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6화 〉 6. 존재 증명(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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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인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평온한 낯빛이 잔잔한 호수처럼 별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에, 나는 무심코 반문했다.
“……지금도 그렇습니까?”
“아니요.”
즉답이었다.
하지만 납득이 가는 대답은 아니었다.
가장 믿고 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여인이 아니었던가. 그날 이후 폐인처럼 살면서, 신을 원망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지.
그럼에도 내 의문이 언어로 화하는 일은 없었다.
여인의 시선이 서서히 내게 되돌아 오고 있었다. 속없이 맑은 눈웃음이 심장을 간질이며 지나갔다.
때로는 눈이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하곤 한다.
그 애정을 듬뿍 담은 눈빛에, 나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당신을 만났잖아요.”
밤이 속절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
유렌은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엎어진 사내의 몸뚱어리에서 핏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경지에 이른 무인이더라도, 저만한 출혈을 겪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을 터였다.
심지어 힐링 포션을 섭취할 틈도 없지 않은가.
설령 강철과 같은 의지로 다시 정신을 차리더라도 희망은 없었다. 유렌의 오러는 독과 같아서, 전신에 퍼진 이상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나마 성녀가 있다면 치료는 할 수 있을 텐데.
유렌의 날카로운 시선이 성녀를 향했다.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면서, 여인은 한창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푸, 풀어 줘… 당장 풀어! 이안, 이안……! 이대로 가면 진짜 죽는다고!!”
“마지막까지 멍청한 짓을 하는군요.”
한숨을 푹 내쉬며, 유렌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작은 희생일 뿐입니다. 고아 몇 명을 희생하면, 나중에 수도 없이 많은 고아를 도울 수 있어요. 왜 이 간단한 진리를 깨닫지 못할까요?”
“헛소리 하지 말고, 당장 풀으라고……!”
“누님도 어리석은 선택을 내리시겠습니까?”
그러자 화들짝 놀란 성녀의 눈이 멍하니 제 손바닥 위를 향했다.
혈정.
이 제물만 있다면, 이안을 살릴 수 있다. 느닷없이 암흑 속에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꿀꺽, 하고.
성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단 한 번, 단 한 번만 눈을 감으면 사랑하는 사내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여인이 존재하기는 할까?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오므려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단지 구슬을 손에 꼭 쥐고 기도를 올릴 뿐이다. 이를 과연 잘못된 행위라 부를 수 있을까.
성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미 지은 죄가 아닙니까.”
유렌의 달콤한 유혹이 성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최후의 자제심이 점차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름까지 버리고, 성녀로 살겠다 했지만… 정작 천신은 무슨 도움을 주었습니까? 누님 혼자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것이, 우리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만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나, 난…….”
“기도를 올리시죠, 누님.”
유렌은 언제나 그렇듯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안이 기다리고 있…….”
“……도, 망.”
정적.
고작해야 희미한 목소리에 불과했다. 폐부를 짜내고 짜내, 가까스로 내뱉은 음량이 그랬다.
성녀와 유렌의 눈이 서서히 그 진원지를 향했다.
꿈틀거리며, 피투성이의 육체가 경련한다.
“도망, 치지 않는다…….”
무어라 중얼거리며 땅을 딛고 서려는 만신창이의 몸.
황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짙은 안광을 흩뿌리며 떠올랐다. 귀기 어린 불꽃이 허공을 불태웠다.
유렌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럴 리가 없다. 유렌의 오러에 당한 자는, 서서히 느려지다 몸이 굳어 버린다.
움직일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래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저 사내는 몸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상식과 현실이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유렌은 한동안 눈을 부릅뜬 채 이안을 주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 겁하게…굴지 않는다…….”
“너, 무슨 소리를……!”
“누가, 후우… 나한테 해준 말.”
흐으, 하고 숨을 가다듬으며 사내가 기어코 땅 위를 딛고 섰다.
핏물로 젖은 황금빛 눈동자에 은은한 광채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진작 너한테 해줘야 했던 말.”
“……미친 새끼!”
때때로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을 본 인간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지금의 유렌이 그랬다.
발작하듯 검을 뽑아든 사내의 몸이 쇄도했다. 이안의 손이 품속을 더듬고 있었다.
힐링 포션을 꺼내려는 의도는 명백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으리라.
유렌은 쾌검술의 달인이었다. 손보다 먼저 이안의 심장을 꿰뚫을 자신이 있었다.
눈앞에 핏빛 문자가 새겨지지만 않았다면.
허공이 핏물을 흘린다. 주위의 마력이 열기를 띠며 그 상처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유렌이 눈을 부릅뜬 채 멈칫한 그 다음 순간.
쾅!
폭음과 함께 열기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유렌은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땅 위를 굴렀다. 꼬리의 털에 붙은 불길이 유렌을 더욱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이안, 이 새끼……!”
유렌은 급히 꼬리를 땅에 비벼 불을 껐다. 으득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절로 울려 퍼졌다.
마인의 눈동자에 핏발이 선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의 뒤로, 힐링 포션을 벌컥벌컥 들이킨 이안이 보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인질로 삼을까 싶기도 했지만, 이제야 알았다.
저 사내는 너무 위험했다.
