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79화 (479/649)

〈 479화 〉 6. 존재 증명(67)

* * *

지평선 위로 두 사람의 인영(人?)이 나란히 섰다.

해질녘의 세계는 숨이 막힐 듯 고요했다. 황혼이 내린 저녁, 빛과 어둠의 경계가 흐려지자 모든 사물은 그림자로 화했다.

널브러진 무수한 시체도, 사내가 걸터앉은 바위도, 만신창이가 된 내 몸뚱어리도.

기묘한 감각이었다.

망막을 물들이는 풍경화 한가운데, 내가 있다. 마치 저 너머에서 내가 딛고 선 자리를 관조하듯이.

짧은 착각이었다.

비틀거리며 내가 몸을 돌리자, 이내 내 시야가 정상화됐다.

지독히도 무심한 금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 치의 의심이나 불안조차 섞이지 않은 시선이었다.

확신, 혹은 단언.

사내는 내게 승리를 가져다 주겠다고 말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약속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나 또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수백 년 동안 성국을 지켜온 마스터가 아닌가.

삶과 죽음마저 주무르는 그 힘은 가히 신의 권능에 닿아 있다고 할 만했다. 아무리 사내가 강하더라도,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실력과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수백 번의 죽음을 반복한 내 몸뚱어리는 이미 뇌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있었다. 또한 내 마력은 소진될 대로 소진돼, 이제 바닥이 보일 지경이었다.

이처럼 불리한 조건을 두고도 승리를 자신한단 말인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판단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내의 속내가 보일 듯하기도 했다.

여섯 번째 편지가 도착한 이후, 사내는 유독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탐욕’에 의해 벼랑 끝까지 몰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그는 처음부터 성자와의 결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발전을 거듭한 내 육체라면 해볼 만하다는 판단이 섰겠지.

이를 깨달은 내 폐부에 흐, 하고 헛웃음이 들어찼다.

든든하기는 했다. 사내는 허언을 한 적이 없으니, 맡기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더는 수백 번에 이르는 죽음을 경험할 필요는 없었다.

성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싸워야 할 이유도, 이미 닳고 닳은 정신을 일부러 붙잡고 있어야 할 까닭도 없었다.

이대로 눈을 감고 기절하면 된다.

엎어진 채로, 모든 사건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기만 하면 끝이었다.

얼마나 간절히 바라 왔던가.

너무나 아프고 힘들었다. 이미 정신은 너덜너덜해져서,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 또한 인간이었다.

난데없이 내 어깨에 얹어진 짐이 무겁고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구하라거나, 소중한 이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미쳐 버릴 듯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래, 이제 그만.

쉬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애송아.”

다시금 고개를 돌려,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싸늘한 목소리가 고막을 적셨다. 등 뒤에서 무심한 시선이 송곳처럼 틀어 박혔다.

“고집 부리지 마라… 아직 이른 상대라고 말했을 텐데.”

시야가 흐려진다. 후들거리며 떨리는 다리, 또 한 걸음을 내딛자 몸 전체가 갸우뚱 기울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 번 이를 악물고 바로 섰다.

헐떡이는 숨소리 사이로, 수없이 되뇌었던 의문이 뭉게구름처럼 피어 올랐다.

왜 하필 나지?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너로서는 불가능해.”

왜 하필 나여야 했지?

“내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다. 말했을 텐데, 때로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리고 왜 하필, 나는 이 길을 고집하고 있는지.

“설마, 승산 없는 도박에 그녀의 목숨까지 걸 생각이냐?”

“……도.”

되풀이되는 의문에 답해 줄 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문득 떠오르는 유훈이 하나 있어, 내 입술이 무심코 달싹였을 따름이었다.

사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뭐라…….”

“도망치지 않아!”

쾅, 하고 땅바닥을 내리치며.

나는 그렇게 엎어진 채 발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울음인가, 비명인가.

수백 번의 죽음은 내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망가진 뇌리로 짜낼 수 있는 말은, 고작해야 이뿐.

너절한 외침이 울대를 타고 폭발했다.

“비겁하게 굴지 않아! 나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러겠다고……!”

물기마저 서린 울부짖음이었다.

울음 소리가 목젖을 타 넘는다. 여태 억눌러 왔던 비명은 쉬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운명에 짓눌려 익사하기 직전의 인간이, 이 자리에서 절규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사내의 낯빛에 흐릿한 균열이 일었다. 그 무심하던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갈 정도였다.

설마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약속, 약속했는데!”

팍, 하고 재차 땅바닥을 내리치는 손길에 힘이 없었다.

힘 주어 쥔 주먹에는 거친 자갈만이 모였다. 적막의 세계 속을 메마른 소음이 울려 퍼졌다.

여우비가 흙을 적신다.

그것이 내 눈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솔직히 힘들어. 이제 그만 두고 싶다고…….”

“그런데 왜 고집을 부리지?”

내 흐느낌에 응하는 사내의 반문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엎어진 나를 바라보는 그 황금빛 눈동자에, 희미한 의문이 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본능이라 해도 좋았다.

그 또한 ‘나’였으니까.

사내의 추궁이 재차 이어졌다.

“포기해도 된다. 내게 맡기면 돼… 어차피 가지도 못할 길, 남의 등에 업혀 간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

“……내 길이야.”

