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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64화 (464/649)

〈 464화 〉 6. 존재 증명(52)

* * *

숨이 가쁘고 시야가 흐릿했다.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고작해야 응급처치만 받고 내달린 며칠이었다.

휴식조차 제대로 취하지 못했으니, 검을 든 팔이 덜덜 떨리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유렌이 성녀를 찾아갔다.

그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내 머릿속은 온통 성녀의 걱정으로 가득 차 버리고 말았다. 유렌은 암흑교단의 일원이었고, 연기에 능했으며, 무엇보다 성녀의 신뢰를 받고 있는 최측근이었다.

아무리 영리한 성녀라 하더라도 속아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암흑교단은 순진한 희생양을 조리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조직이었다.

성녀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욱 초조한 마음으로 며칠을 내리 질주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성녀의 위치를 내가 특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목적지조차 몰랐다면 발견은 보다 늦어졌을 터였다. 어떻게든 제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눈물을 머금은 연분홍빛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앞에 선 옥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중성적인 인물도 눈에 띄었다.

성녀와 유렌이었다.

뿌옇던 시야가 가라앉자, 나는 유렌의 인상이 다소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중성적이었다.

예전에도 여성적인 면이 남아있던 얼굴이었는데, 단 며칠 사이 남자인지조차 애매할 만큼 선이 얇아져 있었다. 심지어 몸의 굴곡 또한 더욱 여리여리했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내던졌던 손도끼를 회수했다.

탁, 하고 자석에 이끌리듯 도끼 자루가 내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나는 자연스레 손도끼를 다시 허리춤에 매달았다.

기습으로 팔 하나를 날리긴 했으나, 상대가 마인이라면 그다지 커다란 이점은 되지 못했다.

벌써부터 팔의 절단면으로부터 피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지 않은가.

마인 특유의 재생력이었다. 아마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유렌은 다시 온전히 두 팔을 지니게 되리라.

절단상을 입고도 유렌이 태연하기만 한 이유였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그에게 이죽였다.

“그새 성 정체성이 달라졌나, 유렌? 이젠 치마만 입히면 영락없이 계집애로 보이겠는걸.”

“난 널 만나기 전부터 이랬어, 이안. 그동안 숨기고 있었을 뿐이지… 그보다, 어떻게 찾아왔지?”

우리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 유렌의 잘린 오른팔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그리고 이내 자라나는 자그맣고 뭉툭한 손. 마치 거목의 그루터기에 묘목을 접붙인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든 말든, 유렌은 남은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가며 무심히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일부러 흔적을 지우면서 이동했고, 이 은신처의 위치를 아는 사람도 나뿐이야. 나름 꼭꼭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우리가 어떻게 샤일록 상회를 쫓았는지 잊었나?”

유렌으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더니, 곧 허탈한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국 첩보부의 추적 마법? 하지만 그걸 부여할 만한 기회가…….”

그렇게 이리저리 이동하던 유렌의 시선이 어느 지점에서 멈칫했다.

땅바닥 위를 구르고 있는 은색의 로자리오였다.

멍한 눈빛이 아직도 넋을 놓고 있는 성녀를 향하더니, 이내 유렌의 안면이 와락 구겨졌다.

“이 음습한 새끼, 여자한테 줄 선물에 위치 추적 마법을 걸어?!”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열심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아무 변명이나 주워섬겼다.

좀 더 쉴 시간이 필요했다. 마력이 전신을 순환하며 내 몸에 활력을 북돋았다.

“나 없는 사이 암흑교단이 습격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무슨 미친 소리를…….”

무어라 반박을 하려던 유렌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내 눈이 유심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양심이 있다면 트집을 잡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유렌이 시선을 살짝 피하자, 나는 마저 결정타를 가하기로 했다.

“그리고 선물 받은 장본인은 좋아할걸?”

“말이 되냐? 누가 행적을 일일이 감시 당하는 걸 좋아하…….”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리던 유렌의 표정이 그대로 딱딱히 굳었다.

