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4화 〉 6. 존재 증명(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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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내가 싫다고… 제발, 이안…. 그만해요! 판결은 확정됐어요! 사형이라고요, 더는 수가 없어요! 날, 날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줘요, 이렇게 빌 테니까……!”
좌중의 분위기가 숙연하게 가라앉았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이 이 자리에 있다. 또 하나의 헛된 희생을 막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내도 일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는지 후우, 하고 기나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리기를 잠시.
다시금 열린 황금빛 눈동자에는 변함없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재판관!”
성녀가 아니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선 열여섯 쌍의 눈동자가 젊은 기사를 주목했다. 그는 두 팔을 벌려 호소하고 있었다.
“법정의 판단은 어떻습니까?”
그야, 물어볼 것도 없지 않은가.
누가 봐도 이안은 억지를 쓰고 있었다. 논리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성녀의 판단이 옳았다.
애초에 장본인이 거부하는 대리인이라니.
전례조차 없었다. 그렇게 판단을 끝마친 교황이 서서히 고개를 내저으려 했을 찰나였다.
“죄인의 주장이 옳다. 그대의 명예 재판 신청은 받아들일 수 없…….”
“혹시 제가 두렵습니까?”
노사제의 말이 멈추고,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의도가 투명하게 내비치는 도발.
그러나 효과는 좋았다. 수만의 신도가 이 광경을 목도하고 있었으니까.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아온 규율과 권위, 드높은 절벽 위에서 잘난 듯이 우리를 내려다보는 당신들! 천신의 대리인이라 자신하지 않았습니까? 한낱 인간에 불과한 제가 두렵습니까?”
“……고얀 놈.”
나지막한 비난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이 논쟁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죄인은 죽음을 원한다. 법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내 하나가 죽음을 원하고 있었다. 살려 주겠다는 율법의 손을 뿌리치고, 제발 죽여 달라고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야말로 고약하다.
어째서 이토록 고집을 부린단 말인가.
그렇게 교황이 끄응, 하고 신음을 삼켰을 무렵.
“명예 재판을 열어라!”
어디선가, 열기를 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군중 사이였다. 교황을 비롯한 판관들이 깜짝 놀라 그 진원지를 살피고 있는데, 어느덧 그 외침은 폭발적으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명예 재판! 명예 재판을 열어라!”
“산상법정의 권위를 모욕한 죄를 물어야 한다!”
“기사의 명예를 존중하라! 성국은 젊은 기사의 도전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교황이 넋을 놓은 것도 잠시.
노회한 정치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술을 짓씹어야 했다. 단박에 전후 사정을 깨달은 탓이었다.
몰이꾼이 섞여 있다. 철저히 거르고 거른다고 했지만, 무려 수만에 달하는 인파였다. 작정하고 바람잡이를 숨겨두고자 하면 성국으로서는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더불어 배심원들조차 동요하고 있는 판이었다. 아마 저들 중에도 미리 언질을 받은 누군가가 있겠지.
도대체 어느 세력이?
제국 황실이 미쳤다고 이처럼 무모한 도전을 응원할 리는 없었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군중들의 아우성이 미증유의 해일이 되어 절벽을 덮친다.
“……크윽!”
웅웅거리는 함성에 몇몇 배심원이 신음을 흘리며 휘청였을 정도였다.
지금까지와 정반대다.
법정의 권위가 민중을 도저히 찍어 누르지 못했다. 집단 광증처럼 퍼진 염원은 어떠한 수단으로도 제어가 불가능했다.
저들의 본질은 ‘구경꾼’이었다. 다시 말해, 무엇이든 볼거리가 생기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뜻이었다.
제국의 떠오르는 별이 ‘명예 재판’에 도전한다?
이만한 구경거리를 놓칠 리가 없었다. 이쯤 되면 교황청으로서도 도무지 퇴로가 없었다.
결국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당혹과 공포에 젖어, 교황이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고 있던 그때였다.
“……괜찮지 않겠습니까.”
담백한 한 마디가, 수만에 이르는 인파의 아우성을 잠재웠다.
솜털이 쭈뼛 서는 감각이었다. 교황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등 뒤로 향했다. 아니, 그 위로.
까마득한 정상의 끄트머리.
그곳에는 어느새 은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이 서 있었다.
하늘빛 눈동자가 지상을 내리쬔다.
어느덧 수만에 달하는 군중들은 얼어붙은 채 정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포식자를 맞이하는 초식동물과 같은 모양새였다.
격의 차이에 압도당한 그 눈빛까지도.
“그리 바란다면 들어주어야지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오.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니…….”
나른한 어조를 이어가던 하늘빛 눈동자가 흘깃 늙은 사제를 향했다.
교황은 그 시선에 몸을 바들바들 떨며 외쳤다.
“하, 하오나 성자시여!”
“두드리는 자가 있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고 주를 따르는 무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지, 목청을 돋우려던 교황의 입이 이내 꾹 다물어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미 막다른 곳까지 몰린 판이었다. 무려 수만의 증인이 이 장소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뒤로 물러나 봐야 웃음거리로 전락할 뿐이었다.
