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7화 〉 6. 존재 증명(55)
* * *
배신자의 죽음은 놀랍도록 허무했다.
유렌의 피가 전신을 흠뻑 적시고 있음에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흐릿한 시야가 눈꺼풀을 따라 명멸을 반복했고, 어느덧 내 몸은 땅바닥 위를 구르고 있었다.
숨이 가쁘다.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어 버릴 것만 같았다.
피를 너무 잃은 탓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나는 짙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기다시피 나아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내 손에 들린 손도끼에 은빛의 광채가 깃들어 있었다.
그제야 확신했다.
내 오러가 더욱 강해졌다. 얼마 전부터 조짐을 보이더니, 기어코 개화(?花)가 끝났는지도 몰랐다.
홀로 별세계를 헤엄치다 온 감각이었다.
다시 눈을 뜨고, 유렌을 마주한 순간 내 세계가 감속을 개시했다. 종래에 이르러서는 비산하는 불꽃과 핏물마저 정지한 듯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오감.
살기와 직감이 저릿하도록 뇌를 울렸다. 시야에 가상의 궤적과 공간의 실낱들이 무수히 드러나며 제 자태를 무방비하게 노출했다.
아직 자세한 효능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유렌의 오러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개화 덕분이었다. ‘해(?)’를 통해서 회색의 병변을 제거해 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병변이 퍼져 나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몸이 느려진다는 것은 오러 또한 느려진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마지막에 오러가 개화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그렇게 나는 둥실둥실 떠오르는 잡념 속을 거닐었다. 문득 내가 엿보았던 기억 속의 여인이 떠올랐다.
강인한 인물이었다. 수없이 진창 속을 굴렀을 텐데도, 여전히 빛이 나고 꺾이지 않았던.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일지도.
기억을 되짚다 보니, 길은 어느덧 종착점.
덜덜 떨리는 손이 뺨을 더듬었다. 그제야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시야가 맑아졌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인의 낯이 눈에 들어왔다.
연분홍빛 색조가 아른거리며 번져 나간다. 은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눈은 촉촉하게 젖은 지 오래였다.
끅, 끅 하고.
울음을 애써 눌러 담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왜 그랬어요…….”
나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성녀를 바라보았다.
의식이 흐릿한 탓인가, 성녀의 물음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캉, 하고 불꽃과 함께 구속구가 끊어진다.
다행스럽게도 ‘해’의 묘리는 성녀를 가둔 사슬에도 유효했다.
일단 하나, 사지를 묶은 구속구는 이제 셋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든 말든 성녀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피에 젖은 내 뺨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푹 떨구어진 고개 아래로 몇 방울의 눈물이 보석처럼 떨어져 내렸다.
울대에 맺힌 울음기가 더욱 짙어진다.
“아프, 흐윽… 아프잖아요. 죽을 뻔했다고요…….”
캉, 하고 또 다시 불꽃이 튀긴다.
또 하나가 구속구가 풀리는 것을 확인한 뒤, 내 멍한 시선이 울먹이는 성녀를 향했다.
왜 그랬냐니.
대답이야 뻔했다. 아프고 힘들어도 성녀를 구하고 싶었으니까.
이걸 굳이 말로 옮겨야 하나?
아리송했다. 그래서 나는 일단 답변을 보류하기로 했다. 그보다 성녀를 해방하는 일 쪽이 더욱 시급하다는 판단도 있었다.
캉, 하고 사슬이 풀려나간다. 마지막 남은 구속구를 해제하면, 성녀는 자유였다.
“내가, 내가 조금 더 잘했다면… 흑, 흐윽… 차, 차라리… 내가, 내가 망설이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자책하는 성녀의 손아귀에 핏빛의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성녀가 왜 이리 내게 죄스러워 하는지 깨달았다.
성녀가 망설인 탓에 내가 빈사에 몰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더불어 가족 같은 존재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고통.
심지어 그 인물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까지.
무엇 하나 성녀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가, 흐윽… 너무 무능한 탓에…….”
“성녀님.”
캉, 하고 최후의 구속구를 해제하며,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 두 손이 조용히 성녀의 어깨 위에 얹어졌다. 흠칫, 몸을 떤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다시금 나를 향했다.
물기를 머금은 동공이 더욱 예쁜 빛깔을 띠었다. 마치 심혈을 기울여 세공한 보석 같았다.
“후회하지 마세요.”
“……네?”
나는 무슨 소리를 하는 줄도 모르고, 다만 심상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곧장 언어로 뱉어냈다.
“아프고 괴로워도 지켜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중에 혼자 자책하고, 슬퍼하지 마세요.”
회상 속에 등장했던 여인은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고, 수만이 죽어 나가는 전장 위에서 절망의 진창을 헤맸다.
나는 성녀의 가슴 속에 그러한 상처가 새겨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제가,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
“어째서죠?”
눈물에 함뿍 젖은 반문이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성녀와 눈을 마주쳐야 했다. 드물게도 성녀는 감정을 도무지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울고 있다. 절망과 배신감에 절여진 여인의 낯빛은, 처량하다는 표현조차 부족할 만큼 참혹했다.
“전, 전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니에요… 이름까지 버리고, ‘성녀’로 살아왔는데… 그 모든 게 가짜였다고요! 제가 이룬 것이라곤, 단 하나도……!”
“당신이니까.”
또 다시 논리와 사고를 거치지 않은 대답이 흘러 나왔다.