거친 숨소리를 타고 은은한 열기가 뱉어진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나는 몸부림을 치며 악을 썼다.

노을과 그림자의 세계가 웅웅 울음을 토해냈다.

“내가 골라야 한다고! 그렇게 하나둘씩 포기하다 보면, 내가 고를 수 있는 길은 얼마나 남나?”

“……최선의 길이다.”

“그리고 당신의 길이겠지……!”

치켜든 내 눈동자와 사내의 눈동자가 비로소 맞닿았다.

사내는 여전히 무표정하기만 했다. 심장이 닳고 닳아, 더는 맥박 치지 않는 인조 인형이라도 된다는 양.

그럼에도 나의 절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당신은 무섭지 않았나?!”

아니, 어쩌면 하소연일지도 몰랐다.

심중에 쌓아 두었던 의문이 비명이 되어 터져 나왔다.

“아프지 않았나? 힘들지 않았나? 불합리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나?! 왜, 왜 하필……!”

뚝, 하고 눈물이 흘려 내리는 소리에 맞추어.

내 고개가 풀썩 꺾였다. 다시 아래를 향한 시야가 물기로 아른거렸다.

“왜 하필 나지……?”

진이 빠진 육체는 폐부를 쥐어짜는 작업조차 힘겨워했다. 방울져 뚝, 뚝 떨어지는 눈물만이 흘러 넘친 감정의 흔적을 남길 뿐이었다.

“나는, 나는 어딜 가나 있는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그런데 왜 하필 나야?! 왜 내가 이 모든 고통을 오롯이 감당해야 하냐고!”

“궁금해하지 마라.”

메마른 목소리로, 사내는 그렇게 말했다.

“오직 너만의 고통이라 착각하지 말란 말이다. 모든 이들이 살다 보면 한 번쯤은 그렇게 되묻지. ‘왜 하필 나지?’ 그러나 의외로 이 세상에 이유 따위 존재하지 않고 벌어지는 일은 많아. 그저, 운명이라 생각하는 수밖에…….”

“그래서 받아들였나?”

우뚝, 하고 사내의 말이 멎었다.

깊고 깊은 황금빛 동공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핏발이 서다 못해 실핏줄이 터진 눈, 짓씹은 입술에서 흘러 내리는 한 줄기의 핏물.

처량한 몰골이었다.

“그러니 아프지 않던가?”

간절한 물음이 이어졌다.

제발 그렇다고 하라고.

이제는 아프지 않다고. 익숙해지니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렇게 말해 주기를 바라며, 내가 던진 소망에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송아.”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견뎌냈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내 앞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느냔 말이야!”

숫제 억지에 가까운 분풀이였다.

사내는 언제나 그렇듯 침착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최소한 내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기 전까지는.

"도대체 어떻게에에엑!"

어린아이 같은 울부짖음에 사내의 시선이 흠칫 굳었다.

그의 눈빛에는 명백한 당황의 기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와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감정이었다.

“제발…….”

흐느끼면서, 나는 힘없이 애원했다.

“제발, 알려줘… 어떻게 하면, 도망치지 않을 수 있는지.”

사내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달싹이기를 몇 번.

그는 드물게도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던가.

내가 사내에게 직접 부탁을 건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탓인지, 사내의 낯빛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갈등, 분노, 후회, 그리고 체념.

한숨을 내뱉으며, 사내는 결국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너와 달라. 더는 아플 자리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 많은 상처를 받아왔을 뿐이니. 이제 와서 몇 사람을 더 잃든 간에, 내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는 않지.”

“그렇다면…….”

내가 암담한 표정을 짓기 직전.

사내가 회상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래… 나도 언젠가는, 너처럼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군.”

그러면서 사내는 서서히 검지를 치켜들었다.

빛과 어둠조차 분간할 수 없는 세계, 손가락이 노을의 저 너머를 가리킨다.

내가 걸어가고 있던 방향이었다.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저곳으로 가라… 네가 원하던 기억이 있을 테니.”

나는 멍하니 사내의 손가락과 저 너머를 번갈아 보다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다. 실제로 두어 번쯤 엎어지니 온몸이 비명을 내질렀다.

포기해도 될 텐데, 무너져도 될 텐데.

왜 굳이 고집을 부리냐며 나를 책망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럼에도 나는 기어코 두 발로 땅을 딛고 섰다.

내가 다시 비척이는 걸음을 내딛었을 무렵, 사내의 나지막한 경고가 이어졌다.

“……아픈 꼴을 당할 거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던 말이었다.

내 눈이 흘긋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낯빛을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넌 세상에 도전하고 있는 거야… 그 길의 끝에서는, 필연적으로 경계의 저편이 기다리고 있지.”

내 흐릿해진 동공이 정면을 향했다.

까마득한 길이었다. 아직 끝조차 보이지 않는 저 지평선 너머에, 나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휩쓸리지 않을 수 있겠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숨을 고르며 걸음을 내딛었을 따름이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리를 질질 끌며 걷고 걷다 보니, 어느새 주위에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그 말간 빛의 끝.

낯익은 사내가, 어린아이처럼 울고불고 있었다.

온 세상을 원망하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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