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63화 (463/649)

〈 463화 〉 6. 존재 증명(51)

* * *

성녀의 멍청한 시선이 유렌을 향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조차 하지 못한 낯빛이었다.

그래서 유렌은 재차 제 말을 강조해야 했다.

“제가 찔렀습니다. 이안이 방심하고 있는 틈에, 등 뒤에서… 복부를 찔렸으니 치명상이었겠죠. 당연히 기절할 수밖에.”

“무, 무슨…….”

성녀의 목소리가 연분홍빛 동공과 함께 덜덜 떨렸다. 파문처럼 번진 경악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누님.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암흑교단 측에서 고위 인사가 파견됐는데, 그 나으리께서 워낙 이안을 마음에 들어하셔서…….”

“개소리 하지 마!”

드물게도 격한 반응이었다.

성녀는 오랜만에 거친 언사를 입에 담으며, 침대 위에서 몸부림을 쳤다. 그럴 때마다 구속구가 시끄러운 충돌음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발악처럼 여인이 부르짖었다.

“너, 미쳤어?! 이안을 찔렀다고? 그것도 암흑교단을 도와서? 호, 혹시 조종이라도 당한 거야……? 그럼 어서, 어서 이 손을 풀어… 내가 살펴 볼 테니까!”

“소용 없습니다.”

지나치게 나른한 음색이었다.

유렌의 한숨 섞인 단언은 달구어질 대로 달구어진 여인의 목소리와 명백한 격차를 보이고 있었다. 이를 악문 성녀의 눈동자에서 무수한 감정이 파도쳤다.

부정, 원망, 공포, 당혹, 그리고 절망.

그 아픔의 편린을 묵묵히 지켜보던 유렌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조종당한 적 없어요. 다만,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

“……신이 두렵지 않아?”

큭큭, 하고 유렌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하면 닮는다 했던가. 이안도 유렌이 떠나기 전 그따위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어리석은 소리.

유렌은 벽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요사스러운 녹빛 눈동자에 불을 당겼다. 저벅저벅 내딛는 걸음 소리가 사나웠다.

“천신이요? 풉큭, 하하하… 아아, 누님은 모르고 계셨겠죠.”

명백한 조소였다.

그것이 성녀를 향한 것인지, 제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을 뿐.

그래서 유렌의 미소는 한편 처량해 보이기도 했다.

“이 세상은 얼마나 역겹습니까? 신의 사랑을 실천해야 할 사제가 고아를 사육장의 가축쯤으로 여기죠. 이따금씩 먹이를 던져 주기도 하지만, 가축이 주인과 맞먹으려 들면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그래서 내가 나섰……!”

“그때 누님의 지지 기반을 닦아 준 이들이 바로 암흑교단 소속이었습니다.”

턱, 하고 성녀의 말문이 다시금 막혔다.

부릅떠진 두 눈이 성녀의 경악을 방증하고 있었다. 더듬거리며 무어라 성대를 짜내고는 있었으나, 나오는 목소리는 언어조차 되지 못한 토막 난 비명일 뿐.

유렌의 강변이 더욱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후후, 놀라셨습니까? 하지만 돌이켜 보면 당연한 이야기죠. 기껏해야 얼굴마담으로 쓰려 했던 고아를 편들어 주다니… 그에 합당한 대가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맺었습니다, ‘계약’을…….”

성녀의 입술이 열리려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가빠지는 숨소리가 여인이 받은 충격의 정도를 드러냈다.

모든 것을 부정 당하는 느낌이었다.

평생 꿈을 위해 달려왔다 여겼다. 시련과 어려움이 있긴 했으나, 어떻게든 천신을 의지해 돌파해 왔다고 생각했다. 또, 그만큼 제 능력이 뛰어나다며 우쭐해 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이미 성국의 심부까지 암흑교단이 파고들었다고요! 인류에게 승산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이안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 한풀 기세가 꺾여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는 눈동자.

그 모든 요소가 성녀의 내적 갈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닥 믿고 싶은 사내의 이름을 부르기를 주저하지는 않았다.

최후의 발악이라 해도 좋았다.

비록 벼랑 끝까지 몰린 정신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하더라도.

“이안이, 구하러 올 거야.”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성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유렌은 허탈한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성녀의 순애보는 놀라운 면이 있었다. 아무런 돌파구가 없는 상황에서조차, 이안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다니.

