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2화 〉 6. 존재 증명(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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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자애롭고 상냥하던 여인이었다. 감히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곳에 피어 있던 꽃이 아니던가.
과연 이 고귀한 꽃은 죽음을 앞두고 무슨 추태를 부릴까.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읍소를 할까? 눈물을 흘리며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할까? 그조차 아니라면, 무슨 짓이든 할 테니 사형만은 면하게 해 달라고 할까?
성녀는 그 모든 기대에 부응해 주지 않았다.
다만 담담한 어조로 물었을 따름이었다.
“제 말을 들을 생각은 있나 보군요?”
“죄인은 산상법정의 명예를 존중하도록.”
교황의 경고에 맞추어, 성녀는 비틀비틀 꿇어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두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불안정한 자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기어코 몸을 일으킨 채 떳떳이 섰다.
드높은 곳에 선 법관들이 하나같이 성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토록 높고 험준하다. 법의 귄위, 신의 존재, 그리고 현실의 벽이란.
성기사 하나가 다가와 성녀의 손목을 묶은 구속구를 풀었다. 최후의 변론을 앞둔 죄인을 향한 마지막 예우였다.
후우, 하는 숨소리와 함께 성녀의 가슴이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제 이름은, 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성녀’라는 껍데기를 입고 살아왔죠. 그 호칭에 한 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요.”
담백한 고백이었다.
군중도, 판관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언듯 드높은 정상에서 하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늘색 눈동자가 허공에 떠오른다.
생사의 주관자, 천국의 문지기.
성자가 성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한 고아 출신이지만, 주께서 내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약자를 위해 살았고, 병자들의 치료에 최선을 다했으며, 더러는 눈앞에 닥친 불의로부터 눈을 돌리긴 했으나 선을 넘은 적은 없습니다.”
“……거짓말!”
군중 사이에서, 발악처럼 비난이 터져 나왔다.
증오와 배신감으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왜 고아를 제물로 바쳤지?! 당신의 호위기사가 암흑교단의 사제였잖아!”
“감히 산상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다니!”
“죽여라, 죽여라!”
아우성치는 악의에, 성녀는 제 가슴에 덜덜 떨리는 손을 포개었다.
각오하고 있었다.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녀는 악에 받쳐 소리를 내질렀다.
“……그 대가가 이렇습니다!”
부르짖음, 폐부를 한계까지 짜낸 외침에 일순 주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단 한 번도 군중 앞에서 진심을 내보인 적 없던 성녀였다.
난생 처음이었다. 의외로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최선을 다했어요… 단 한 번도 의무를 방기한 적이 없다고요! 그런데, 내 유일한 가족은 날 배신했고 내가 이룬 모든 것이 허울뿐인 영광으로 전락했죠!”
“정녕 그대의 죄가 없단 말인가?”
“천신께선 무어라 하시던가요?”
문답에 시차가 거의 없었다.
성녀의 반문에 판관들의 침묵이 깊어졌다. 그들의 눈빛이 가늘어지며 매섭게 성녀를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성녀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아직도, 아직도 대답이 없으신가요?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는 처녀가 이 자리에 서 있는데! 내가 죄인이든, 아니든 간에 무어라 말씀이라도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죄인은 언행을 조심하라!”
여태껏 엄숙하기만 했던 교황의 목소리에 노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이는 여타의 판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덧 사제와 배심원들의 눈빛에도 적개심이 어려 있었다.
반면 군중들 사이에서는 입을 다문 채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질 뿐이었다.
무려 ‘성녀’가 아닌가.
아무리 죄인이라도 그 발언의 무게가 한낱 교인과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조심하라고요? 도대체 무얼 조심하란 말씀이시죠?”
“감히 주의 이름을 망령되게 이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벌을 내려 주시죠!”
교황의 눈이 부릅떠지고, 배심원 사이로 소란이 번져 간다.
성자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이까짓 연극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죠?! 날 벌할 거면 차라리 당신이 벌하라고요! 권위만 잔뜩 앞세운 허례허식 따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이조차도 욕심이란 말인가요?!”
“……감히!”
교황의 악물어진 잇새로 달구어진 분노가 새어 나왔다. 한계까지 열린 그 눈동자에는 어느덧 핏발이 서 있었다.
도를 넘은 감정의 파도에 교황이 차마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동안, 성녀의 토로가 지체 없이 이어졌다.
“대답해요!”
아주 작은 한 걸음이었다.
까마득한 절벽에 비하자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자그마한 내딛음.
무의미한 반항이었다. 대답조차 돌이오지 않을 물음이었다.
그럼에도 성녀는 목소리를 높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지체 없는 토로가 이어질 때마다, 군중들은 더욱 숨을 죽인 채 성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차라리 발악에 가까운 울부짖음이었다.
“내가 죄인입니까?!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면, 이곳에서 나를 쳐 죽이세요! 나를 버리겠다면, 그 손으로 손수 찢어 죽이란 말입니다! 이까짓 장난질 뒤에 숨어있지 말고!”
“감히, 감히, 감히……!”
믿을 수 없다는 현실을 목도했다는 듯 교황의 시선은 갈팡질팡 갈 곳을 찾지 못했다.
이리저리 고개를 내젓는 그의 목에 핏줄이 돋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진정 성녀가 부르짖고자 하는 의문은 따로 있었다.
“정녕 주께선 존재하신단 말입니까?!”
그야말로 싸늘한 정적.
마치 타오르는 불길에 찬 물을 흩뿌린 것만 같았다. 그 누구조차 입을 열지 못하는 숨 막히는 고요가, 산 중턱의 법정 위로 내려앉았다.
어느새 성녀는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물기 어린 호소가 흐느끼는 소리를 머금고 이어졌다.
