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8화 〉 6. 존재 증명(56)
* * *
“온몸이 엉망진창이에요.”
눈물의 해후를 나눈 뒤, 성녀는 내게 그렇게 단언했다.
나는 직전까지 성녀를 안고 있었던 손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했다.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느낌이었는데, 이 갈증을 채워 줄 탄력 있는 감촉이 부족했다.
하지만 죽다 살아난 이후였다.
아무리 내가 눈치가 없어도 분위기를 읽을 줄은 알았다. 아직도 옷소매로 눈가의 눈물을 찍어내는 성녀를 앞두고,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아니, 뭐. 그래도 살아났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괜찮다니요?”
내 태평한 대답에 성녀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화가 났다는 사실을 증명하겠다는 듯, 성녀는 짐직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코웃음을 쳤다.
흥, 하고 과장스레 얼굴을 돌리는 모습이 꽤나 사랑스러웠다.
나름 애교라고 부리는 걸지도.
자연스레 내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내가 당신 살리려고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요? 갑자기 쓰러져 버렸는데, 신성력을 퍼부어도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지… 그 근육덩어리 몸을 낑낑대며 산 아래까지 옮겼다고요!”
흐음, 하고 나는 침음을 삼키며 나를 낑낑거리며 옮기는 성녀를 상상했다.
그나마 무투술을 배워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였다. 단련된 검사의 육체는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어 더욱 무게가 나갔으니 말이다.
꽤나 고생했을 테지.
하지만 나는 어쩐지 안타깝기보다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빨개지면서 나를 질질 끌었을 성녀가 귀엽게 느껴진 탓일까.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간 혼이 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화두를 돌려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입니까? 어디 병실로 보이긴 하는데…….”
“성국에 임시로 얻어둔 거처에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성녀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유려한 목소리가 허공을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당신의 몸 상태가 워낙 심각해서, 성국의 지원을 얻어 적당한 장소를 구했어요. 이제 당신이 일어났으니, 슬슬 철수할 때가 되긴 했네요.”
“나머지 동료들은 어떻습니까?”
내 걱정스러운 음색에 성녀는 픽, 하고 얕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주변 신전의 지원을 받아, 암흑교단의 은신처를 정리했다고 들었으니까요. 아마 아카데미로 돌아가 이안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후우, 하고 나는 오늘만 두 번째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었다. 중상을 입은 사람은 없는 모양이라서.
레이놀드 씨의 시신도 엘시 선배가 잘 수습했으리라. 그 후에 습격이 있었다는 소식도 없으니, 리아나 셀린 또한 무사히 아카데미로 되돌아간 듯 싶었다.
그 셋만 두고 홀로 빠져나왔단 사실이 못내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나는 그렇게 미소를 되찾을 뻔하다가, 문득 성녀의 아련한 시선을 느꼈다.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는 성녀의 낯은 늘 그랬듯 아름다웠다. 가히 그 미모만으로도 온 대륙에 이름을 떨쳤을 여인이었다.
그러한 여인과 단 둘이 밀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호화스러운 독대였으나, 내 마음은 그다지 편하지 못했다.
성녀의 마음이 어떨까 싶어서.
잠시 머뭇거리긴 했으나, 결국 내 입에서는 조심스러운 안부 인사가 새어 나왔다.
“……성녀님께서는?”
“네?”
“성녀님께서는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모른 척 고개를 갸웃하던 성녀였으나, 재차 던져지는 질문을 무시할 도리는 없었다.
일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성녀의 어깨가 축 쳐졌다.
누가 봐도 마음이 상한 모습이었다.
“혹시 티 나나요?”
“살짝, 제가 아니면 못 알아차릴 정도로는.”
내 너스레에 성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족 같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
그것이 어떠한 기분일지, 나는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이제는, 괜찮아요. 아직도 밤에 악몽을 꾸긴 하지만…….”
“함께 자드릴까요?”
팍, 하고 성녀의 손바닥이 내 팔뚝을 후려쳤다.
아직 상처가 완치되지 않은 나는 가까스로 비명을 삼켜야 했다. 성녀는 슬쩍 나를 흘겨보면서도,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지는 못했다.
“못 말린다니깐, 진짜… 하여튼, 며칠 전보다는 괜찮아졌어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당신 몸부터 걱정해요, 이안.”
