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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70화 (470/649)

〈 470화 〉 6. 존재 증명(58)

* * *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어졌다.

“누나가 전해 주라고 했어, 도움이 될 거라고… 아직 자기는 쓸 자격이 없대.”

“무슨 도움?”

“몰라, 어차피 말려도 갈 거라고 하던데.”

나는 얼떨결에 레이놀드 씨의 유품을 받아들고 말았다.

남은 손으로는 술을 들이키면서, 내 눈은 하염없이 칠흑의 막대를 응시했다.

말린다고?

내가 무얼 할 줄 알고.

“우리 삼촌의 유품이랑, 유언… 잘 부탁해.”

한동안 나는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떠나간 자의 유품, 떠나간 자의 유훈.

무엇 하나 무겁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숨이 막힐 만큼.

**

루핀은 내게 또 하나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리아가 내 물건 하나를 보관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진작 나를 찾아오면 될 텐데, 어째서 여태껏 소식이 없었던 걸까.

의문이야 찾아가면 해소될 문제였다.

그렇게 리아를 찾아 떠나는 길, 나는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손이 자꾸만 품속을 더듬고 있었다. 그곳에는 짤막한 칠흑의 막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레이놀드 씨의 유품.

내게 이 물건을 맡긴 엘시 선배의 의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나는 마법사도 아닌데, 이 막대가 도움이 되긴 하는 걸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내 발걸음은 리아가 머무는 곳 앞에 이르게 되었다.

아담한 크기의 상점이었다. 예전에 엘프 아비앙이 운영하던 마법재료 가게보다 조금 넓어 보였다.

상단의 사무실로는 적당한 규모였다.

내가 문을 두드리자, 이내 안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늘은 손님 받지 않습니다.”

“나야.”

그러자 문 너머에서 침묵이 감돌았다.

머뭇거리는 기척이 느껴지길래, 나는 일단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가게 안은 주인의 성정을 반영하듯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 한복판에서, 내 여동생이 풀이 죽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써 나를 무시하려 드는 것이다.

건방지게도, 나는 여동생의 일탈을 받아줄 용의가 없었다.

“리아, 오빠 왔다.”

“으, 응…….”

리아는 내 인사에도 슬쩍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나를 만나기 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는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오빠가 돌아오면 여동생은 기쁨과 애정을 담아 마중하는 것이 상식 아니던가?

괘씸한 기분이 든 나는 리아의 곁에 다가가 추궁을 개시했다.

“다녀왔다는 포옹은? 뽀뽀는 이제 안 해 줘?”

“……아, 진짜!”

결국 내 채근을 견디다 못한 리아의 손이 쾅, 하고 탁자 위를 내리쳤다.

살짝 상기된 볼, 눈가에 맺힌 옅은 물방울.

리아에게도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왜, 왜 그러는데… 나 이제 어른이야! 그런 짓 안한다고!”

“얼마 전까지는 잘만 했잖아.”

“그, 그건…….”

리아의 눈꼬리가 잘못을 들킨 강아지처럼 축 늘어지고 말았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리아를 바라보았다. 때로는 백 마디의 추궁보다 짧은 침묵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었다.

누구보다 리아를 잘 아는 사람은 나였다.

리아의 본심을 들을 수 있는 방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리아.”

내 나지막한 부름이 결정타였다.

이내 리아의 눈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토막 나 뱉어졌다.

“하, 하지만 나 여동생 아니잖아… 남의 인생을 빼앗았을 뿐이잖아…….”

“아니야, 리아.”

일단 막무가내로 리아를 껴안으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리아는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흐느끼는 소리가 내 가슴을 깊이 울렸다.

“누가 뭐래도 넌 내 여동생이야.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평생 그렇게 살아왔잖아.”

“그럼, 그 애는?”

‘그 애’, 누구를 지칭하는 말일지는 뻔했다.

‘탐욕’, 내 진짜배기 혈연을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나, 그 애가 불쌍해… 나, 나라면 견디지 못했을 거야. 내가 미워서 견딜 수 없었을 거라고… 그, 그런데 나는 뻔뻔하게, 계속 행복해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나는 확신을 담아 재차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래도…….”

“나랑 약속했잖아.”

물기를 담뿍 머금은 목소리를 들으며, 내 혀가 먼 옛날의 기억을 퍼올렸다.

“내가 지켜 주겠다고 했잖아… 그때 나랑 약속한 사람이 누구야?”

“……나, 나.”

“알고 있지?”

내 손길이 천천히 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리아의 눈물이 앞섬을 적셨지만,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았다.

다만 리아가 어서 울음을 그치기 바랐다.

“훌륭한 기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제야 리아는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이처럼 엉엉 우는 여동생을 달래 주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오빠로서는 기쁜 의무였다.

한참이나 토닥인 끝에, 리아는 물기가 살짝 가신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 애는, 죽어야 할까?”

당연하지.

암흑교단은 온 대륙을 통틀어 가장 악질적인 집단이었다. 그들의 손에 의해 세뇌 당하고 타락한 이상, 되돌릴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나는 지금껏 예외 없이 그 사실을 입증해 왔다.

이 손으로, 수많은 목숨을 빼앗아 가며.

이제 와서 혈육의 정을 주장하기에는, 내가 지은 죄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럼에도 왜.

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입맛이 써서 도저히 단언을 하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리아가 또 다시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으니까.

