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7화 〉 6. 존재 증명(65)
* * *
“나, 는…….”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 와서 검을 든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왜.
나는 이를 악물고 손을 뻗어 땅 위를 구르는 검을 쥐었다.
성자는 미소 띤 낯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단, 그 눈만큼은 웃고 있지 않았다.
으득, 하고 이를 갈며 내 황금빛 눈동자가 성자를 거칠게 응시했다.
“……도망치지 않아.”
내 악에 받힌 대답에 성자는 흐, 하고 헛웃음을 삼켰다.
그조차도 잠시.
옅은 미소에 불과했던 웃음소리는 점점 더 그 소리를 키워갔다. 종래에 이르러서는, 온 산천을 쩌렁쩌렁 울릴 만큼 거대한 울림이 되어 퍼질 정도였다.
“푸흐, 아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렇게 하늘을 올려다 보며 성자가 웃음을 터트리기를 한참.
다시금 하늘빛 눈동자가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새 어떻게든 몸을 일으킨 나를 포박하듯 감싸는 시선.
희열과 광증으로 번들거리는 눈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즐거운 유희거리를 만났다는 듯이.
“……구하는 자에게 구원 있으라.”
그 기도문을 들으며, 나는 발악처럼 고함을 내지르며 땅을 박찼고.
“임마누엘……!”
팍, 하고 또 다시 두개골이 깨져 즉사했다.
그렇게 수십, 수백 번을 죽었다.
처음에는 머리가 산산조각 나 즉사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수십 번을 넘어가니, 내 사인은 점점 더 다양해졌다.
때로는 모닝스타에 상반신이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심장을 검에 찔리거나,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반으로 찢긴 적도 다반사였다.
그야말로 무수한 죽음을 경험했다.
어느 시점부터, 내 망막 위로 어느 사내의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닳고 닳은 회상이었다. 어느 전장에서의 화상들.
“기습입니다. 후퇴 계획을 누군가 유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젊은 전령이 찾아와 내게 말했다.
“탈출할 수 있는 이들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그럼 나머지 병력은?”
“최대한 많은 이들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나는 낯가죽을 손으로 덮으며 생각했다.
신이시여, 보고 계십니까?
당신의 잘난 계획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고통 받고, 악이 득세하며, 끝내는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뿌리 뽑으려 하는군요.
그러나 원망은 짧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도주한다. 최대한 전력에 도움이 되는 병력을 위주로 탈출시켜라.”
올바른 판단이었다.
이것이 최선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랑하는 연인이 내게 말하지 않았다면.
“제가 남겠어요.”
그렇게 세상이 얼어붙었다.
“이곳에서, 전선을 저지하겠습니다.”
그 목소리가 마지막이었다.
나는 가물가물 밝아오는 정신으로 사고했다.
꺾이지 않으리라 자신했다.
무너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깎여나가는 것은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정신이 점점 더 한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어느덧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저물고, 노을이 질 무렵.
부활할 때마다 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이제는 한참이나 넋을 놓은 뒤에야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을 지경이었다.
아니, 정신을 되찾고 나서도 내 뇌리는 물에 잠긴 듯 몽롱하기만 했다.
이러다가 끝이 나는 걸까.
고집을 부리던 모든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얼마 남지 않았군요.”
성자의 담백한 진술이었다.
목소리는 귀에 닿았으나, 그 의미를 해석할 만큼 내 정신에는 여유가 남아있지 못했다.
단지 몸을 일으켰다.
왜 몸을 일으키는지도 잊어 버렸으면서.
마치 본능처럼.
어디선가 악에 받친 절규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만, 그만해요!”
울고불며, 성녀가 달려오고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그 낯빛이 퍽 안타까웠다.
성자의 시선이 흘끗 등 뒤를 향했다.
성녀는 달려오다 말고 엎어져서, 그 자리에서 애원했다.
“제, 제발… 제발 그만둬 주세요, 성자시여… 제가 죽으면 될 일이 아닙니까, 저 하나로 끝나면 될 일이 아닙니까!”
제정신이 아니었으나, 나는 성녀가 슬프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안심하라는 의미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팍, 하고 다시 목숨을 잃었다.
벌써 수백 번째.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진다.
**
성녀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난생 처음으로 깨달았다.
피눈물이 흐른다는 말은 비유나 과장 따위가 아니었다. 충혈되다 못해 터져 나간 실핏줄이 눈물에 비치며 핏빛의 이슬이 방울져 내리고 있었다.
아무도 입술을 달싹이지 못했다.
결코 성자의 압도적인 무위 때문만은 아니리라. 벌써 몇 시간째, 삶과 죽음을 오고 가는 어느 사내가 그들의 망막 위에 맺혀 있었다.