내가 여전히 걱정을 떨쳐내지 못하자, 성녀는 느닷없이 진지한 낯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견 따위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강경한 눈빛이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정을 취해요. 또 쓸데없는 정의감에 취해서 아무 곳이나 들쑤시지 말고.”
“아니, 쓸데없는 정의감이라니…….”
“약속해요.”
성녀는 전에 없이 엄격한 표정이었다.
어떻게든 내게서 약조를 받아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눈빛에서부터 느껴졌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정을 취하기.”
“그거야,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니까…….”
“약속.”
내가 어찌 성녀를 이길 수 있겠는가.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성녀는 꼭꼭 확인까지 마친 뒤에야 만족한 미소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내 입에서 절로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벌써 가시게요?”
“네,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또 이 거처를 오래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면서 성녀는 슬쩍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럼 나중에 봐요, 이안.”
그 뒷모습에 묘하게 미련이 넘쳐 보여서.
일순 내 미간이 좁아졌다. 그렇게 내가 떠나려던 성녀를 붙잡기 직전.
우뚝, 하고 성녀의 걸음걸이가 멎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성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침묵이 깨진 것은, 당황한 내가 무어라 말이라도 꺼내려던 찰나였다.
“……이안.”
가라앉은 목소리가 유독 묵직하다.
나는 더욱 영문을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성녀의 고백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부터, 아주 이기적인 짓을 할 거에요. 그리고 사실 성녀로서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내 의문은 채 끝맺어지지도 못했다.
다시 등을 돌려 내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긴 성녀가, 이내 내 멱살을 틀어쥐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차, 하는 사이.
두 남녀의 입술이 마주친다.
끈적한 애무나 질척한 타액 교환 따위는 없었다. 아주 짧은, 순수하면서도 담백한 입맞춤.
그래서 나는 더욱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이 순간만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누구에게나 시간을 평등한 법.
이윽고 성녀의 얼굴이 내게서 멀어졌다. 달콤한 숨결과 달아오른 볼, 그리고 애틋하게 나를 응시하는 연분홍색 눈동자까지.
내 세상이 일순 여인으로 가득 차 올랐다.
“나, 당신 좋아해요.”
여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깨끗한 미소를 지으며 제 마음을 털어놓았다.
“사랑해요, 이안.”
빼도박도 못할 만큼 확실히.
성녀는 내 대답조차 듣지 않았다. 그대로 뒤돌아 서, 급히 걸음을 재촉해 나를 떠나갔을 따름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아야 했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음날, 성녀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교황청 지하뇌옥에 투옥되었다.
인류를 배반한 죄목으로.
오직 목숨으로만 갚을 수 있는 죄였다.
**
흉흉한 소문으로 아카데미는 스산했다.
무려 성녀가 인류를 배신했다.
암흑교단을 토벌해 나가던 신진 영웅 중 하나의 몰락은 수많은 이야기를 낳았다.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대륙을 통틀어 성녀의 소문이 떠돌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당장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는 내 귓가에도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다만 내 옆에서 조잘거리는 여인이 좀 더 악질적인 면이 있다면, 일부러 내게 돌리도록 조롱을 일삼고 있는 점이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은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인.
알펜하우저 가문의 해와 달 중 하나, 시에네 알펜하우저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눈을 가릴 만큼 앞머리를 기른 루나 선배도 자리하고 있었다.
일란성 쌍둥이인 만큼 비슷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 태도만큼은 천양지차였다.
시에네 선배는 쉴새없이 조잘거리며 내 신경을 긁고 있었다. 반면 루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눈짓으로 시에네 선배를 만류하는 중이었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난 지금 손도끼를 꺼내들기 직전이었으니까.
“후후,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진작 성녀를 팔아치우라고! 그때는 아주 노기등등해서 손도끼를 꺼내들더니, 이게 무슨 꼴이람? 괜히 몸만 망가져서 돌아왔네요! 어차피 죽은 목숨일 텐데, 푸흐흐…….”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욱하는 마음에, 나는 그렇게 매서운 눈빛을 하며 말했다.
“재판은 시작되지도 않았어요. 무죄가 나올 가능성도…….”
“순진한 소리.”
