀는 신중히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래서, 이곳은 이안과 무슨 관계죠?”

“말씀드렸다시피 샤일록 상회는 암흑교단의 끄나풀이었습니다.”

반나절 동안이나 이어진 동행이었다. 아무리 성녀가 이성을 잃었더라도 전후 사정을 파악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때 대략적으로 나온 이야기였다.

성녀가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침묵을 지키자, 유렌은 막힘없이 증언을 이어갔다.

“저희는 그 뒤를 쫓다가 그들의 은거지를 발견했죠. 그곳을 급습하다가 역으로 당해 버린 겁니다.”

“넌 어떻게 돌아왔고?”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신한 성녀의 어조가 한꺼풀 내려갔다.

어차피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굳이 공대를 유지해야 할 까닭이 없기는 했다.

그럼에도 유렌은 끝까지 경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의 위계관계를 고려해 보았을 때, 이러는 편이 올바른 처신이기는 했다.

유렌은 어디까지나 호위기사에 불과했다. 결코 성녀와 맞먹을 정도의 지위는 되지 못했다.

상관이 부하를 편하게 대하는 것과, 부하가 상사를 편하게 대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격차가 존재했다.

다만 유렌도 마냥 경직된 대응을 보이지만은 않았다.

“당연히, 그 전에 도망쳐 나왔죠… 제가 누굽니까?”

그 장난스러운 말에 성녀는 피식, 하고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하기야, 예전부터 그랬다.

유렌은 어린 시절부터 위험을 유독 잘 감지해 내곤 했다. 생존 본능을 타고 났다고 해야 할까, 성녀도 그 덕을 본 적이 꽤 많았다.

그래서 굳이 ‘호위기사’로 임명했는지도.

직함이야 얼마든지 따로 만들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감상을 품으며, 성녀는 서서히 고개를 내저었다.

못 말리겠다는 투였다.

“너라도 돌아와서 다행이네. 그래서, 이 오두막이 그 은신처라는 거야?”

“이안을 비롯한 동료들이 갇혀 있는 뇌옥 같은 곳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흐응, 묘한 소리를 내며 성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두막은 나름 멀쩡한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오랜 시간 방치되지 않고 꾸준한 관리를 받아왔다는 증거였다. 최소한 근래에 이곳을 방문한 자가 있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였다.

한층 신중해진 기색의 성녀를 앞두고, 유렌은 기다렸다는 듯 성녀의 의문점을 하나씩 해소해 주었다.

“암흑교단의 세력이 어디까지 미쳐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성국에 지원을 요청한 사실을 암흑교단 측이 알게 된다면?”

“인질이 위험해질 수도 있단 말이지?”

“동시에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었습니다. 인질이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는 미지의 영역이니까요.”

성녀는 설명을 들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보충설명이 필요한 지점도 있었으나, 지금 성녀는 무척 초조한 상태였다.

인질이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렌의 그 발언이 유독 가슴을 꾸욱, 하고 짓눌렀다. 성녀는 당장이라도 오두막에 들어서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가장 신뢰하는 측근에게 물었다.

“어때, 이곳은?”

의아하다는 시선이 성녀를 향했다. 그 눈빛을 마주하며, 여인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위험해 보여? 알다시피, 내가 이런 쪽에 유독 둔감해서.”

“네, 그랬죠… 그 대신 의심은 엄청 많았고.”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유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그제야 성녀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솔직히 성녀의 전투 능력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하는 법, 성녀가 지닌 막대한 신성력은 암흑교단과의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렇게 성녀가 오두막 안으로 한 걸음을 막 내딛었을 찰나.

딱, 하고.

새하얀 벼락이 쳤다.

어라, 하는 사이 목 뒤편에서 둔탁한 충격이 전해졌다. 초점이 풀린 연분홍색 눈동자가 등 뒤를 향했다.

일종의 본능이라 해도 좋았다.