어느덧 성녀의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미한 홍조를 띄운 채로,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그 눈동자가 어딘가 몽롱했다.

유렌의 표정이 더욱 참혹해졌다.

“……좋아, 이안.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아.”

“배신자가 혓바닥이 꽤 길어.”

나는 흐, 하고 얕은 웃음을 삼키며 검극을 유렌에게로 향했다.

유렌이 성녀를 건드릴 염려는 없으니, 인질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았다.

내 검신에 은빛 빛무리가 맺히기 시작하자, 유렌도 한숨을 내쉬며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낭창낭창 흔들리는 얇은 검이었다. 나도 몇 번 보지 못한 물건이었다.

평소 유렌은 진심을 내보이는 법이 없었다. 실력의 삼할을 숨겨야 한다는 원칙을 가장 잘 지키는 인물 중 하나였는데, 그 일환인지 유렌은 돌아가면서 몇 개의 무장을 쓰곤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저 검이었다.

“세검? 너, 외모뿐만 아니라 취향까지 변했구나.”

“어디 한 번 막아 보든가.”

그 직후였다.

새하얀 벼락이 내달렸고, 나는 오직 본능에 따라 검을 움직였다.

카각, 하고 검극이 칼날 위를 마찰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토록 정교한 찌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경악에 잠긴 내 눈이 정면을 훑었다.

그곳에는 진녹색의 안광이 도깨비불처럼 떠올라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였다. 유렌의 쾌검이 빠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속력은 궤를 달리했다.

제대로 반응조차 할 수 없다.

이러한 판단에 식은땀이 흘러나오기도 전이었다.

또 다시 빛살이 난사된다.

캉, 캉, 캉, 캉!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초를 초로 쪼갠 시간 속에서 몇 번인지도 모를 불꽃이 튀기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나는 황급히 검을 움직이며 막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여유가 있다면 오러를 모아 보겠지만, 유렌이 검을 내지르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결국 결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났다.

팍, 하고 옷가지를 찢으며 팔에 옅은 자상이 새겨졌다. 검을 피하려던 내 자세가 자연스레 무너졌고, 유렌은 이 틈에 끝장을 보려는 듯했다.

검을 놓친 내 손이 다시금 허리춤을 더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내 자세를 무너트리기 위해 유렌은 한 발자국을 내딛으면서까지 깊은 찌르기를 시도했다. 아무리 벼락 같은 쾌검술이더라도 곧장 검을 회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끼가 시차를 쪼개고 내리찍힌다.

칵, 하고 손도끼가 땅바닥에 틀어박히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유렌은 어느덧 뒷걸음질을 치며 유령처럼 물러난 뒤였다.

아슬아슬했지만, 유효타는 하나에 불과했다.

유렌의 검은 빠른 만큼 위력이 강하지 못했다. 기회를 노려 강대강으로 맞서면, 단숨에 내가 우위를 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상대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유렌이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까닭, 그것은 전적으로 그가 지닌 회색의 오러 덕일 터였다.

내 악물어진 잇새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본 유렌의 무심한 선고가 이어졌다.

“그 팔, 몇 분 후에는 움직이지도 않을 거다.”

“하는 짓이 아주 치사해지셨어, 성기사 양반? 외모만 여리여리해진 게 아니야.”

“다시 말하지만, 난 예전부터 이랬어.”

나지막한 고백이었다.

조명의 한계가 명확한 공간에서, 유렌의 진녹색 눈동자는 유독 요사스러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남과 여의 경계를 넘나드는 턱의 곡선이 지독히도 매력적이었다.

나는 헐떡이면서 유렌의 검이 스친 자리를 더듬거렸다.

감각이 없었다. 심지어 이 병변은 묵직한 감각과 함께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몇 분 후에는 움직이지 않게 될지도 몰랐다.

유렌이 노리는 바는 명확했다.

어차피 정면승부는 되지 않으니, 치고 빠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내 몸이 온전히 굳으면 끝이다.

