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6화 〉 6. 존재 증명(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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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나를 포함해서, 저 멀리에서 구경 중인 수만에 이르는 인파조차 숨을 죽일 만큼 압도적인 무위였다.
단 일격이었다.
상대는 특기라 할 수 있는 무투술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단순히 땅에 굴러다니던 무기 하나를 들어, 휘두르기만 했을 뿐인데도 비산한 흙과 먼지가 뭉게구름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괴물이 만든 참상 한가운데 주저앉은 채였다.
무려 반경 수십 미터에 달하는 구덩이.
움푹 내려앉은 지반이 그 위력을 짐작케 했다. 아마 충돌 당시에는 흙먼지가 하늘 높이 치솟았으리라.
헐떡이는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내 의지와는 무관한 감정이 어느덧 내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무섭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유전자 속에 새겨진 본능이 내게 울부짖고 있었다.
이제라도 뒤돌아서, 달음박질을 치라고.
격이 다르다. 이처럼 담백한 감상조차 나와 상대의 현격한 격차를 온전히 묘사해 주지 못했다.
이것이 대륙에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 ‘성자’의 힘이란 말인가.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황 상태를 벗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죽을 뻔한 위기는 수도 없이 넘겨왔다.
물론 진짜배기 ‘죽음’은 차원이 다른 충격을 안겨 주었지만,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들 정도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렸다.
더듬더듬, 검을 찾아 땅바닥을 헤집는 내 손에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탁, 하고 내 앞에 검 한 자루가 떨어진 것은.
하늘빛 눈동자가 내게 묵묵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과연, 제국의 신성이라 불릴 만한 실력은 있군요. 벌써 제정신을 되찾을 줄이야.”
“어, 어떻게…….”
잔뜩 긴장해 굳어버린 혀를 억지로 풀면서, 나는 애써 매서운 눈빛을 가장하며 물었다.
“어떻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지?”
공대조차 잊어 버린 물음이었다. 불경을 저질렀다며 불호령을 내려도 부족함이 없는 무례였으나, 성자는 그다지 불쾌해 하는 기색이 없었다.
다만 담담히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모든 마스터는 하나의 난제를 파고듭니다. 세상을 보는 직관이라고 해야 할까요… 마치 당신의 스승이 ‘흐름’에 천착해 왔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벅, 하고 단지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인데 내 몸이 절로 경기를 일으켰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몇 번이나 주먹으로 허벅지를 내리쳤다. 그제야 다리의 경련이 가까스로 잦아들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컸다.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본능과 무의식, 두 가지 영역에 너무 깊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의지로 억누르기 버거울 만큼.
그러든 말든, 성자는 나지막한 설명을 이어갈 뿐이었다.
“제 관심 분야는 삶과 죽음이었습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또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이 주님의 은총이라면, 마땅히 이에 대한 고뇌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넋 나간 시선이 무심코 성자가 든 메이스를 향했다.
그러고 보면, 의문은 아직 남아 있었다. 도대체 오러조차 쓰지 않고 어떻게 그만한 위력을 낼 수 있었는가.
이 또한 성자의 해설에 답이 있을 터였다.
“혹시 천지만물이 창조된 과정을 알고 있습니까? 악신 오메로스가 지은 육신은 정교한 찰흙덩어리가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육체에 주께서 숨을 불어넣으니, 비로소 맥이 뛰며 생이 시작되더라…….”
탁, 하고 성자의 걸음이 나와 미묘한 거리를 두고 멎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저 자는 나와 얼마나 거리를 벌리고 있든, 단 한순간에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강자였다.
난 아직도 죽음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악문 잇새로 진한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제가 다루는 것은 그 ‘숨결’입니다. 줄여서 ‘숨’이라고 해야 할까요.”
검을 쥐고, 다시 자세를 가다듬는다.
후우, 하고 숨을 내쉬어도 거칠게 박동하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 의지를 다질 뿐이었다.
도망치지 않는다.
비겁하게 굴지 않는다.
그렇게 되뇌일 때마다, 품속에 넣어둔 칠흑의 막대가 내게 호응하는 것만 같았다.
“비단 생명뿐만이 아닙니다. 천지만물이 호흡을 하며 이 ‘숨’을 나누고 있죠. 생명의 근원, 그리고 모든 활력의 원천… 당신이 되살아난 까닭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숨결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성자는 옅은 호선을 머금었다. 그 호칭에 걸맞은 자애로운 미소였다.
“죽은 자의 영혼이 한동안 육체에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육체의 생명 활동을 되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러를 다루지 않는 이유는…….”
