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3화 〉 6. 존재 증명(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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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처럼 넘실거리던 산상법정(山上??)의 기세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당혹과 경악을 담은 시선이 한 사내를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후드를 벗은 젊은 남성은 인상 깊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또한, 손도끼 한 자루로 절벽을 무너트리는 그 실력까지도.
손도끼를 다루는 흑발금안의 기사.
이에 대한 소문은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간 지 오래라서, 도리어 사내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하는 이들이 드물 정도였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만이 정적 속을 울려 퍼졌다.
이안 페르쿠스, 최근 들어 가장 인상 깊은 활약을 보이고 있는 신성이었다.
암흑교단의 연이은 등장은 대륙을 공포에 떨게 했다. 무려 수천 년 전 신화에 나오는 괴물들이 각지에서 출현했고, 악신의 권속을 비롯한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악마들을 앞서 참한 이가 바로 이안 페르쿠스였다.
시련은 언제나 영웅을 낳는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현실이 위태로울수록 인간은 영웅의 존재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위난 속의 구원자, 이 불안한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열쇠를 말이다.
금세기의 선택을 받은 인물은 누가 뭐래도 하나였다.
비록 그 실력이 대륙의 쟁쟁한 강자들에 미치지 못할지언정, 그가 쌓아 온 업적은 진짜배기였다. 실력이든, 정신력이든, 행운이든 간에 상관 없었다.
이안 페르쿠스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인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는 거물이 되었다. 가진 바 힘이나 정치적 영향력은 최소한 이 자리에선 무의미했다.
수만의 군중이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암흑교단에 맞서 교황청의 권위를 세우는 도중이었다. 성국이라한들 그 선봉이라 할 수 있는 젊은 기사와 척을 지고 싶을 턱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사내를 쳐죽일 듯하던 교황의 기세가 잠잠해진 까닭도 그와 무관하지는 않았다.
흥분을 가라앉힌 노사제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는 새하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짐짓 엄숙한 어조로 젊은이의 객기를 훈계했다.
“이안 페르쿠스!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다. 죄인의 동료이자, 성국의 배신자를 손수 참한 그대라면 이의를 제기할 자격이 있도다.”
얼핏 듣기에는 이안을 인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훈계의 본뜻은 언제나 마지막에 나오는 법, 교황 또한 그 예외는 아니었다.
“허나, 신성한 법정의 권위를 모욕한 그 만행!”
쿵, 하고 노사제가 땅을 구르자 또 다시 산이 비명을 내질렀다.
두려움에 질린 몇몇 군중이 오들오들 떨며 자리에 엎드렸다. 온 산이 진동하는 광경은 그만큼이나 위압감이 넘쳤다.
일개 인간이 발을 한 번 굴렀을 뿐이다.
그런데 정상을 올려다보기도 까마득한 산이 몸을 떨며 신음을 토해내다니.
신의 기적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 산상법정의 권위를 지탱하는 뿌리나 다름없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 불가해한 이적을 앞둔 사내는 여전히 당당하기만 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말없이 드높은 자리에 선 교황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으려 하는가, 젊은 기사여! 이 법정의 권위는 오랜 맹약과 희생으로 지켜져 왔다. 고집이나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죄인을 해방하는 특혜 따위는 허가할 수 없다!”
“율법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안의 발언에 노기를 띠고 있던 교황의 표정이 다시 의아해졌다.
천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국가가 성국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 온 율법과 교리는 복잡했고, 그만큼이나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난데없이 누군가 찾아와 특혜를 요구한다고 해서 들어줄 리가 없었다.
이는 천 년 이상의 신뢰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행위였으니까.
하지만 성녀의 유죄가 사전에 확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구색과 명분을 갖추면 얼마든지 억지나 고집을 부릴 여지가 존재하기는 했다.
인간은 신처럼 완벽하지 않고, 따라서 인간이 만든 제도 또한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노회한 사제의 눈동자에 흐릿한 흥미가 감돌았다.
정 판을 깔아 준다면, 어울려 주지 못할 것도 없지.
그는 정치인이었으나, 동시에 성직자이기도 했다. 미래의 동량이 될 젊은이의 목숨을 둘이나 뺏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논하라, 젊은 기사여! 그대는 이제 와서 무얼 더 말하고자 하는가?”
그러자 이안과 성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성녀는 멍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벼랑 끝에서 사랑하는 사내를 마주했다. 무척이나 낭만적인 이야기였으나, 성녀의 두근거리는 심장과 달리 이성은 싸늘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저 묵묵한 황금빛 눈동자 뒤에 가려진 속내가 훤히 비치는 듯했다.