물론 이를 얌전히 두고 볼 유렌이 아니었다.

“이안, 이안… 대단한 친구이긴 하죠. 솔직히 저도 몇 번을 감탄했는지 모릅니다. 누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혹시, 이 친구라면… 진짜로 암흑교단을……?”

뒤이어 큭큭, 하고 조롱의 의도가 명백한 웃음소리. 이조차도 잠깐이었다.

이내 고막을 찢는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헛소리!”

이를 악물면서, 그렇게 외치는 유렌의 눈동자에 핏발이 서 있었다. 얼핏 광증마저 느껴지는 태세였다.

그가 이를 으득으득 갈며 재차 단언했다.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이안이라도 누님을 구할 수는 없어요! 애초에 이 은신처를 알 방도도 없을 뿐더러… 이안이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아십니까?!”

비웃음을 머금은 유렌의 손이 제 품속을 더듬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바닥 위로 핏빛의 보석이 떠올랐다.

성녀도 익히 알고 있던 물건이었다.

그 이름은 ‘혈정’, 무려 성 두 채에 달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귀물이었다.

되짚어 보니 의아하기는 했다.

그토록 귀한 물건인데, 어찌 이리도 끝없이 나타나는 것일까.

성녀의 눈빛이 절로 멍해졌다. 그러자 유렌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일순 씁쓸해졌다.

“……좋습니다, 신이 없다는 증거를 보여드리죠.”

콰직, 하고 혈정에 균열이 일었다.

유렌이 혈정을 쥔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실력 있는 기사의 악력은 돌을 부스러기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심지어 유렌의 근력은 악신의 힘으로 강화가 끝난 뒤였다.

혈정이 그 압박을 견뎌 내기는 힘들었다.

성녀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킬 뻔했다. 무려 죽은 자를 제외한 모든 병자를 치료할 수 있는 제물이었다.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을 성직자는 드물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성녀는 또 다른 의미로 넋이 나갔다.

‘아아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확산한다. 혈정의 균열 사이로 흘러나오는 반투명한 기체가 성녀의 망막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처량한 울부짖음이 이어질수록 연기는 점차 제 형상을 되찾아 갔다.

‘으아악, 끄아아악!’

‘살려, 살려 주세요……!’

성녀는 차마 그 참상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량한 울음소리가 하나둘씩 고막에 틀어 박혔다.

고아원의 아이들이었다.

착각할 리가 없었다. 애써 관심이 없는 척했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는 장소였다. 성녀는 일부러 고아원의 원아 명부를 입수해 홀로 읽어 보고는 했다.

제임스, 너무 흔한 이름이 불만이라던 꼬맹이였다. 그래서 나중에 기사가 되어 업적을 세우고 새로운 성을 받고 싶다 했던가.

남몰래 고아원에 목검 몇 자루를 지원하도록 지시를 내렸던 기억이 났다.

그 아이가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악귀의 손아귀에 잡혀가는 희생양이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을 터였다.

메리, 귀여운 아홉 살짜리 꼬맹이. 드물게도 사랑스러운 외모로 고아원의 사랑을 독차지한다고 들었다. 나중에 꽃집을 차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 꽃망울은 피지도 못하고 졌다. 원망 가득한 소녀의 절규가 성녀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성녀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여태까지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딱, 딱. 오들오들 떨리는 성녀의 턱 관절이 맞물리며 아픈 소리를 냈다. 성녀의 눈동자를 지배한 감정은, 경악을 한참이나 넘어선 공포.

이래서는 안 되는데.

여전히 악마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천신이 두렵냐고요?”

지독히도 담백한 반문이었다.

그럼에도 성녀는 제 머리를 감싸 쥔 채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저벅, 저벅.

악마가 다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누님은 두렵지 않습니까? 성국의 정치판에선 암흑교단 덕에 살아남았고,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고아의 영혼을 망설임 없이 희생했죠!”

“아니야!”

차라리 단말마에 가까운 절규였다.

성녀는 깊이, 깊이 제 고개를 파묻으며 토막 난 변명을 반복했다.

“나, 난 몰랐어… 지, 진짜야! 날 돕는 사람들이 암흑교단의 끄나풀인 줄 알았다면, 혈정이 그렇게 끔찍한 물건인 줄만 알았다면!”

