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1화 〉 6. 존재 증명(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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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엔델 산의 중턱에는 드넓은 공터가 존재했다.
먼 옛날 천신이 깎아내렸다고 전해지는 절벽이었다. 산의 절반 이상을 평지로 만든 급경사는 인위적인 손길이 닿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수용 가능한 인원만 수만에 이르는 산 위의 대평원.
그 앞에는 신의 위엄을 방증하듯 수 차례의 층계가 나뉘어져 있었다. 가장 낮은 층계는 넓고 편안하며, 그보다 높은 층계는 좁고 불편했고, 가장 높은 층계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겨우 설 여유가 존재할 뿐이었다.
바로 심판의 자리였다.
천신을 대신하여 선과 악, 진과 위, 미와 추를 가리는 신성한 권위가 부여된 그 좌석의 주인들이 하나둘씩 입장하고 있었다.
가장 낮은 층계에 앉은 인물은 총 열두 명에 달했다.
하나같이 민간에서 명망 있는 인사들로, 성국에서 가장 신앙심이 깊다는 평가를 듣는 이들이었다. 지방의 유지나 중앙의 거물뿐만 아니라, 외진 곳에서 홀로 선행을 하는 자도 포함된 인선이었다.
‘배심원’, 이들이 만장일치로 유죄와 무죄를 판단하면 그 죄의 경중을 사제가 판단한다.
두 번째로 높은 층계에는 성직자 셋이 자리하고 있었다.
각각 지식, 자애, 심판을 상징하는 사제들이었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재판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며, 각자가 상징하는 바에 따라 균형 있는 판결을 유도한다.
자애의 사제는 죄인을 변호하며, 심판의 사제는 죄인을 추궁한다.
더불어 지식의 사제는 천신교의 교리에 맞추어 두 사제의 의견을 중재하곤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층계, 모든 재판 과정을 굽어보는 위치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공터를 가득 채운 인파가 수군거리며 노인을 우러러 보았다. 뒷짐을 진 채 땅을 내려다보는 그 얼굴은 자애와 위엄이라는 상반된 면모를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교황’이었다.
성국 최고의 위치에 자리한 사제가 나올 만큼, 오늘의 재판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깎아지르듯 가파른 절벽의 앞, 자그맣게 솟아오른 원형의 바위 위에 천상의 미를 지닌 여인이 꿇어 앉아 있었다.
두 손이 구속된 채 메마른 산의 먼지를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는 마당이었다. 뇌옥에 투옥된 이후 초췌한 기색을 보일 만도 한데도, 도저히 그 미모는 가려지지가 않았다.
천신이 가장 사랑하는 처녀, ‘성녀’였다.
하늘을 올려다 보는 연분홍빛 눈동자가 유독 반항적이었다. 그럼에도 교황은 그저 말없이 죄인의 모습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늙은 사제의 낯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탁에 앉아 의견을 나누던 사이였거늘, 단 몇 주만에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교황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임마누엘, 부디 올바른 길로 우리를 이끄시기를.
이윽고 엄숙한 선언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배심원 전원, 착석 완료했습니다!”
“지식, 준비 완료됐습니다.”
“자애, 준비 완료됐습니다.”
“심판, 준비 완료됐습니다.”
단단한 목소리가 하나둘씩 이어질수록 군중이 일으키는 소음은 잠잠해졌다.
수만에 이르는 인파가 침묵을 지키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광경은 웅장하기까지 했다.
교황의 눈이 슬쩍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산의 정상이 위치하고 있었다.
노사제의 망막에 몇몇 그림자가 맺혔다. 성국의 원로들이 재판을 참관하러 온 것이다.
아인델 총주교부터 시작해서, 성국을 막후에서 움직이는 진정한 실세들까지.
그 정점은 중앙에 위치한 소년이었다.
정갈한 사제복을 갖춰 입은 그는 고작해야 십대 중후반으로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노회한 성직자들조차 그 옆에 감히 서기를 꺼려했다.
그럴 만도 했다.
모든 무투가들의 정점이자, 수백 년 동안 성국의 무력을 상징해 온 마스터.
‘성자’가 바로 저 소년을 위해 존재하는 호칭이었으니까.
성국에서 교황을 내려다 볼 권위를 갖춘 자는 그가 유일했다.
정작 성자는 재판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두 눈을 감은 채 손을 모으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미 무대 위에 모든 배우들이 올라선 뒤였다.
더는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교황의 묵직한 선포가 산상법정(山上??)에 울려 퍼졌다.
“빛이며, 진리이시고, 우리의 주 되신 천신 아루스를 찬미하라! 그분의 앞에서 우리는 한 줌의 편견과 거짓 없이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릴 것을 맹세하노라. 이 뜻을 따를 자 있는가!”
“임마누엘!”
수천 명이 입을 모아 외치는 소리가 산 중턱을 뒤흔든다.
그 맹세에도 성녀는 냉소를 머금을 따름이었다.
한 줌의 편견과 거짓도 없어? 공명정대한 판결?
헛소리였다. 배심원, 사제, 심지어 교황조차도 어설픈 각본에 따라 춤추는 광대에 불과했다.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성녀는 오늘 인류의 배신자가 되어 십자가에 매달린다. 그리고 교황청은 이로써 정의가 이루어졌다며 눈물을 흘릴 테고, 군중들은 고귀한 존재의 몰락을 보며 환호하겠지.
이제는 분노조차 일지 않았다.
추악한 본성, 거짓된 신앙, 그리고 불합리한 시련.
세상은 본래부터 이랬다. 성녀 또한 알고 있던 바가 아니던가.
“저 불쌍한 죄인의 죄목을 읊을 자 있는가?”
“천신의 충실한 종, 심판이 감히 발언권을 청합니다.”