그러면서 시에네 선배는 살풋 미소를 머금었다.
전에 본 적 없이 요염한 미소였다.
“아직도 모르겠나요? 재판은 요식행위에 불과해요. 암흑교단의 거처가 드러났는데, 그곳에는 끔찍한 범죄와 배신의 흔적이 가득했죠… 교황청을 향한 민중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어요. 아니, 이제 슬슬 이러한 의문을 가질 때도 됐죠. 신은 정녕 존재한단 말인가?”
마치 연극 배우처럼 과장된 자세를 취하며, 시에네 선배는 신이 나 설명을 이어갔다.
“이 흔들리는 믿음을 다시 붙잡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해요. 마침 최측근이나 다름없던 인물이 암흑교단에 가담했던 최고위직이…….”
“그게 성녀란 말입니까?”
“얼마나 자극적인가요?”
시에네 선배는 도리어 내게 반문했다. 나는 일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천신이 가장 사랑하는 처녀! 신이 빚은 미모로 유명한 성녀가, 다름 아닌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당한다니… 이보다 자극적인 소재는 많지 않아요, 리아 페르쿠스.”
“어, 언니… 그건 여동생 쪽…….”
“이게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루나 선배의 지적을 깔끔히 무시한 채, 시에네 선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갔다.
“길을 가다 넘어진 인간이 보이면 발로 차고 싶어지죠. 창공을 비상하던 매가 땅에 떨어졌을 때, 가장 잔인하게 굴 수 있는 종족이 바로 인간이에요. 모두가 추락과 몰락을 원하죠.”
“그까짓 저열한 욕망을 채우려고……!”
“그러면 안 되나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투였다.
나는 또 다시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이글거리며 타는 가슴의 불길을 풀어놓을 데가 없었다.
“비단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이 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요. 다만 인간은 지성이 있어 보다 잔인하고 악랄해질 수 있을 뿐이죠… 성녀는 그 요깃거리로 당첨된 거에요. 예로부터 고통받는 육체는 즐거움을 주거든요.”
“의외로 냉소주의자셨군요. 그렇게 인간이 싫으십니까?”
“오히려 반대에요. 무척이나 사랑하죠.”
싱긋, 눈웃음을 지으며 시에네 선배는 제 가슴에 손을 얹고 선언했다.
“나는 인간의 추악함을 사랑해요. 모든 상인이 그렇죠… 당신도 언젠가 이를 깨우치기 바라요, 로안 베리아스.”
“언니,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분은 이안 페르쿠스 경…….”
“방법은 없습니까?”
발작적인 질문이었다.
시에네 선배와 루나 선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내가 이처럼 직접적으로 조언을 구할 줄은 몰랐다는 태도였다.
사실 누구든 상관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성녀를 구하고 싶었다. 알펜하우저 쌍둥이가 없다면 길을 가던 누구든 붙잡고 이렇게 물었을 터였다.
성녀를 살릴 수는 없냐고.
“성녀를 구할 길이, 하나쯤은…….”
“왜 성직자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유독 예민할까요?”
조소인지, 고소인지 모를 미소를 머금은 채 시에네 선배는 말했다.
“실제로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약점을 들킨 고양이처럼 사납게 구는 거죠…그만큼이나 신앙이란 부숴지기 쉬운 것.”
상인의 달콤한 속삭임이 이어진다.
“당신이, 그 흠집 난 신앙을 되돌릴 만한 기적을 보여 줄 수 있을까요?”
키득거리며, 여인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시에네 선배는 여전히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 해보세요. 성녀의 재판에는 무려 교황과 성자가 참여한다더군요. 후후, 그래야 명분이 제대로 서겠죠. 자칫하면, 성녀의 몸이 지글거리며 구워지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 꺄아악! 그, 그 손도끼 안 치워요?!”
마지막까지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한 탓에, 기어코 내 손도끼를 목도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며칠 후.
“……미쳤어요?”
시에네 선배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고, 나는 그럴수록 더욱 뻔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성자를 쓰러트리겠습니다.”
벌써 재판은 다음날.
나는 알펜하우저의 힘을 빌려 보기로 했다.
얼마 전, 마수 시체 거래를 중개해 준 대가로.
시에네 선배가 탁, 하고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지난 며칠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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