수백 번, 혹은 수천 번인가?
핏물과 뇌수가 허공을 비산했다. 단말마조차 없이 진득한 핏자국이 대지에 흩뿌려졌다. 그렇게 생명을 잃은 몸뚱어리가 비틀거리더니, 이내 쿵.
엎어지고 쓰러지고, 그렇게 죽기를 반복하는데도.
일어선다. 일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불가해한 광경이었다.
성자의 기적과, 사내의 귀기 서린 집념이 어우러져 탄생한 비극의 절경이었다.
수만 쌍에 달하는 눈동자가 홀린 듯이 두 사람의 전투를 응시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 누구도.
오직 절규하는 성녀를 제외하고서는.
“안 돼, 안 돼… 제발, 제발 그만하라고! 누, 누구든 말려 봐… 응?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든… 제바아아알!”
부르짖음의 끝은 절망에 젖은 흐느낌이었다.
벌써 수백 번이 넘었다.
사랑하는 사내가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이를 맨정신으로 볼 수 있는 여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심지어 저 사내는 성녀를 구하기 위해 전장에 섰다.
성녀의 턱이 경련하며 이가 딱딱 부딪혔다. 한계에 달한 정신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했다.
무슨 수를, 무슨 수든 써야 돼.
그러던 성녀의 눈에 얼핏 넋을 놓고 있는 성기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본래라면 성녀를 이 자리에 묶고 있어야 할 인물들이었다.
이판사판 따질 여유는 없었다.
“으헉?!”
성녀는 거칠게 몸을 일으키며, 비틀비틀 내달렸다. 다시금 두 손이 등 뒤에 포박되어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자세였다. 그러나 그 필사적인 질주는 쉽사리 붙잡기도 애매했다.
분위기라고 해도 좋았다. 어떠한 결기가, 성녀의 달음박질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내를 구해야만 한다는 의지.
그것이 성기사를 일순 망설이게 만들었고, 이내 답을 구하는 시선이 교황을 향했다.
다시 붙잡아야 하냐는 뜻이었다.
교황은 씁쓸한 표정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전황은 성자가 시종일관 압도하고 있었다. 성녀 하나가 낀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성자가 성녀를 제어하지 못할 수준도 아니고.
무엇보다, 교황은 저 젊은 기사의 모습에 어느 정도 압도되어 있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성도 시엔델을 지킨 전설적인 무인이었다. ‘성자’라는 이름은 드높은 벽이었으며,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할 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사내 하나가 그 앞에 검 한 자루를 들고 섰다.
마주 선 절벽에 비하자면 이쑤시개에 지나지 않은 허술한 무장이었다. 그러나 떨어지고, 떨어져도 다시금 몸을 일으킨다면.
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 끝이 무엇일지.
그렇게 성녀는 내달려, 어느덧 성자의 앞.
하지만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나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엎어진 몸이 다시 일으켜질 기미가 없었다. 단지 성자의 시선이 흘긋 성녀를 한 번 훑었을 뿐이었다.
성녀의 다리는 굳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한순간에 납덩이가 돼버린 듯이.
그럼에도 성녀는 애원했다.
제발 그만두라고, 나 하나로 끝내면 될 일이 아니냐고.
사랑해 마지않는 사내는 못내 성녀가 걱정이 된 듯했다. 여인을 향한 사내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고.
팍, 하고 핏물과 함께 과일처럼 사내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두 손이 묶여 있지만 않았어도, 성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절규했을 터였다.
가림막조차 없이 내뱉어진 비명 소리가 핏물로 젖은 공터를 적셨다. 성녀는 발작이라도 하듯이 몸을 파들파들 떨면서,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아, 안 돼… 제발! 성자시여, 용서해 주세요… 제, 제가 건방지게 주를 모욕했기 때문인가요? 사죄드리겠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그렇게 오만을 떨지 않겠습니다. 제발, 제발 우리 이안만은…….”
쿵, 쿵.
땅바닥에 몇 번이고 머리를 찧는 소리가 고적(??)에 잠긴 산야를 울렸다.
흙은 말라붙은 핏물로 거무죽죽하고, 노을 진 하늘이 어둑한 그늘을 지상에 내리는 시각.
황혼을 도화지로 삼은 그림자가 시선을 돌렸다.
무릎을 꿇은 채 애원하는 또 하나의 그림자를 향해서.
“길 잃은 어린양아, 사죄하지 않아도 좋다. 끝없이 의문을 가지고, 주의 존재를 부정하라. 이 또한 신앙이니.”
“그렇다면 왜!”
울음에 함뿍 젖은 울부짖음이었다.
성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성녀를 내려다보았다. 하늘빛 눈동자에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흙투성이가 된 채, 성녀가 애 끓는 목소리를 높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