“알았다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턱, 하고 성녀는 숨이 막혀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다.

어느덧 유렌은 성녀의 목전까지 다가와 있었다. 요사스러운 녹빛 눈동자가 불길한 광채를 뽐냈다.

“그럼 누님께서는 얼굴마담조차 되지 못해 쫓겨났을 테고, 이안은 진작에 죽어 묘비가 세워졌겠죠… 이게 바로 세상의 진실입니다.”

“아, 아니… 아니야…….”

울먹이며 내뱉어진 애원에도 유렌의 목청은 더욱 높아질 뿐이었다.

“이까짓 신!”

우악스러운 손길의 성녀의 목을 향했다. 이안이 선물해 준 은빛 로자리아를 거칠게 뜯어내며, 유렌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이까짓 신을 아직도 믿습니까?! 말로는 약자를 사랑한다면서, 우리를 실제로 사랑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냔 말입니다! 그 잘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우리를 구해 주지 않죠? 왜 아직도 누님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습니까?! 심지어 고아의 영혼을 바쳐 만든 끔찍한 물건마저 제물로 받고… 말해 보세요, 제발!”

이윽고 유렌의 두 손이 성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미친듯이 고개가 진자운동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성녀는 뇌리가 새하얘져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신이 존재하냐고? 그 까닭을 말해 달라고?

누구보다 그 해답을 알고 싶은 이가 바로 성녀였다.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성녀는 창백한 낯빛으로 웅얼웅얼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신은 대답이 없었다. 늘 그렇듯이.

이후에도 한참이나 추궁을 이어가던 유렌은, 끝내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누님도 증명하지 못하는군요.”

깡, 깡.

유렌의 손에 들려 있던 은빛의 로자리오가 땅바닥을 굴렀다. 그 날카로운 소음조차 무너진 성녀의 정신을 일깨우지는 못했다.

“신 따위는 허상입니다.”

신의 부재 속에서, 악마가 교활한 속삭임을 반복한다.

“그 존재를 누가 증명할 수 있죠? 누님조차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려먼서 악마는 품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그 안을 가득 채운 핏빛의 글귀가 기괴한 느낌마저 줄 정도였다.

'계약서'였다.

“……계약합시다.”

성녀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넋이 나갔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할지도 몰랐다.

유렌은 한숨을 내쉬며, 성녀의 손목을 강제로 꼬나쥐었다. 이러한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럼 세상을 드리겠습니다. 아주 잠깐, 꿈을 꾸신다고 생각하세요… 너무 겁낼 필요 없습니다. 몰랐을 뿐이지, 여태껏 우리의 도움을 잔뜩 받아왔잖아요?”

그럼에도 성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거절해야 하는데, 뿌리쳐야 하는데.

도무지 팔에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난생 처음 겪는 무력감이었다.

절망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면 몸조차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사실을 성녀는 오늘에야 깨우쳤다. 그러든 말든, 유렌은 성녀의 손을 강제로 계약서에 가져가고 있었다.

최후의 저항이라도 되는 양 여인의 손가락이 움찔, 떨려왔다. 하지만 유렌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포기하세요, 누님. 말했잖습니까… 이곳은 아무도 찾을 수 없어요.”

그렇게 성녀의 엄지가 계약서에 지장을 찍기 직전.

은빛의 벼락이 세계를 관통한다.

유렌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성녀는 물론이고 그조차 눈치 채지 못한 얼굴이었다. 다만 멈춘 시간 속에 정열적인 색조가 피어 올랐다.

핏빛.

툭, 데구르르.

유렌의 절단된 팔이 땅바닥 위를 구른다. 그때까지도 유렌은 몸을 굳힌 채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나지막한 음성이 정적 속을 파고들었다.

“……야.”

불가능하다.

이럴 리는 없었다. 일부러 반나절이나 떨어진 은신처를 골랐고, 이 위치를 아는 이는 유렌이 유일했다.

절대로 유출될 리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렌은 제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너무나 말도 안 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확신이 갔다.

바로 옆에서 그 사내의 행보를 지켜봐 왔으니까.

기어코 왔단 말인가?

그렇게 미소 띤 얼굴이 끼기긱, 하고 움직였고.

그 시선의 끝에서, 칠흑의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가 거친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내 신성력 주머니에서 손 떼.”

이안 페르쿠스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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