살려두어서는 안 됐다.
비록 빈틈을 한 번 허용하기는 했지만, 아직 전황은 절대적으로 유렌에게 유리했다. 이안의 몸에 번진 회색 병변이 유렌을 승리로 이끌어 줄 테니까.
무려 악신과 계약해 받은 힘이었다.
유렌은 통상적인 마인이 아니었다. 암흑교단과 깊은 계약을 맺고 교류를 나누어, 암흑사제에 준하는 힘을 지닌 존재였다. 악신에게 받은 힘만 따지자면 유렌이 미트람보다 우위를 점할 정도였다.
단 한 번이라도 스치면 영원히 도태되는 회색의 오러.
유렌은 그 힘을 믿었다. 천신과 달리, 악신은 그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유렌의 몸이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전력을 다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상대는 이미 느려질 대로 느려진 뒤였다.
다소 느리더라도 정확하게.
유렌의 검이 힘을 담아 회색의 궤적을 그린 직후.
캉, 하고.
들릴 리가 없는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유렌은 멍하니 튕겨 나간 제 검을 바라보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유렌의 검은 무언가에 부딪혀 제 목적을 완수하지 못했다.
은빛의 오러가 불길처럼 타오른다.
유렌의 시야가 온통 은빛으로 물들 지경이었다. 이를 목격한 그의 본능이 곧바로 경종을 울렸다.
막아야 한다.
오러가 한껏 꽃망울을 움츠리고 있었다. 개화를 앞둔 오러의 빛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해진다.
바로 지금처럼.
비명을 내지르며, 유렌은 온 힘을 다해 검을 내질렀다.
“이안……!”
순식간에 수십 갈래나 되는 회색의 가지가 뻗어 나왔다.
이안의 몸이 온전했을 때조차 이만한 쾌검을 쳐내기는 힘들었다. 유렌의 이성은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유렌의 가슴은 이토록 초조한지.
캉, 하고 은빛의 꽃망울이 피어오른다.
은빛의 오러가 안개처럼 이안의 전신을 가리고 있었다. 수십 번에 이르는 찌르기조차 그 방벽을 뚫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검과 검이 마주친다.
불꽃이 흐드러지게 어우러진다.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릴 때마다 유렌의 눈에 어린 경악은 더욱 짙어졌다.
점점 더 빨라진다.
마치 이안이 딛고 선 세계만이 가속을 반복하는 듯했다.
유렌의 손이 닿지 못하는 한계, 그 너머까지.
찰나를 찰나로 쪼개는 공방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 사이에서, 유렌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시간이 너무나도 느렸다.
정체된 흐름 속에서, 유렌의 몸은 호수에 빠진 듯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 둔중한 세상 속에서 제 속도를 유지하는 이는 이안만이 유일했다.
점점 더 뒤쳐진다.
유렌은 그 사실에 숨이 막힐 듯한 공포를 느꼈다. 이대로라면 승패의 향방은 명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살아왔던 세월이 아닌가.
극한에 다다른 집중력이 얼핏 과거의 화상을 퍼올렸다.
성녀가 '성녀'가 되던 날, 유렌은 너무나 두려웠다. 정신적 지주인 누님과 달리 그는 칼 좀 쓰는 고아에 불과했으므로.
실력이 정체될수록 유렌의 공포는 더욱 극심해졌다.
도태된다. 버림받는다.
그리고 죽는다.
싫었다. 유렌은 누님의 옆에서 그녀가 만들어 갈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에게 암흑교단이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죽는다고.
모든 것을 바쳐 몸부림쳐 왔다.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유렌의 검이 이안의 품 깊숙한 곳을 찌르고 들어갔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며, 속도와 위력을 더한 필살의 일격.
그것이 패착이었다.
아무런 감촉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안의 몸이 빙글, 회전하고 있었다. 유렌의 검을 따라 춤을 추듯이.
유렌도 익히 알고 있는 기술이었다.
비전절기, 회절.
당했다.
유렌은 꼬리로나마 후방을 점한 이안을 견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손도끼가 유렌의 꼬리를 털가죽째 땅바닥에 박아 버렸다.
“끄아아아아악!”
비명이 끝나고, 유렌의 목 어림에 서늘한 감촉이 와 닿았다.
칼날이었다.
이안의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다량의 출혈 탓에 눈동자의 초점은 흐릿했고,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으며,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핏물에 젖지 않은 부위가 없었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그다.
유렌은 어이가 없다는 듯 흐, 하고 헛웃음을 머금었다. 이내 메마른 목소리가 그에게 던져졌다.
“……유언.”
단 두 음절, 그 의미는 명확했다.
유렌은 잠시 눈을 감고 고민에 잠겼다. 마지막에 이르러 남겨야 할 말이라.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뜬 유렌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매달렸을 무렵.
“성녀를 잘 부탁한단 말은 하지 마.”
어리둥절한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그럼에도 사내의 낯빛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건, 당연한 거니까.”
그러자 유렌은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지랄하고 있네, 바람둥이 새끼가…….”
그것이 마지막.
유렌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고,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핏물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린다.
핏빛의 호우 속, 이안은 눈을 감으며 조용히 손을 모았다.
“……임마누엘.”
한때 친구였던 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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