어째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야 하는지, 그 범인을 찾기 위해 이동하던 시선이 멎은 곳은 하나였다.

요사스러운 녹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빛나고 있었다.

성녀의 사고가 일순 정지했다.

유렌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칼집조차 제거하지 못한 무구는 하나의 둔기가 되어 성녀의 후방을 가격했다.

그야말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쾌검.

‘시엔델의 벼락’이라 불리던 쾌검술의 달인다웠다.

다만 성녀로서는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냐고, 성녀는 간절하게 묻고 싶었지만.

“하여간, 둔하시다니까요.”

그 한숨 섞인 목소리가 마지막이었다.

성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성녀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악몽이라도 꾼 느낌이었다. 유렌이 뒤통수를 치다니, 비현실적인 가정에도 정도가 있었다.

성녀는 헛웃음을 삼키며 눈을 비비적댔다.

푹신한 곳에 누워 있던 덕인지 몸이 가뿐했다. 오랜만에 푹 휴식을 취한 육체에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이마저도 잠시.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피려던 성녀의 팔이 멈칫했다. 딸그락, 하고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성녀의 눈이 멍하니 제 손목을 향했다.

그곳에는 낯선 장신구가 하나 위치하고 있었다. 마치 팔찌처럼 성녀의 손목을 감싼 금속이었다. 이와 연결된 배배 꼬인 철사가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구속구였다. 그것도 꽤나 고급품.

그제야 성녀의 망막에 주위의 풍경이 맺히기 시작했다.

천장에 맺힌 조명으로부터 말간 빛이 쏟아져 내렸다. 푹신한 침대와 가지각색의 가구들, 그리고 말끔히 정리된 방이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했다.

문이나 벽으로 나뉘지도 않은 그 너머의 공간.

성녀가 구속구를 달고 활동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은 무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지하의 대공동은 스산한 분위기마저 연출했다.

무엇보다 성녀의 코끝을 언뜻 스치는 이 냄새.

혈향(血?)이었다. 이미 청소가 끝난 뒤였지만, 차마 그 흔적마저 모두 지우지는 못한 듯했다.

대량의 피가 흐른 곳이다.

결코 긍정적인 장소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를 깨달은 성녀의 솜털이 쭈뼛 섰다.

도대체 이곳은 어디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른한 인삿말이 성녀의 귓전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누님.”

성녀의 시선이 황급히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벽에 몸을 기댄 채, 품에 검집을 안고 있는 사내가 서 있었다.

아니, 사내라고 해야 할까.

옥빛 머리카락을 가진 검사의 외모가 묘하게 낯선 느낌을 주었다. 갸름한 턱선과 몸의 굴곡,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까지 마찬가지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성녀는 그 낯선 감각에 눈을 동그랗게 떠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보아 온 사이였다. 성별 따위는 명백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사스러운 녹빛 눈동자를 마주하니 오랜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성녀의 유일한 가족, 유렌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이곳에서 머무르셔야 합니다. 바깥은 너무 위험해서요…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풀어드리겠습니다.”

“무슨 헛소리야?”

그러나 성녀의 당황은 짧았다.

그보다 울컥하는 감정이 더 컸던 탓이었다. 난데없이 뒤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해, 어딘지로 모를 장소에 감금 당한다면 누구라도 그럴 터였다.

“바깥이 너무 위험하다고? 그걸 왜 네가 정하지? 또, 이안이 위험하다고 했던 건……!”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흐, 하고 유렌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은 암흑교단의 습격에 패배했습니다. 빈사 상태로 어딘가로 끌려간 것도 맞아요. 어디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럼 넌?”

악물어진 잇새로 흘러나온 반문이었다.

유렌의 시선이 멀뚱히 성녀를 향했다. 그럼에도 성녀는 차오르는 분노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럼 넌 어떻게 돌아온 거야? 왜 구출을 하러 가지 않고…….”

“제가 습격했으니까요.”

뚝, 하고.

이어지던 성녀의 말문이 닫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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