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0화 〉 6. 존재 증명(68)
* * *
“절대 안 돼!”
짙은 어둠이 깔린 밤이었다. 나는 야트막한 비탈길에서, 어느 여인에게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거절이라기보다 절규였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나의 간절한 어조에서 여인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만 쓸쓸하면서도 애틋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인이 머금은 희미한 미소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더욱 간절히 성대를 쥐어짜며 외쳤다.
“안 돼, 안 돼, 안 돼…이곳에 남겠다고?! 저 지평선을 봐! 규모조차 추산되지 않는 대공습이야… 혼자 남는다면 반드시 죽는다고!”
“제가 남지 않으면요?”
연민이 가득 담긴 어조로, 여인은 애달픈 미소를 지으며 내게 되물었다.
“그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을까요? 그리고, 그들이 없는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되죠?”
“어떻게든…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이성 따위는 진작에 갖다 버린 지 오래였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여인의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이곳에서 패주한다면 단순히 수만에 이르는 정병을 잃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동부를 담당하는 전선이 완전히 무너질 테고, 인류는 마지막 저항을 준비할 틈도 없이 동부에서 달려온 암흑교단의 대군을 맞이해야 할 터였다.
그럼 끝이다.
이 명백한 결론에도, 나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떼를 쓰고 있었다.
“제발, 이러지 마. 당신도 잘 알잖아… 내게는 당신이 제일 소중하다는 사실을. 내가, 내가 어떻게 당신 없이 살라고…….”
“저 또한 누구보다 당신이 소중해요.”
망설임조차 없이 내뱉어진 고백이었다.
나는 일순 말문이 막혀서, 창백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아야 했다.
달빛이 내리쬔다.
어둠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말간 조명은 오직 내 앞의 여인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언젠가 술을 마시고, 입을 맞추었을 때도 이랬었는데.
그런데 어째서, 오늘은.
분한 마음에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데, 울컥이며 차오르는 습기가 가슴을 먹먹하도록 틀어막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뺨을 쓸어내린다.
애정과 위로를 가득 담은 손길이었다.
어느덧 여인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을 도망자나 비겁자로 만들 수는 없어요… 나는 알아요, 이안. 당신이 언젠가 이 선택을 후회하리란 사실을.”
“……왜, 왜?”
토막 난 의문만을 반복적으로 뱉어졌다.
한계까지 치달은 감정이 뇌를 잠식한 지 오래였다. 제대로 된 물음을 토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윽고 절망과 아픔으로 범벅이 된 토로가 이어졌다.
“왜 하필 당신이어야 하지?”
“글쎄요.”
“이까짓 게 운명이야?! 그 잘난 천신의 뜻이, 고작 이거냐고!”
“……이안.”
“단 한 번만이라도!”
팍, 하고 터져 나온 고함은 귀가 먹먹할 만큼 높고 컸다.
나는 그조차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가슴을 쾅쾅 내리쳤다. 차라리 멍이 들어 갈비뼈가 부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더는 심장이 아프지 않을 테니.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이 뜨거웠다. 미처 토해내지 못한 감정이 열이 되어 흘러 내렸다.
내게도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아있던가.
또 다시 나는 여인에게 새로운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그 점이 못내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러워, 내 목에서 물기 섞인 절규가 부르짖어졌다.
“단 한 번만이라도, 허락해 줄 수는 없는 거야……? 모두 잃어 왔다고… 전부 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런데, 그런데 이젠 당신까지 잃으라고?!”
“이안…….”
“왜 하필 나야!!!”
주륵주륵 흐르는 눈물이 뺨을 흠뻑 적셨다.
울음 소리는 어째서 새어 나오기만 하는가.
목 놓아 울지 못하는 나이가 돼버린 나는, 감정의 격류를 이기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왜 하필 나여야 하지?! 내가 아닌 누구라도 좋았잖아! 왜 하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 왜 나만 소중한 사람들을 모조리 잃어야 하냐고……!”
절망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사내 하나가 흐느끼고 있다.
한때는 감정이 마모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명은 늘 그렇듯 내 오만을 무참히 깨트리러 찾아왔다.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내 마음을 감히 누가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여인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살짝 상반신을 낮추더니, 마찬가지로 물기에 젖은 속삭임이 이어졌다.
“미안해요, 이안. 나까지 당신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서…….”
“……신이, 신이 있다면.”
울먹이면서, 나는 늘 품고 있던 의문을 내뱉었다.
대기에 짙은 습기가 깔린다.
“왜 우리를 구하지 않지? 왜 내게 이렇게 잔인한 운명을 부여한 거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여인은 나를 말없이 품에 안았다.
