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5화 〉 6. 존재 증명(53)
* * *
여우 마인이었나.
나는 급히 꼬리를 뿌리치고 다시금 검을 내지르고자 했다.
아주 짧은 빈틈에 불과했다. 아직 유렌을 잡을 기회는 남아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라, 하는 사이 유렌의 손에는 다시 검이 붙잡혀 있었다. 홀로 배속의 시간을 살아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내가 계산했을 때는, 검이 이토록 빨리 떨어질 리가 없는데.
내 당혹감이 어린 눈빛이 내 팔을 향했다. 어느새 회색 병변이 꽤나 번져 있었다.
팔이 홀로 느린 시간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야속할 만큼 느린 속도였다.
그 미묘한 시차가 나와 유렌의 운명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팍, 하고 빛살처럼 쏘아진 칼날이 내 남은 어깨를 관통했다. 내 자세가 무너지자 유렌의 발길질이 곧장 내 명치를 강타했다.
울컥, 하고 겨우 가라앉혔던 부상이 핏물과 함께 재발하는 감각.
나는 욕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내 몸이 느려지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회색의 병변이 더욱더 빠르게 번진다.
검과 검이 교차할 때마다, 내 몸은 석상처럼 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종래에 이르러서는 유렌이 혀를 찰 정도였다.
“……이안, 말했잖아.”
팍, 하고 유렌의 발이 내 복부를 걷어차도 별다른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 운동량을 이겨내지 못한 몸이 멋대로 비틀비틀 물러났을 뿐.
허억, 허억.
나는 식은땀이 시야를 가리고 흘러내렸다. 으득, 하고 이를 악물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내 검에 맞은 사물은 점차 느려지지.”
힘겨운 신음을 흘리며 내 두 손이 검을 가까스로 하늘 위로 올렸다. 하지만 그것이 내려쳐지기도 전에, 유렌의 검이 내 옆구리를 자르고 지나갔다.
주르륵, 핏물이 흘러내리고.
기어이 내 무릎이 움푹 꺾였다. 나는 내장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손으로 환부를 덮어야 했다.
“단 한 번이라도 예외는 없어. 이게 바로 악신이 주는 힘이야.”
유렌은 일부러 자세를 낮추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빛이 한없이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안, 아직도 신을 찾고 있나?”
“이, 개새끼…….”
“넓은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야. 여우도 개과니까.”
그 조소를 들으면서도 나는 신음을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품속을 더듬어 힐링 포션을 꺼내고 싶었다. 응급처치라도 마쳐야 유렌과 겨룰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를 유렌이 두고 볼 리가 만무했다.
그때, 낯익은 비명 소리가 내 귓전을 강타했다.
“……그만둬!”
덜덜 떨리는 음색, 나와 유렌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성녀가 흔들리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공황에 빠져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 이제 됐잖아… 이안은 죽이지 마. 어, 어차피 내가… 내가 목적 아니었어?!”
근거조차 없이 내뱉어지는 주장이었다.
성녀를 가두면서 나까지 제거할 수 있다면, 암흑교단으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나는 별다른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최대한 숨을 죽인 채 빈틈을 노릴 뿐이었다.
하지만 유렌은 의외로 성녀의 제안에 흥미를 보였다. 흐음, 하고 묘한 소리를 내던 그의 눈동자가 흘깃 나를 훑어보았다.
음모를 숨긴 짐승의 눈이었다.
“누님이 정 그러시다면야…….”
유렌은 한숨을 내쉬면서, 품속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이내 그의 손에 핏빛의 구슬이 딸려 나왔다.
그 정체를 깨달은 내 입에서 욕지거리가 흘러 나왔다.
“미, 친 새끼!”
“혈정입니다.”
유렌은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으며, 혈정을 성녀에게 내던졌다. 투척 방향이 무척 정확했던 터라 묶여 있던 성녀조차 이를 낚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혈정을 받아든 성녀의 표정이 멍해졌다.
“구속구가 신성력을 가두고 있지만, 혈정을 쓴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죠. 이안을 구하고 싶지 않습니까?”
“하, 하지만 이건…….”
“네, 고아들의 영혼을 짜내서 만든 물건입니다.”
유렌의 대답은 시원스러울 만큼 막힘이 없었다.
그 입가에 가증스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래도 뭐, 어떻습니까? 이미 몇 번이고 써왔던 제물 아닙니까. 이안을 구하는 대가로는 싸다고 생각하는데요.”
“성녀님, 헛소리는 듣지 마십……!”
“아니면 신에게 기도라도 올리시겠습니까?”
이죽이면서, 유렌은 그렇게 덧붙였다.
“아직도 천신이 두려워요? 그까짓 신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단 말입니다! 기도해도, 기도해도 돌아오는 대답 따위는 없죠. 그럴 바에야, 차라리 눈앞의 구원을 찾겠다는 게 잘못입니까?”