“순수한 육체가 더욱 강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새하얘진 낯빛으로 성자의 몸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여타의 사제나 마법사처럼 유약해 보이는 몸은 아니었다. 그러나 체격은 마른 편으로, 아무리 보아도 그 우악스러운 근력의 소유자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러니 해(?)가 통하지 않을 수밖에.
순수한 육체 능력만으로도 이만한 참상을 일으키는 인물이었다.
오러를 다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천치만물이 ‘숨’을 지니고 있는 이상, 이를 따로 채워야 할 필요도 없을 테지.
오러와 마력으로 상쇄도 불가능하다. 삶과 죽음마저 반전시키며, 몇날며칠을 싸워도 지치지 않는 괴물이었다.
내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이길 수 없다.
“수많은 이들이 육체를 단련합니다. 하지만, 어느 누가 무투가만큼 육체를 신성하게 여기겠습니까?”
“그런데 왜 무기를 들고 있습니까?”
“무기를 들지 않으면, 진심을 내야 하니까.”
싱긋,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성자가 서서히 자세를 고쳐 잡기 시작했다.
“싸울 때마다 산을 날려먹으면, 민폐가 아니겠습니까?”
온다.
나는 성자의 신호를 눈치 채고, 곧장 전력을 다해 방어에 임했다.
해(?)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결(?)로 대응해야 했다.
검신에 단단히 응집되는 은빛의 오러를 보며, 성자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올바른 판단입니다. 첫 번째보다는 발전했군요… 허나.”
그리고 우득, 하고 다시금 시공이 정지한다.
찰나조차 아니었다.
마치 서로 다른 장면을 오려 붙인 듯했다. 성자는 어느덧 내 앞에 도달해 있었고, 그 하늘빛 눈동자에서 흉광이 폭사되고 있었다.
따사롭던 미소조차 사납게 일그러진 뒤였다.
도대체, 어느새.
이러한 의문을 채 이어가기도 전이었다.
“아직 부족해!”
팍, 하고 다시 핏물에 흠뻑 젖은 뇌수가 튀기는 소리.
폭음과 함께 몸뚱아리가 하늘 높이 비산했다. 그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암전, 나는 또 다시 헐떡이면서 눈을 떴다.
“두 번째 죽음은 어떠셨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내 의문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팍, 하고 머리를 잃은 몸뚱아리가 휘청거리다가 엎어지고.
암전, 이후 다시 처음부터.
“포기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포기해도 됩니다.”
웃기지 말라고, 나는 이를 악물며 비명을 내질렀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팍, 하고 두개골이 터져 나가는 감각.
벌써 세 번째였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했습니까?”
몇 번이고, 몇 번이나 달려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공세를 취하든 수세를 취하든 결과는 언제나 동일했다.
죽음.
암전.
그리고 부활.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 길인지, 그대는 알고 있습니까?!”
나는 이제 몇 번째인지도 모를 호흡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처음이었다.
이토록 막막한 벽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동안은 몸부림이라도 치면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나를 덮치는 시련은 차원이 달랐다.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기도 했다. 내 계획의 일부가 그랬으니까.
성자가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도전하고, 도전해서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각성의 실마리를 잡아보고자 했는데.
승산이 있나.
근원적인 의문이었다. 설령 내가 이 자리에서 각성의 실마리를 잡는다고 해도, 이 괴물로부터 승리를 거두는 구도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시련이 저벅저벅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도망치지 않는다,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누군들 도망치고 싶었을까요? 그들은 왜 도망을 쳐야만 했을까요?”
탁, 탁.
손바닥을 두드리는 메이스는 본래의 형상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짤막한 쇠막대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내 명줄을 끊고, 폭음과 지진을 일으키는 데에는.
헐떡이는 숨소리가 습기가 배인다.
몸이 호소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자고.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흙먼지를 뚫고 성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애를 썼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아직 쓰러질 수는 없었다.
“그 길은,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 될 길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이제야 겨우 엎드린 차였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땀방울에 가린 시야가 뿌얬다.
“그에 비하자면 얼마나 배려심 넘치는 조건입니까? 진작에 죽었어야 할 몸뚱어리가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쓰러져도 몇 번이고 다시 도전할 수 있죠… 하지만 실전도 그럴까요?”
자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성자는 단언했다.
“……불가!”
성자의 남은 손이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그는 마지막 기회라는 듯 제안을 건넸다.
“아직 되돌릴 기회는 남아있습니다, 형제여. 그대의 목숨이 정녕 그대만의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어깨에 짊어진 무수한 생명을 생각해 보시죠.”
내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대답, 대답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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