성녀가 안 돼, 라고 외치기도 전에.
“……명예 재판.”
침묵이 다시 공터를 강타한다.
몇몇 군중은 입을 틀어막았을 정도였다. 그렇게 경악이 파문처럼 번져 나가는 사이, 교황을 비롯한 사제들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명예 재판.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명칭이었다. 최소한 이 법정에서 그 네 글자를 꺼내는 이는 한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살’과 동의어였으니까.
“명예 재판을 요청하겠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게.”
헐떡이며 내뱉어진 제안이었다.
어느덧 교황의 이마에 땀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노인의 일그러진 낯가죽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아직 그대의 미래는 창창하지 않은가.”
“명예 재판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교황의 만류에도 사내는 도리어 목소리를 높였다.
타오르는 황금빛 눈동자가 두 번째 층계에 선 사제 중 하나를 향했다. 태양을 본뜬 가면을 쓰고 있던 지식의 사제는 그 강렬한 시선에 움찔 몸을 떨었다.
“이 또한 율법에 의해 보장된 권리가 아닙니까? 교리 재판은 가장 우선순위가 낮은 재판이라 들었습니다. 요청이 있다면, 마땅히 그 양식에 맞추어 다시 재판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우물쭈물 답하면서도, 지식의 사제는 흘깃 시선을 등 뒤로 던져야 했다.
까마득한 정상은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만 그곳에 자리한 거물의 존재감이 모두를 태산 같이 찍어 누르고 있을 뿐.
그 편린만으로도 사제는 숨이 가빠져 올 지경이었다.
불가능하다.
저 자가 존재하는 한, ‘명예 재판’은 이루어질 수 없다. 애초부터 무의미한 시도였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단 말인가.
홀로 이곳을 찾아왔으나, 이안 페르쿠스는 단신이 아니었다. 그와 얽힌 수많은 권력들이 성국을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제국의 젊은 신성이 성국의 재판 과정 중 살해 당한다?
불필요한 외교적 분쟁을 낳을 여지가 있었다. 심지어 듣기로 저 사내는 제국 황제의 심복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쪽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거부합니다.”
나지막한 선언이었다.
또 다시 좌중의 이목이 이동했다. 그 중심에는 은발의 여인이 위치하고 있었다.
흐느낌마저 짜낸 목소리는 마른 걸레처럼 너덜거렸다. 그럼에도 음색이 맑고 청아했으니, 누가 이 여인을 향한 천신의 사랑을 의심하겠는가.
연분홍빛 눈동자가 빛을 되찾아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거부합니다! 오늘, 종교재판에 회부된 죄인은 저뿐입니다! 제가 대리인의 선임을 거부하면 명예 재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녀님.”
“안 돼!”
발악처럼, 성녀는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 어조는 차라리 애원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다, 당신마저… 당신마저 잃을 수는 없어. 차라리 나만 죽고 끝내면……!”
“오늘 재판을 받을 죄인은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성녀의 낯빛에 일순 의아함이 떠올랐으나, 이안은 별다른 설명조차 없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저 높은 곳에 선 이들의 시선이 폭우처럼 내리꽂혔다.
“저 또한 종교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습니까!”
“그대의 재판은 유예되었다. 또 다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이런.”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던 교황이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그 시선 끝에 손도끼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유서 깊은 산상법정의 일부를 무너트린 흉기였다.
추가적인 범죄 행위, 막 저지른 참이 아닌가.
하지만 성녀 또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불가합니다! 설령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더라도, 저와 별개의 사안에 의한 재판입니다! 제 허가 없이 재판 과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규정이 따로 있습니까?”
울컥, 하고 엎어져 있던 성녀가 분노의 힘으로 다시 몸을 일으켰다.
원망과 절망으로 너절해진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기어코 몸을 일으켜, 목청을 높이는 그 모습은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따로 규정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포괄적으로 적용 가능한 법리 해석입니다! 당연한 내용을 써놓을 만큼 법전의 여백은 많지 않으니까요!”
“마땅한 부칙이 존재하지 않을 시, 율법의 해석은 죄인에 유리하게 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내가 싫다고 하잖아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성녀의 손이 제 가슴을 거칠게 두들겼다. 이제 말라버렸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금 샘솟았다.
끄윽, 끄윽. 무릎을 꿇은 성녀는 울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흐느끼는 소리를 뱉어냈다.
애끓는 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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