“만일, 만일 존재한다면… 왜 우리를 굽어보지 않죠?! 왜 단 한 번도 대답을 하지 않느냔 말입니다! 일평생을, 일평생을 바쳐 믿어왔는데에……!”
“……배심원!”
참다못한 교황이 악에 찬 고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배심원들이 진땀을 흘리며 논의를 계속했다. 사실, 이미 결론은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재판을 하기 전부터 말이다.
“죄인이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신성 모독까지 일삼고 있지 않은가! 그대들의 평결은 어떻소?”
“유죄!”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배심원 중 하나가 소리 높여 외쳤다.
“배심원단의 판단은, 유죄요! 죄인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소!”
“마땅히 그래야지!”
쿵, 하고 교황이 발을 구르자 온 산천이 비명을 내질렀다.
산상법정의 특이한 점이었다.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할 노인이 층계에 서더라도, 발을 한 번 구르면 온 산이 진동하며 떨리곤 했다.
신도들은 이를 ‘천신의 망치’라 불렀다.
“사제들은 이견 없는가?!”
자연스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애의 사제를 향했다.
그는 일순 망설이듯 참혹한 눈빛을 했다가, 이내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항복 선언이었다.
“……이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위대한 주의 이름을 빌어, 이 자리에서 판결을 내리겠다!”
쿵, 하고 다시금 대지가 진동하며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포에 질린 눈빛이었다. 단 한 번 땅을 구르는 것만으로도 온 산야가 떨리다니, 그 박력이 차원이 달랐다.
모두가 교황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태양이 중천이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이 법정의 신성한 권위를 옹호하는 듯했다.
판관의 냉혹한 눈동자가 흐느끼며 엎어진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사형!”
예정된 결론이었다.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수만에 달하는 군중들만이 수군거리며 놀란 낯빛을 했을 뿐이었다. 말로는 오늘 피가 흐르리라 예측했지만, 정작 성녀에게 극형이 언도되니 얼떨떨하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법정의 귄위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인류를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죄를 천신께 돌리며 신성을 모독한 죄가 가볍지 않다! 죄인을 십자가에 매달아 산 정상에 걸어 놓고, 밥과 물조차 주지 않고 죽을 때까지 방치한다! 이후 목숨이 끊어지면 그 죄 많은 삶을 장작에 불태워 원혼들을 위로하리라!”
순식간에 성녀의 운명이 결정 지어졌다.
사자(死者)마저 모욕하는 판결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한때는 극형을 외치던 군중들조차 심하다는 감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웅성거림이 커지려던 찰나.
쿵, 하고 다시금 온 산천이 몸을 떨었다.
군중들 중에서 비명을 내지르며 엎드리는 이들이 나올 정도였다.
“본 산상법정의 판결에 이의가 있다면, 누구든 논하라!”
성녀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존재할 리가 없었다.
이미 결정된 사안을 되돌린다는 것은 법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국의 유구한 역사를 통틀어, 산상법정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한 이는 몇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의를 제기한 자는 하나같이 끔찍한 말로를 맞이했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억울하지도 않았다.
다만 슬픈 점은, 평생 믿고 의지했던 신이 아직도 응답이 없다는 사실뿐.
나는 고작해야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단 말인가?
이름까지 버렸다. 신이 내린 ‘성녀’라는 이름에 맞추어, 제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던가.
하지만 ‘성녀’라는 껍데기를 벗기니,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한심한 계집애.
당연하게도, 홀로 엎어져 흐느끼는 여인 따위에게 법정이 내어 줄 관심은 없었다.
“좋다. 그렇다면 오랜 율법에 따라, 이 시간부로 죄인의 판결을 확정……!”
팍, 하고.
판결을 공표하려던 교황의 몸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눈이 서서히 제 옆을 스치고 지나간 날카로운 궤적의 끝을 향했다.
손도끼 하나가 절벽을 파고들고 있었다.
대경한 늙은 사제가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무슨… 크허억?!”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일렀다.
도끼날에 넘실거리던 은빛의 빛무리가 절벽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교황을 기준으로 오른편, 절벽 곳곳에 은빛의 실금이 가더니 이내 폭음이 일었다.
쾅!
절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린다.
그 아래에 있던 배심원 몇몇이 경악성을 터트리며 헐레벌떡 몸을 피했다. 교황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 제대로 된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채였다.
어느 누가, 감히.
이 신성한 법정에 이토록 모욕적인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그 의문에 답하듯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벅, 저벅.
놀랍도록 선명한 기척이었다. 수만의 인파가 갈라지며, 그 틈새로 후드를 눌러 쓴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분노와 경악, 그리고 공포가 뒤섞인 시선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무기력하게 엎어져 있던 성녀의 몸이 움찔 떨린 것은 그때였다.
너무나 낯익은 발소리가 아닌가.
설마, 이래서는 안 되는데.
절대 이러지 말라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럼에도 한 줌의 기대를 버리지 못해서, 성녀의 붉어진 시선이 등 뒤를 향했다.
“……이의 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교황의 입에서 찢어질 듯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감히, 본 법정의 권위에 반기를 들겠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정체를 밝혀라, 어리석은 자여!”
그 말에 사내는 순순히 후드를 넘겼고, 이내 산상법정은 다시금 침묵에 잠겼다.
검은 머리카락, 금빛 눈동자.
절벽에 틀어박힌 손도끼, 그리고 단 한 번의 투척으로 바위를 깨부술 수 있는 실력자.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아니, 온 대륙을 통틀어 단 하나뿐이리라.
“……이안 페르쿠스입니다.”
음유시인들이 이르기를, 인류의 선봉에 서 어둠을 참하는 자.
또한 제국의 떠오르는 별이자, 대륙에서 가장 명망 높은 신성.
이안 페르쿠스가 산상법정의 한가운데 섰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도전에 응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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