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75화 (475/649)

〈 475화 〉 6. 존재 증명(63)

* * *

단 한 마디에,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엎어진 채 신음하고 있던 성기사들조차 서로를 부축하며 어떻게든 자리를 피하려 애를 쓸 정도였다. 단 몇 초 뒤, 난잡하던 전장이 정리되고 이내 공터에는 나 혼자만이 서 있었다.

나머지 구경꾼들은 이미 멀리 피신한 지 오래였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돌리며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아냈다.

이 일련의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드디어 오는 건가.

그 직후였다.

쿵, 하고 무형의 압박이 온몸을 짓눌렀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컥, 하는 신음을 토해냈을 정도였다.

중력이 몇 배는 강해진 느낌이었다.

몸을 일으켜야 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이를 악문 내 눈에 절로 핏발이 섰다.

혹시 이 또한 상대의 능력 중 하나일까?

그따위 지레짐작을 하며, 내가 어떻게든 고개를 치켜들었을 찰나.

일순 내 눈빛이 멍청해졌다.

저벅, 저벅.

하늘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햇빛을 등진 채 걸어오고 있었다. 저 까마득한 정상에서, 허공을 밟으며.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먼 옛날 성인(?人) 중 하나가 물 위를 걸었다는 풍문은 들은 적이 있었다. 이는 경지에 이른 무인 또한 정교한 마력 조작을 통해 어느 정도 재현이 가능한 경지였다.

하지만 허공을 밟고 내려오다니.

심지어 성자의 표정은 산책이라도 나온 듯 평온하기만 했다.

마치 그곳에 소년만을 위해 설치된 유리 계단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막힘 없이 걸음을 내딛는 그 자세에서 강자 특유의 여유와 기품이 느껴졌다.

그리고 소년이 계단을 한 걸음씩 밟고 내려올 때마다, 내 몸에 가하는 압박감은 점점 더 강해져 갔다.

쿵, 쿵, 쿵.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성자는 이 고통을 의도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속에 든 것을 게워내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이마저도 성자의 본의는 아니었다.

단지 존재감이 너무 강했다.

마치 고래가 지나간 자리에 새하얀 포말이 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세상이 그 발소리에 맞추어 망치질을 했다. 어느덧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하늘빛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흥미롭군요. 제국의 떠오르는 별이라고 해서, 그 늙은이가 늘그막에 거둔 제자가 아닐까 싶었습니다만…….”

그렇게 성자가 살짝 말끝을 흐린 직후에야, 나를 옭아매던 중력이 모조리 소멸했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내 꼴이 불쌍해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됐든 간에, 비로소 되찾은 자유였다. 이 기회를 놓칠 까닭은 없었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내 가슴이 가파른 상하운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거친 숨을 진정시키는 사이, 성자는 내가 선 공터에 발을 내딛었다.

“설마, ‘그녀’의 제자였습니까.”

한 걸음, 두 걸음.

성자의 두 발이 소리 없이 땅을 딛고 섰다. 그제야 나는 성자의 생김새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은빛의 머리카락과 하늘색 눈동자를 갖춘 미소년이었다. 얇은 턱선과 보드라운 살결이 나름 중성적인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아직 2차 성징이 오지 않은 소년과 같은 외모라고 할까.

얼핏 보기에 연령대는 10대 중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무려 수백 년 동안 성국을 지켜온 노괴였다. 하물며 자타공인 제국의 최강자 검공조차 우위를 점하지 못한 강자가 아닌가.

어떤 의미로든 존경을 표할 만한 상대였다.

나는 삐걱이는 몸으로 최대한의 예우를 보였다. 내 고개가 움푹 꺾이며 공손한 인사가 이어졌다.

“모든 무투가의 스승, 성자를 뵙습니다.”

“낯간지러운 허명입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스승이 되고 때로는 제자가 되는 법.”

성자는 아무 말 없이 손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러자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병장기들이 부르르 진동을 시작했다. 내가 쓰러트린 성기사들이 놓고 간 물건이었는데, 성자의 선택을 받은 무구가 독특했다.

메이스(mace).

끄트머리가 둔탁한 둔기였다. 아무리 봐도 무투가가 쓸 무기는 아니라, 내 눈이 일순 멍청해졌다.

“형제여, 그대의 각오를 듣고 싶습니다. 무슨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섰습니까? 그리고 무얼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 서 있습니까?”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를 악물면서, 검극을 성자에게로 겨누었다.

온몸의 감각이 절로 곤두서고 있었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상대는 단 한 치의 망설임조차 허락하지 않는 존재라고.

해(?)의 묘리에 기대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성자의 일격을 온전히 흩어버리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몇 번은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줄 테지.

나는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침으로 축이며 말했다.

“……단지 그뿐입니다.”

흐, 하고 성자는 옅은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떨구었다.

“어려운 길을 걷고자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까마득한 후배를 위해 한 번만 양보를 해주시는 건?”

“불가.”

