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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78화 (478/649)

〈 478화 〉 6. 존재 증명(66)

* * *

“왜, 왜 이러시는 건데요… 이안은, 이안은 아무런 잘못도 없잖아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모자랐습니다… 제가, 제가 죽을 죄를 지었어요! 그러니까, 제발!”

온힘을 다해 짜낸 절규였다.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논리 이상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전장에 선 성자도, 깎아지를 듯 높은 절벽 위에 선 판관들도, 그리고 수만에 달하는 인파들도.

차마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는 까닭 또한 이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날, 날 죽여요! 차라리 날 매달고, 돌을 던진 다음, 불로 태워 죽이라고요! 그게, 그게 바로 당신들이 원하는 거잖아아아악!”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비명에 가까워진 애원이었다.

숨을 헐떡이면서, 폐부의 모든 공기를 짜낸 성녀가 구슬프게 눈꺼풀을 닫았다.

뚝, 뚝.

맑은 이슬이 방울져 떨어져 내린다.

“그러니까, 이안은 놔 줘요… 왜, 왜 그 사람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건데요… 흐으윽, 흑…….”

묵언.

성자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사내가 신음을 흘리며 꿈틀거린 것은 그때였다. 손가락이 전류라도 통한 듯 흠칫, 하고 떨리더니, 사내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성자의 시선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성녀는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안 돼.

“……불가.”

팍, 하고 다시 핏물과 살점이 튀기고.

“아아, 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 안 된다고… 그만, 그만하라고 했잖아! 당신이, 당신이 이러고도 성자야?! 천신을 따르는 종을 자처할 수 있냐고!”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인가?”

엄숙한 질문이었다.

성자의 목소리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성녀였으나, 그 물음에는 일순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나는, 누구지?

예전이라면 당당하게 말했을 터였다.

‘성녀’라고, 나는 성국의 성녀라고.

하지만 지금은?

극에 달했던 감정 탓에 꽉 쥔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든 흔적이었다.

“그대도 주를 따르는 종인가?”

“나, 는… 그러니까…….”

멍하니 가라앉았던 연분홍빛 눈동자에 다시 이글거리며 불길이 타올랐다.

악물어진 잇새로 맹렬한 감정의 편린들이 급류를 이루었다.

“제가 천신의 종이 아니면, 도대체 무어란 말씀이죠? 지금만 하더라도, 주의 뜻을 잘만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주의 뜻이라.”

“날 버렸잖아요!”

원망과 불신으로 찌들어, 원색적이기까지 한 비난이었다.

“평생을 믿어 왔는데… 당신을 위해 살아왔는데! 헌신짝처럼 버려졌어, 그러니까 버림 받겠다고 하잖아! 순명(??)하겠다고! 나만, 나만 버리면 되잖아… 그런데 왜 내, 내 가장 소중한 사람까지 빼앗아 가려는 거야……!”

“그런가.”

움찔, 하고 다시금 사내의 몸에 옅은 경련이 일었다.

성자는 다시금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앉아서, 얌전히 순명(??)하게. 이 또한 주의 뜻이 아닌가?”

“아, 안 돼… 잠깐만……!”

팍, 하고 다시금 사내의 생명이 허공을 날았다.

“아으, 으, 아아… 아아아아아아악! 그만, 그만! 그, 그만해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모자랐어요, 부디! 부디 단 한 번만이라도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이안만큼은, 이안만큼은!”

“스스로 고른 길이다.”

성자의 어조에는 냉혹하다 싶을 만큼 고저가 없었다.

그 속내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이름조차 없는 자여, 그대는 어찌 타인의 운명에 간섭하려 하는가? 그대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내 운명이에요!”

핏발이 선 눈으로, 성녀가 절절한 애원을 토해냈다.

“감당해도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요! 이안은, 아무런 죄도……!”

성자는 이제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팍, 팍, 팍!

그는 기계처럼 사내를 도살했다. 그럴 때마다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고, 성녀는 온갖 수를 다 써보았다.

애원, 협박, 협상, 그 무엇이든.

죽으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죽을 용의가 있었다. 이안 대신 저 자리에 서서, 동이 트고 해가 질 때까지 죽임을 당하라고 해도 기꺼이 받아들였을 터였다.

이안만 구할 수 있다면!

종래에 이르러, 성녀는 애원의 대상을 바꾸었다. 성자가 아닌 이안에게로.

“이안, 이안… 제, 제발 그만해요… 흐윽, 흑… 나, 나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요. 미쳐버릴 것만 같다고요! 절대로, 절대로 불가능하단 건 당신도 알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하지만 사내의 눈은 흘깃 성녀를 향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 다음 순간이면, 사내는 어김없이 검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죽고 살아나기를 몇 번일까.