내 심장은 꼬챙이에 꽂힌 고기처럼 관통당할 테지.

유렌의 몸이 우득, 거리며 변화를 일으킨 것은 그때였다.

“암흑교단과 ‘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하지. 그 시절의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어. 그저 누님을 지켜야겠다는 일념뿐이었지.”

“……뭘 바친 거야?”

“생식 기능.”

살랑, 하고 유렌의 등 뒤로 짐승의 꼬리가 출현했다.

그의 신체가 우득거리며 모습을 바꿔가고 있었다.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으나, 그의 턱선이 더욱 얇아졌고 골반은 넓어졌다. 중성을 넘어 여성적이라는 느낌마저 주는 체형이었다.

유렌은 흐,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야. 두 성별을 자유자재로 오고 갈 수 있지.”

“네 꼴이랑 비슷하네.”

어떻게든 유렌의 빈틈을 파고들기 위해, 나는 신중한 눈빛을 하며 말했다.

단기간에 승부를 보지 않으면 내게 승산은 없었다.

검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은은히 맺혀 있던 은빛의 오러가 들불처럼 치솟았다.

“어느 쪽에든 달라붙어 있다가, 내킬 때 배신을 저지르는… 그 못된 버릇까지 말이지!”

그리고 탁, 하고 땅을 박찬 내 몸이 대포처럼 쏘아졌다.

유렌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땅 위를 미끄러졌다. 간격을 재며 유효타를 노리는 모습이었다.

상관 없었다.

내게 시간이 주어진 이상, 무슨 짓을 해도 주도권을 잡는 쪽은 나였다.

해(?).

은빛의 안개가 은하수처럼 흩뿌려진다.

유렌의 미간이 일순 꿈틀거렸다. 몇 번은 본 적이 있겠지만, 그 대응 방법은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그 원리조차 밝히지 않았으니까.

망설임은 짧았다.

유렌의 손에서 검광이 폭사되었다. 눈 깜짝할 새 수십 개의 검의 궤적이 그려지며 은빛의 안개를 난타했다.

헛수고였다.

카각, 하고 은빛의 오러 사이를 미끄러지던 유렌의 검에 빛이 사라진다.

유렌의 낯빛에 처음으로 균열이 이는 순간이었다.

“무슨……!”

오러만 없다면 유렌의 검을 무서워 할 이유는 많지 않았다.

흩어졌던 안개가 다시금 수축을 시작했다. 어느덧 내 검신에는 은빛의 오러가 수정처럼 단단히 맺혀 있었다.

유렌은 급히 검을 내질러 대응에 나섰다.

캉!

하지만 전투의 양상은 이미 달라진 뒤였다. 결(?)로 인해 단단히 응집된 오러는 내 검에 담긴 위력을 배가시켰고, 이를 오러 없이 쳐내는 것은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그 증거로 내 검과 부딪힌 유렌의 검이 높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한 걸음.

캉, 캉!

유렌은 최대한 뒷걸음질을 치며 내 검격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에 맞추어 나 또한 전진을 멈추지 않았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유렌의 도주는 한계를 맞이했다.

텅!

전력을 다해 유렌의 검을 쳐내자, 이를 견디다 못한 손아귀가 찢어지며 피를 흩뿌렸다. 팔 한 쪽이 낫지 않은 유렌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렌의 검이 허공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내리그어진 내 검이 지반과 충돌하며 깡, 하는 날카로운 소음을 일으켰다. 유렌이 마지막 발이라는 듯 몸을 빙글 회전시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계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횡으로 그으려 들었다. 누구든 인간인 이상 다음의 일격을 피해 내기는 힘들었다.

그래, 인간이라면.

탁, 하고 검을 휘두르려던 내 팔을 보드라운 감촉이 휘감았다. 내 눈이 멍하니 아래를 향했다.

꼬리였다.

푹신한 털이 달린 여우의 꼬리가, 내 팔을 잡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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