메이스를 쥔 손을 천천히 내리며, 성자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율법에 의해 불려나왔다면, 그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때로는 후배의 도전에 응해 주는 맛도 있어야지요.”

예상하던 대로의 대답이었다. 어차피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터라, 나는 숨을 죽이며 자세를 낮추었다.

강자를 대하는 약자는 이래야 했다.

오로지 버티기만을 위한 자세, 성자도 그 의도를 눈치 채고 있을 터였다.

말간 미소를 띤 성자의 낯이 하늘을 향했다.

태양은 아직 중천에 걸려 있었다.

“……그럼.”

짤막한 신호였다.

성자는 이래도 될까 싶을 만큼 느릿한 동작으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메이스를 치켜 들고, 자세를 낮추고, 무릎을 굽힌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하늘빛 눈동자가 정면을 향했고, 소년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단숨에 분위기가 일변한다.

콰직, 하고 한 존재를 중심으로 세계에 균열이 이는 듯한 감각.

온다.

나는 척추를 저릿하게 타고 오르는 직감에 온 힘을 검에 집중했다. 넘실거리며 타오르는 은빛의 오러가 안개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직후, 벼락이 내달린다.

그야말로 빛과 비견할 만한 속도였다. 거친 질주가 남긴 잔상이 환상처럼 주르륵 꼬리를 이루었다. 하지만, 성자가 말미를 준 덕에 내 자세는 이미 완성된 뒤였다.

어떻게든 오러만 흩어놓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 시선이 성자가 든 메이스를 향한 순간.

시간이 정지한다.

철로 이루어진 투막한 메이스에는 아무런 빛무리도 감돌지 않았다. 시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을 동원해도 오러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갈 곳을 잃는 내 눈동자가 멈춘 시간 속을 떠돌았다. 그러다 문득, 하늘빛 눈동자가 얼핏 내 망막에 맺혔을 찰나.

우득, 거리면서 공간이 비명을 내지른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정(?)의 세계가 찢어지고 있었다. 소년의 팔이 모든 흐름과 법칙을 우그러트리며 가속을 개시했다.

무엇보다 나를 응시하는 하늘빛 눈동자.

그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얼핏 인삿말이 내 귓가를 스치는 듯하더니.

“임마누엘……!”

팍, 하고 두개골이 깨져 나갔다.

내 몸이 갸우뚱 기울었다. 아니, 기울고 있나?

그것이 최후의 감각이었다.

이후 암전.

*

허억, 하고 나는 거친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손이 덜덜 떨렸다. 내 몸은 어느덧 땅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뇌리가 끊임없이 직전의 기억을 재생하고 있었다.

두개골이 깨졌다.

죽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왜, 나는 아직도 숨을 들이마시고 있는가.

혹시 환상이었나?

그 추론이 깨질 때까지는 단 몇 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내 눈이 멍하니 주위를 살펴 보았다. 반경 수십 미터가 움푹 패여 있었다.

마치 운석이라도 맞은 듯한 살벌한 풍경.

그리고 무엇보다, 내 주위로 쏟아져 내린 핏물의 흔적이 내 망막에 거친 잔흔을 남겼다.

나는 이미 죽었다.

몸이 아니라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이미 넌 한 번 죽었다 살아났노라고.

죽을 ‘뻔’했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밀물처럼 밀려온 공포가 전신을 난타하고 있었다.

아직도 덜덜 떨리는 몸이 팔을 듣지 않을 정도였다.

저벅, 저벅.

뭉게뭉게 피어오른 먼지 구름 사이로, 누군가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저승은 어떠셨습니까?”

겁에 질린 내 눈동자가 서서히 위를 향했다.

소년의 하늘빛 눈동자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도 빛이 났다. 보고 싶지 않아도, 눈에 띌 수밖에 없을 만큼 맑고 청명한 색이었다.

'성자'였다.

그의 손에는 메이스가 들려 있었다. 충격으로 반파된 무게추 부근이 허전하기만 했다.

소년은 그 엉망진창인 무기로 제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대의 각오는 잘 알았습니다. 또한, 미래를 이끌어 갈 젊은 기사의 목숨을 이 자리에서 거두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죠.”

끄윽, 하고 신음을 내지르면서.

나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멋대로 경련을 일으키는 근육이 끊임없이 애원하고 있었다.

도망쳐라, 당장.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길.”

탁, 하고 메이스가 손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아니, 죽지만 다시 되살아날 뿐이죠.”

비틀, 거리면서 내 몸이 다시금 엎어졌다.

주저앉은 나와 성자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성자는 지극히도 평온한 낯빛이었다. 방금 전의 광증이 거짓말이라도 된다는 양.

“……제가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 한.”

그제야 나는 성자의 별명을 떠올렸다.

‘천신의 수제자’.

‘모든 무투가들의 스승’.

그리고, ‘생사(?死)의 주관자’이자 ‘천국의 문지기’.

그는 삶과 죽음마저 주무르는 괴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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