성녀의 낯빛이 다시금 멍해졌다.
“당신이니까, 믿습니다.”
그것이 끝이었다.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내 몸이 휘청이며 무너져 내렸다. 말갛던 정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점멸한다.
“이안… 이안?! 정신 차려요!”
이제 한계였다.
내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고, 내 의식 또한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
탁, 하고 불꽃이 튀듯 정신이 되돌아왔다.
나는 낯익은 평원 위에 서 있었다. 말라붙은 핏물과 무수한 시체로 뒤덮은 전장이었다.
얼마 전에도 이 풍광을 본 기억이 있었다.
내 눈이 멍하니 주위를 훑었다. 그야말로 시체의 바다였다. 이 넓은 땅에 어찌 생명의 기척 하나가 보이지 않을 수 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어느 사내가 걸어온 궤적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이 곧 그의 삶이 됐겠지.
그렇게 멍하니 주위를 부유하던 내 시선이 어딘가에 못 박힌 듯 틀어박혔다.
시체였다. 얼마 전에 보았을 때는, 그 얼굴조차 보이지 않던 사내.
아니, 여인이라고 해야 할까.
유렌이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엎어진 미려한 턱선의 여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유렌을 쓰러트릴 때도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사인은 아마도 관통상. 심장 부근에 나 있는 휑한 구멍이 죽음의 순간을 증명하고 있었다.
내가 멍하니 유렌의 시체를 보고 있는 사이, 등 뒤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제야 끝났군.”
내 시선이 자연스레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바위 위에 걸터앉은 사내 하나가 보이고 있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검집의 매듭을 정리하고 있었다. 출정을 앞둔 장수라도 된다는 듯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어. ‘탐욕’이 덫을 꽤 많이 파 놨더군.”
“알고 있었나?”
은은한 열기마저 느껴지는 반문이었다.
사내는 무슨 뜻이냐는 듯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그 무감정한 시선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유렌이 배신자라는 사실.”
“알고 있었지. 내가 죽였으니까.”
내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대답이었다.
내 사나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심드러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의 눈이 흘깃 내 앞의 사체를 향했다.
“유렌은 암흑교단과의 전쟁 초기에 성녀를 데리고 투항하려 했지. 그러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성녀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 찍혔고.”
“그래서?”
“마지막 전투 때, 성녀를 구하러 간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눈빛에는 쓸쓸한 기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다 타 버리고 남은 잿빛 같은 감정이었다.
“그래서 죽였어… 결국, 늦어 버렸지만.”
“한 마디라도 언질을 줄 수는 없었나?”
은은히 달구어진 내 목소리에, 사내는 무심한 대답을 던졌다.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애송아. 넌 바라는 게 너무 많아.”
“그랬다면 레이놀드 씨가 죽지 않았을 텐데… 아니, 희생된 고아의 수도 훨씬……!”
“혈정 없이 네가 버틸 수는 있었고?”
차디찬 반론이었다.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아서, 더욱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파는 반문.
무언가 욱, 하고 내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작 내 입에서 뱉어지는 말은 없었다.
반박할 수 없었으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사내의 공허한 시선이 텅 빈 허공을 향했다.
“또, 유렌의 배신은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야. 함부로 내가 밝히거나 티를 낼 수는 없었지…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의외로 위로를 겸한 충고가 이어졌다.
나는 그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서, 살짝 미간을 좁힌 채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얼굴은 늘 그렇듯 피로해 보이기만 했다.
“앞으로 수도 없이 겪어야 할 일이다. 잃어 버리고, 이별하고, 배신도 당하고… 무뎌져야만 해.”
“……어떻게?”
나의 의문은 지당했다.
지금도 손이 덜덜 떨렸다. 내 목숨이 고아의 희생 위에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유렌이 배신자였고 그 목을 내 손으로 직접 베었다는 현실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무뎌져야 한다고?
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복잡한 심경이 담긴 부르짖음이 내질러지기도 전이었다.
“충고 하나만 하지.”
조용히 사내의 몸이 지상에 섰다.
볼수록 그의 눈빛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마모와 풍화를 거친 황금빛 눈동자는, 그것이 담을 수 있는 광채가 없음에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떠한 길을 걸어가야 이처럼 피로한 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사내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집 부리지 마라. 때로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 돼. 그러지 않으면…….”
저벅, 저벅 걸어 사내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손이 얼핏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떠나갔다.
“아픈 꼴을 당할 거다. 무척이나.”
무슨 뜻이냐고, 채 되묻기도 전이었다.
나는 내 몸을 잡아당기는 인력을 느꼈다. 마치 병 안의 물이 되어 병목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내의 등은, 그래.
무척이나 아파 보였다.
이윽고 내 눈꺼풀이 강제로 밀어젖혀졌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귓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황망한 눈빛으로 주위를 훑었다.
낯선 침상이었다. 깨끗한 순백의 이불이 이곳이 위생적으로 관리는 장소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관심이 향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
성녀는 어디에 있지?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편지에 나온 내용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내 초조한 시선이 방 곳곳을 누볐으나 성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더욱 초조한 마음에 붕대로 칭칭 감긴 몸을 그대로 일으킬 뻔했다.
조용히 문이 열리지만 않았다면.
그 너머에, 놀란 듯 동그랗게 뜨인 연분홍빛 눈동자가 보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님.”
아직 내게 기회가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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