회색의 사제복을 입고, 새 부리 모양의 가면을 쓴 사제가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나지막한 제안 같아 보였지만, 그 목소리는 공터를 쩌렁쩌렁 울려 듣지 못하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논하라.”
“죄인은 천신의 은혜를 입어 성녀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감히 그 의를 저버리고, 약자를 위한다는 핑계로 고아원을 장악한 뒤 부모 없는 아이들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또한 이를 주도한 죄인의 최측근은 암흑교단의 사제였고, 고아를 제물로 바쳐 만들어진 끔찍한 물건이 죄인의 손에 의해 유용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심판의 사제가 말을 이어갈수록 군중들이 웅성이는 소리가 커져 갔다. 그들 중 몇몇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하거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소를 짓거나, 혐오를 가득 담아 성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 봐, 성직자들은 다 똑같아. 못 믿을 족속들이라고.’
성녀는 눈을 감은 채 들려오는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다.
“증좌는 확실한가?”
“네,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분명합니다. 그간 희생된 고아의 숫자는 무려 수백!”
새하얀 장갑을 낀 검지가 성녀를 향했다. 이내 새 부리 모양 가면이 부르르 떨리며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저 자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아 희생당한 아이들의 혼을 달랩시다!”
투명할 정도로 선동의 의도가 명백한 외침에 군중들이 화답했다.
“죽여라, 죽여라!”
“인류의 배신자, 우리를 속였어!”
“십자가에 매달고, 시체는 불꽃으로 태워 대로변에 걸어라!”
바람잡이들이 섞어셔 내지르는 소리겠지.
하지만 저 울부짖음이 진심이 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군중이란 흐름을 타는 무정형의 존재고,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방향은 도무지 멈출 수 없으니까.
성녀는 후우, 하고 떨리는 숨결을 진정시켰다.
각오는 이미 끝났다. 그래, 각오는 하고 있었을 텐데.
두근거리는 심장이 성녀의 몸을 빳빳이 굳혔다. 죽음을 앞둔 몸뚱아리가 바들바들 떨며 성녀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 보라고.
죽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살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추레한 몰골로 죽지는 않으리라.
엄숙한 목소리가 산 중턱을 울린 것은 그때였다.
“……그만!”
교황의 한 마디에, 다시 군중의 웅성거림이 가라앉았다.
노사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또 다른 사제를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법복에, 평평하고 둥근 가면을 쓴 사제였다.
“자애는 할 말이 있는가?”
“죄인은 성녀로서 성국에 많은 공헌을 한 바 있습니다. 그 의도가 의심스러울지언정, 수많은 병자들이 죄인의 손을 거쳐 삶을 되찾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또한, 죄인이 정녕 암흑교단과 계약을 맺었다면 그간의 행적이 설명하기 힘들어지는 점도 있습니다.”
평탄하지만 막힘이 없는 변론이었다.
자애의 사제는 군중의 침묵 속에서 자꾸 말을 이어갔다.
“알다시피 성녀는 제국의 신성과 함께 암흑교단의 무수한 계획을 저지해 왔습니다. 암흑교단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성국에서의 입지를 위해서였습니다!”
심판의 사제가 발언권조차 득하지 않고 날카로운 반론을 내뱉었다.
“실제로 그 활약의 대부분은 ‘혈정’이라 불리는 암흑교단의 산물을 제물로 바쳐 이루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성녀의 지지기반과 정치적 입지 또한 단단해졌죠! 성국의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면, 암흑교단 또한 사소한 계획 몇 가지쯤 희생할 용의가 있었을 겁니다.”
“아직 조사가 필요한 사안입니다. 더불어 사형은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인 형벌!”
자비의 사제 또한 이에 맞서 힘 주어 외쳤다.
“극형은 과합니다! 최소한 몇 달의 유예를 두고 보아야 할 사안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순진한 소리를!”
물론 심판의 사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강변을 계속했다.
“암흑교단은 이미 대륙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그 몇 달 동안 무슨 사건이 발생해서, 죄인을 빼돌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씀입니까? 심지어 이미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상당한 증거가 모인 상황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는 살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극형을 선고해야 한단 말입니다… 저 죄인의 손에 이미 수백 명의 목숨이 희생됐기 때문에!”
두 사제의 논쟁이 그렇게 한계까지 끓어올랐을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터져 나온 노호성이 두 사제의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이제 그만!”
또 다시 교황이었다. 그는 입을 다문 두 사제를 조용히 내려보다가, 이내 마지막 사제에게도 눈을 돌렸다.
태양 모양의 가면을 쓴 사제였다.
“지식의 뜻은 어떠한가?”
“인류를 배신한 죄는 최소 사형입니다. 이에 예외 조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침착한 어조로, 태양의 가면을 쓴 사제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서로 속닥거리고 있는 열두 명의 배심원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유죄가 확정된다면 극형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정을 고려하여 보다 인도적인 사형 언도가 이루어질 수는 있다고 사료됩니다.”
결국 배심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뜻이었다.
배심원이 유무죄를 가리면 사제들이 형량을 결정한다. 하지만 인류를 배신한 죄는 죽음으로 갚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죄의 경중을 따질 것도 없었다.
무조건 사형.
자애의 입에서 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결론쯤이야 그도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군중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배심원도 마찬가지였다.
암흑교단의 배신은 대사건이었다.
군중은 불안에 빠졌고, 성직자에 대한 강한 불신을 품게 되었으며, 이는 교황청의 지도력에도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터였다.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하다.
이를 모두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바로 눈앞에 있다.
과연 참을 수 있을까?
이러한 자애의 의문을 뒤로 한 채로, 교황이 무정한 눈빛으로 성녀에게 물었다.
“죄인은 할 말이 있는가?”
그러자 군중의 기대 어린 시선이 일제히 성녀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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