성녀를 제물로 삼아서라도 권위를 되찾자 했던 교황청이었다. 더는 퇴로가 없었다.
결국 교황은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연민을 담은 최후의 시선이 던져졌다. 젊은 기사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성국을 지탱해 온 마스터.
그 진정한 힘이 어떤지, 아마 목도하지도 못한 채 포기하고 말 테지.
하기야, 성자에게 닿기 전에 승부가 날 가능성도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저 사내의 몸은 만신창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노회한 사제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부디 많이 다치지 않고 끝나기를 바라면서, 교황은 등을 돌리며 외쳤다.
“명예 재판을 개회한다! 천신의 뜻을 따르는 신실한 전사들이여, 검을 들어라!”
챙, 하고 성기사 중 하나가 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저 엉망진창인 몸으로 얼마나 할 수 있을까. 호기심이 일기도 했지만, 일부러 교황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
괜히 마음만 쓰일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두 사내가 땅을 박차는 기척이 느껴진 직후.
“커헉!”
너무나 순식간에,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교황의 시선이 멍하니 등 뒤를 향했다. 저 아래에서, 검 하나가 튕겨 올라 허공을 날고 있었다.
단 일합.
늙은 사제의 등줄기를 타고 새하얀 전류가 내달렸다. 망막에 차오르는 풍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였다.
교황뿐만이 아니었다.
수만에 달하는 눈과 귀가, 절벽 위에 선 열다섯 쌍의 눈동자가, 그리고 엎어진 여인의 연분홍빛 동공이.
불신을 담아 소리의 폭심을 향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충돌 끝에, 성기사가 무릎을 꿇고 쓰러져 있었다.
은빛의 갑옷에 깊은 자상을 새긴 채로.
그 앞에서, 젊은 기사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다음.”
이안 페르쿠스는 강했다.
소문보다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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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불꽃이 터져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크윽!”
벌써 열두 명째. 아니, 열세 명째인가.
기억조차 흐릿했다. 땀방울에 젖은 시야는 불분명한 경계선만을 비추었다.
지칠 대로 지친 내 몸은 오직 본능에 의존해 움직이고 있었다.
몸뚱아리는 이미 한계였다. 그까짓 사실쯤은 알고 있던 터라, 나는 이전과 다른 전법을 구사해야 했다.
오러의 힘에 의존하는 것.
얼마 전까지 내 오러는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력이 강해지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빈 깡통에 불과했다.
나와 비슷한 경지의 무인을 상대할 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내 장점은 다양한 비전 기술이나 임기응변에 있었다. 여태껏 오러의 힘에 의존해서 적을 상대한다는 발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가 없었다.
누더기처럼 기운 내 전신에 멀쩡한 곳이라곤 혈도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또 다시 땅을 박차고 성기사 하나가 쏘아진다. 성기사를 쓰러트리면 쓰러트릴수록, 내게 맞서는 적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보라.
내 검이 은빛의 궤적을 그리며 쏘아졌다. 내게 처음으로 달려들었던 성기사를 단숨에 패퇴시켰던 일격이었다.
하지만 금번의 상대는 달랐다.
캉, 하고 망치가 돌을 내려치는 감촉이 내 팔을 진동시켰다. 어느덧 내 주위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있었고, 쾌검이라 해도 좋을 만큼 급속도로 날아든 참격이었다.
그럼에도 상대는 어떻게든 내 검을 받아쳐냈다. 심지어 무릎을 살짝 굽히며 충격을 지표면으로 흘려내기까지.
이후 관절의 반탄력을 타고, 나를 덮치는 횡베기.
그 칼날에 푸른 오러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름 회심의 일격이라고 준비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캉, 하고 뒤이어 울려 퍼진 충돌음이 더욱 강렬했다. 내 반격을 버티지 못한 성기사의 검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부릅떠진 두 눈이 나를 향했다.
그럴 만도 했다.
숙련된 검사의 오러가 맞부딪히면, 일진일퇴를 반복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야말로 현격한 격차 없이 이러한 구도가 연출될 리는 없었다.
‘해(?)’의 묘리 덕이었다.
은빛의 은하수에 닿은 오러들이 산산조각 나며 비산했다. 수정의 파편들이 반딧불이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베고, 찌르고, 쓰러트리고.
몇 번이나 검을 휘둘렀을까.
헐떡이는 숨소리가 뇌 속을 징징 헤집었다. 폐부가 모자란 산소를 보충하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어느덧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성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질렸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쓰러질 것만 같은데, 쓰러져야 하는데.
도무지 무너지지 않고 검을 휘두르는 미치광이를 누가 상대하고 싶을까.
그래서 나는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아, 하아… 다음.”
성기사 사이에서 처음으로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진다.
누군가 나서야 하는데, 이미 내 주위에는 쓰러진 성기사가 수십이었다. 하나같이 깊은 자상을 입거나 골절상을 입고 신음하고 있던 터였다.
아무리 용맹한 성기사단이라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내가 먼저 가야 하나.
검을 쥔 두 손에 힘을 주었을 무렵이었다.
“……그만!”
기다려 마지않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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