성녀는 제 손바닥 위에 올려진 혈정의 무게를 견뎌내기 힘들어 보였다.
덜덜 떨리는 손, 미친듯이 흔들리는 눈동자, 가쁜 호흡과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기까지.
누가 보아도 정서 불안에 달한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성녀가 무슨 선택을 내리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유렌이 방심한 틈을 타, 최후의 힘을 짜냈다.
검은 너무 느렸다.
길이가 짧은 무장일수록, 근거리에서 상대를 기습하기 용이했다.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적당한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굽혀졌던 무릎을 발작처럼 피며, 내 몸이 용수철처럼 솟구쳤다. 어느덧 내 손에는 손도끼가 자리하고 있었다.
설마 아직도 저항할 줄은 몰랐던 것일까.
유렌은 놀란 눈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검이 본능처럼 내 심장을 노리고 쏘아졌다.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내가 도중에 궤도를 틀기를 바란 견제였다.
물론 나는 그 의도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팍, 하고 핏물이 튀었다.
유렌의 연골 깊숙한 곳을 파고든 손도끼가 덜덜 떨렸다. 내 팔에 일던 경련이 전염된 탓이었다.
그리고 내 심장을 관통한 은빛의 검신.
내 악물어진 잇새로 피 거품이 새어 나왔고, 유렌의 표정이 통증과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이런, 미친……!”
“이안!”
찢어지는 성녀의 부르짖음을 마지막으로, 내 몸이 철푸덕 나자빠져졌다.
검이 빠져나간 흉부의 구멍에서 핏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동안 너무 무리한 탓인지, 의식이 명료하지 않았다.
흐릿하다. 흐릿하다.
성녀가 울부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며, 유렌은 황당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안, 너는 포기하는 법을 좀 배워야 해…….”
포기해야 한다고?
무엇을,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내 의식이 멀어지던 찰나.
“……포기하는 법을 좀 배우셔야겠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내 시야가 갑작스레 맑아졌다.
비탈길이었다.
어둑한 밤의 장막을 가르고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비틀길에 주저앉아, 옆에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을 재차 설득하고 있었다.
“지휘관이 전선에 남겠다는데, 병사들이 어떻게 마음을 놓고 후퇴하겠습니까? 수백, 수천의 민중보다 당신의 존재가 더 중요…….”
“제 마음이죠.”
삐죽 입술을 내밀면서, 여인은 삐진 티를 팍팍 내 보였다.
일종의 어리광이었다. 제 마음을 알아달라는 귀여운 신호였으나, 나는 이전과 달리 여인의 수작질에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럼 수만에서 수십만 명이 죽고 다치는 꼴을 눈 뜨고 보라고요? 난 그렇게 못해요.”
“우리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나는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버릴 줄도 알아야 해요. 우선 필요한 부분에 집중하고, 나머지 문제는 후일 고민해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 짧은 반문에 내 말문이 틀어막혔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내 속내를 파고들기라도 하겠다는 듯.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여인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저 너머의 평원이 보이나요?”
“……당연히 보이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주 전장인데.”
“저 평원을 가득 메운 ‘살점 둥지’는요?”
도저히 그 저의를 짐작하기 힘든 말이었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여인은 퍽 쓸쓸한 낯을 했다.
“몇 년 전의 일이었어요. 어느 고아원에 봉사를 하러 갔죠. 그곳에서는 고아들이 하나둘씩 실종되고 있더군요.”
“그래서요?”
“물론 고아들이 눈에 밟히긴 했어요. 하지만, 당시의 저는 아인델 총주교와의 정쟁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어요. 내가 주도권만 잡는다면, 이깟 고아 몇 명이 아니라 수천 명을 도울 수 있을 텐데…….”
여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죄인의 행색이었다.
“그 결과가 제 눈앞에 있네요. 실종된 고아들은 살점 씨앗이 되었고, 더 많은 고아들이 납치됐고… 정작 제가 구하고 싶었던 이들은 모조리 괴물이 되어 제 목을 노리고 있군요.”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럼요?”
내 위로에 답하는 여인의 눈동자는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를 조롱하거나 나무랄 의도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누구의 잘못이냐고?
나도 잘 몰랐다.
왜 세상이 이 꼴이 났는지, 무수히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도 전황을 좋아질 기미가 없는지.
그 답을 아는 자가 있다면 멱살을 흔들며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내가 침묵에 잠긴 사이, 여인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을 주워 담고 있었다.
“이안, 신을 원망한 적이 있나요?”
또 다시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이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뻔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라도 나와 비슷한 대답을 하지 않을까.
신을 원망하냐고?
하다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불쑥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목소리를 억지로 억눌러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성직자 앞에서 이처럼 불경한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던 말은 의외의 장소에서 흘러 나왔다.
“전 있어요.”
도무지 성직자가 할 소리는 아니라, 내 당혹감 어린 눈이 여인을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