“……최선을 다해 보자.”

고작해야 이 정도가 내 최선이었다.

구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한데도, 헛된 희망을 판다.

리아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터다. 하지만 또 내게 부담을 지울 수는 없어서, 소녀의 고개가 얌전히 끄덕여졌다.

꼬이고 꼬인 운명이었다.

나는 이 실타래를 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이 나리라.

내 속도 모르고 리아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믿을게, 오빠는 늘 약속을 지켜왔으니까… 자.”

난데없이 리아의 손바닥이 내 눈앞으로 내밀어졌다.

그 위에는 볼품 없는 철제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도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목걸이가 아닐까 싶었다.

나로서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증여였다.

왜 내게 이것을 건네 주는지, 알 수가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리아는 배시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아원의 꼬마 아이가 줬어. 뭐냐, 우리가 구한 여자아이 있잖아? 그 애의 오빠래.”

그래, 그 아이.

얼핏 생각이 닿았었는데, ‘계약’의 내용대로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 십자가를 건네받았을 때였다.

“훌륭한 기사답네. 지켜준다는 약속은 다 지키잖아?”

그 한 마디에, 나는 어딘가 그리운 느낌을 받았다.

내 눈이 멈칫하며 십자가의 생김새를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낯익어도 너무나 낯익은 모습이 아닌가.

성녀에게 선물해 준 물건이었다.

단지 은으로 만들었느냐, 싸구려 철로 만들었느냐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우리 둘이 연인인 줄 알았나 보구나.

“그러니까, 믿을게. 오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니까.”

사실 약속을 어긴 적도 많았다.

특히 성녀와 맺은 약속이 그랬다. 위험한 곳은 다니지 않겠다고, 한동안 안정을 취하겠다는 약속은 밥 먹듯이 어겼던 기억이 났다.

그래도 하나쯤은.

하나쯤은 지켜야 하는데.

꿈처럼 몽롱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가,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

꾸욱, 하고 십자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금속이 살갗을 파고들며 통점을 자극했지만, 나는 옅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이제는 리아가 의아하다는 어조를 할 차례였다.

“오빠, 무슨 일 있……?”

“리아.”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짧은 말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리아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 챈 듯 보였다. 내 여동생이니까, 당연하겠지.

“그런데, 너무 위험해. 불가능한 일이야. 내가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야 해.”

“……확률은 얼마나 되는데?”

“냉정히 말해서 일할 이하.”

내 솔직한 고백에 리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일그러지고, 펴지고, 이내 무어라 한 마디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결국 포기했다는 듯 우울한 빛이 소녀의 낯을 뒤덮었다.

한숨 섞인 반문이 되돌아왔다.

“……왜 그래야 하는데?”

“약속했으니까.”

내 단단한 어조에 리아의 수심이 더욱 깊어졌다.

입술을 짓씹으며,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여동생은 나를 만류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을 줄을 알아서.

리아는 조용히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잘 다녀오라는 뽀뽀.”

“어른이라서, 이제 안 해주는 거 아니었어?”

“모든 여자는 영원히 소녀이고 싶은 법이야.”

그러면서 리아는 삐진 체를 하며 흥, 하고 고개를 돌렸고.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한동안 웃음을 터트려야 했다.

다음날, 오랜만에 절친한 친구가 나를 맞아주었다.

레토 아인스턴, 내가 가장 신뢰하는 참모.

그는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말도 안 된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이안, 너 진짜 미쳤구나.”

“요즘 많이 사는 오해지.”

“아니, 진지하게 미쳤어… 너 이딴 계획이 정말 통할 거라 생각하냐? 일할은 채 될까 싶은 실현 가능성은 고사하고… 논리 자체에 허점이 너무 많아. 이따위 억지를 들어줄 것 같아?”

“그러니까 네가 보완해 줘야지.”

레토는 이대로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낯가죽을 훑어 내리는 손길에 눈 밑의 흰자위가 드러날 지경이었다.

“안 해, 못 해! 이딴 계획을 설계해 줬다간 셀린한테 머리카락을 다 뽑혀도 모자…….”

“레토, 나 도망치고 싶지 않아.”

휘리릭, 탁.

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칠흑의 막대가 허공을 회전하다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온다.

“비겁하게 굴고 싶지도 않고.”

얼마만인지 모를 만큼 오랜만에, 나는 절친한 친구에게 진심으로 부탁했다.

“제발, 한 번만 도와 주라.”

“……이런 개씨발!”

레토는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마구잡이로 흩어버렸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레토는 핏발이 선 눈으로 외쳤다.

“이러다 뒤지면, 넌 진짜 나한테 뒤질 줄 알아라.”

“두 번 죽이려고?”

“그래, 저승까지 따라가서 아주 죽어라 패 버릴 테니까!”

바락바락 악을 쓰는 벗을 마주하며, 나는 쓴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음날, 나는 레토의 조언에 따라 알펜하우저의 쌍둥이를 찾아갔고.

비로소 이 앞에 설 수 있었다.

웅성거리는 군중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후드를 눌러 쓴 나를 포함해서, 시야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들은 커다란 해류를 이르며 어느 장소를 향하고 있었다.

성국의 수도이자, 천신교의 성지 시엔델.

그곳의 가장 드높은 산에는 위대한 천신 앞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신성한 장소가 존재했다.

일명 ‘산상법정(山上??)’.

오늘은 성녀의 재판날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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