울다 지친 성녀는 목이 쉬어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했다. 다만,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듯 자문을 반복할 뿐이었다.

“왜, 왜… 왜 포기하지 않는 거죠? 왜 다시 일어나는 거죠?! 분명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텐데……!”

“글쎄.”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성자였다. 그는 여전히 성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로, 담백한 어조를 이어갔다.

“그대가 볼 때는 어떤가.”

“바보 같아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성녀는 옅은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그래서, 너무나 소중해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사람이니까…….”

그제야 성자의 시선이 흘깃 성녀를 향했다.

먹먹한 울음을 토해내던 성녀의 숨소리가 일순 뚝 그쳤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듯이.

“……잠깐, 제게 자격이 없다고 하셨나요?”

“그랬을지도.”

“그 ‘자격’이 대체 뭐죠?! 어떻게 해야 이 짓거리를 그만 둘……!”

“스스로 증명하게.”

잔인할 만큼 원론적인 답변이었다.

성녀의 낯빛이 참혹해졌으나, 성자의 어조는 여전히 무뚝뚝하기만 했다.

“그대가 누구인지를…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 단지, 여태껏 누구도 그 길을 걸어 본 적이 없기에 ‘길’이라 부르지 않을 뿐. 무릎 꿇고 애원한다고 해서 없던 길이 생겨나지는 않네.”

“그게 무슨…….”

의문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사내의 몸이 꿈틀, 하고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팍, 하고.

또 다시 성녀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안 돼, 그만… 제발… 이러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그러면서 성녀는 필사적으로 고뇌했다.

무엇을, 무엇을 해야 하지.

무얼 입증하란 말인가.

내가 누구냐고?

‘성녀’라는 허울에 맞추어, 이름마저 저버렸는데!

두 손이 묶여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녀는 불안과 절망에 미쳐 제 손가락을 모조리 씹어버렸거나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쥐어뜯었을 것이다.

아니, 절규하다 못해 제 낯가죽을 손톱으로 그어 버렸을지도.

그렇게 영원 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내는 슬슬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몇 분째 미동조차 없이 엎어져 있을 뿐이었다.

정신적인 죽음이었다.

아무리 육체가 무한히 재생하더라도, 정신이 죽어버린다면 끝장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성녀가 가장 두려워하던 결말이기도 했다.

안 돼, 성녀는 악을 지르는 심정으로 이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

당신은 살아남아야 돼. 나는 죽더라도, 어떻게든 당신만큼은…….

바로 그때.

움찔, 하고 사내의 몸이 꿈틀거렸고.

처음으로 성자의 몸이 흠칫 굳었다.

**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질수록, 무의식의 바다가 범람한다.

이곳은 어디지.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말간 풍경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보면, 나는 어느덧 낯익은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빛이 꺼진 내 눈동자가 주위의 풍광을 훑었다.

몇 번인가 온 적이 있는 장소였다.

거무죽죽한 평원에 온갖 시체가 널려 있었다. 마수부터 시작해서,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괴물과 인간들이 야트막한 언덕을 이루었다.

언제 보아도 기괴한 풍경이었다.

나는 멀거니 시체들을 구경하고 있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대로 주저앉아 버릴까.

어차피 바깥은 나가봐야 아픔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차라리 이곳에 눌러앉는다면, 다시는 바깥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왜 걸음을 옮기고 있는지.

벌써 이유는 잊어 버렸다. 흐릿해진 의식은 파편이 된 언어를 문장으로 세우지 못했다.

다만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아프고 괴롭더라도,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길이 있었다.

그러니까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되고 식은땀이 뻘뻘 흐르더라도.

나는 비틀거리면서 걸음을 내딛었다.

힘들다.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가야 한다. 나는, 멈추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만.”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되찾았다.

척수를 타고 저릿한 전류가 타고 오르는 감각이었다.

꿈속을 부유하던 의식이 단번에 제자리를 되찾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내 눈이 천둥 같은 울림의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칠흑의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바위 위에 걸터앉은 채로, 팔짱을 낀 그의 무심한 금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네겐 너무 이른 상대다, 애송아.”

늘 그렇듯 사내의 혹평에는 거리낌이 없었고, 또 본론을 꺼내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내게 맡겨라.”

그 음색에는 고저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진리를 이야기하듯이,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어조로 단언했다.

“……승리를 가져다 줄 테니.”

사내와 사내가 마주하고 있었다.

시체와 그림자의 대지 위에 서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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