따스한 온기, 달콤한 향기, 부드러운 감촉.
이 모든 것이 마지막이란 말인가.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 나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제발, 제발 대답해 줘…….”
“글쎄요.”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었다.
신은 대답이 없다. 그러니 신을 섬기는 이들 또한 모든 것을 단언하기는 힘들었다.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말이 이보다 원망스러울 수는 없었다.
나를 불구덩이 한가운데 처박아두고, 대답조차 없는 이를 신이라 섬겨야 한단 말인가?
이성을 잃은 나는 막무가내로 증오를 토해냈다.
"어떻게, 어떻게 신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지?! 나는 싫어…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이토록 비참한 운명만을……!"
그러나 내 말문은 오래 지나지 않아 막혀야 했다.
폭, 하고 내 머리가 여인의 품속에 한껏 파묻혔다.
숨조차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당연히 내 말이 더 이어질 리는 없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뿌리칠 수 있겠다만은.
도저히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바짝 곤두서 있던 내 몸에 급속도로 힘이 빠져 나갔다.
애달픈 미소를 지은 채로, 여인은 나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왜 하필 우리일까요? 가장 신뢰하던 가족한테 배신 당하고, 상처 투성이가 돼서 죄를 갚고 죽을 날만을 기다렸는데… 왜 하필 당신을 만나, 이렇게 사랑을 하고… 당신이 너무나 좋아져서,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도리어 당신에게 상처를 줄 결단을 내리고 마는 걸까요.”
“나는, 나는…….”
말조차 제대로 토해내지 못하며, 나는 여인의 품속에서 숨죽여 울었다.
성녀의 앞섬이 내 눈물에 젖고 있었다.
그리고 따스하고 자상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함뿍 적신다.
“이안, 당신은 내게 구원이자 축복이에요.”
나도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울음에 잠긴 성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애정을 가득 담은 속삭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 가슴을 톡톡 두드리듯이, 맑고 아리따운 음색으로 노래하며.
“당신을 만나 사랑을 알았어요. 행복을 되찾았고, 다시 한 번 누군가를 믿을 용기를 얻었죠…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감사해요, 이안.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난, 나는…….”
“당신은 어땠나요?”
흐릿한 눈웃음을 지으며, 여인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날 만난 것이 원망스럽나요? 그래서 아직도 주의 뜻이 마냥 밉고 싫기만 한가요?”
그 연분홍빛 눈동자 앞에서 어찌 거짓을 고할 수 있을까.
결국 나는 더 이상 악을 쓰지 못했다. 얌전히 흐느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 내게도… 당신은, 기적이자 축복이었어…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하지만 상처는 금세 낫지 않는다. 이미 오랜 시간 신을 원망해 왔던 나였다.
아직 남은 앙금은 한참이나 있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나는 여인에게 원망을 토해냈다.
“너무, 너무 잔인하잖아… 이제야 겨우 되찾은 행복인데, 이렇게 앗아가다니……!”
물기 어린 의문이 재차 이어졌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무심코 내 호소에 섞여 나왔다.
“이래도 ‘순명’해야 하는 거야……? 이딴 게, 이까짓 게 바로 주의 뜻인가?”
여인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풋, 하고 살포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나를 밀치더니, 상냥한 눈짓과 함께 뒷짐을 지었다.
이윽고 여인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달은 밝았다.
그녀와 함께했던 밤들이 늘 그랬듯이.
“이안, 예전에 내가 당신에게 해준 말이 있었죠? 아프고 힘든 일을 겪더라도 ‘순명’해야 한다고.”
오래 전의 기억이었다.
아직 나와 여인이 친해지기 전, 야밤의 대작에서 그녀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가족과 영지를 잃은 귀족 앞에서 ‘순명’하라니.
일부러 미움을 사려 했기 때문이라 여겼다. 이는 아마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여인의 핀잔에는 마냥 거짓만 섞여 있지는 않았으리라.
새하얀 손가락이 내 이마를 짚는다.
“당신의 운명이 비참하고 비루한가요? 당신을 덮친 비극과 시련이 너무나 잔인해서, 무너지고 쓰러지고 싶나요? 도망치고 도망쳐서,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고 싶나요?”
짐짓 엄숙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성녀의 손가락이 서서히 아래를 향했다.
나의 흉부 아래, 명치 부근을 짚는 가녀린 검지.
“그렇다면 특별히,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당신에게만 주의 뜻을 일러 드리죠.”
그 손짓이 하나.
손가락의 궤적을 이어붙이니, 종으로 그어진 선이 나타났다.
그리고 달콤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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