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1화 〉 6. 존재 증명(69)
* * *
“……무너지지 마세요.”
기적이었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전장의 참상으로 참혹하게 스러졌던 숲의 생물들이 다시 움을 트고 있었다.
부러진 나무가 재생한다.
쓰러진 풀들이 다시 몸을 바로 세우고, 향긋한 꽃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덜덜 떨리는 내 눈이 성녀를 올려다보았다.
신성한 빛에 둘러싸인 여인은 장난스러운 호선을 머금고 있었다.
아니, 또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쓰러지지 마세요. 절망하지 말고, 포기하지도 마세요.”
어디선가 새 소리가 울려 퍼진다.
자라난 숲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메마른 비탈길이 우리 둘만의 비처로 변모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 몇 초, 혹은 그보다도 짧은 시간.
어느덧 빛무리가 춤을 추고 있었다.
반딧불이였다.
“때로는 운명이 당신을 짓밟고, 내팽겨치고, 모욕을 주고 침을 뱉겠죠… 설령 그러더라도 부러지지 마세요.”
“왜, 왜…….”
그래야만 하냐고.
신은 왜 이토록 잔인한 운명을 예비해 두고, 우리에게 꺾이지 않을 것을 바라느냐고.
무어라 반박이라도 내뱉고 싶었다.
울고불면서, 신 앞에 억지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엇이든 괜찮으니까, 제발 그녀만큼은 내게서 앗아 가지 말아 달라고.
하지만 나는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아서.
그리고 여인의 마지막 부탁을 가슴에 새겨두고 싶어서.
내겐 그녀가 이 세상 전부와 같았으니까.
이윽고 멈춰 있던 여인의 검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내 왼쪽 어깨를 툭, 하고 찌르는 손가락.
나는 그제야 그 손짓의 의미를 깨달았다.
“운명에 패배하지 마세요. 몸부림치고, 발버둥 치세요. 이것이 바로…….”
툭, 하고 여인의 검지가 마지막으로 오른쪽 어깨를 건드린다.
성호였다.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여인은 조용히 내 턱을 붙잡아 시선을 강제로 맞추었다.
언제나 도도하고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사랑과 애정으로 범벅이 되어서, 애처로운 미소를 짓는 여인의 눈가에 희미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주의 뜻입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여인은 서서히 내게 다가와 입을 맞추었고, 찰나와 영원 같은 시간이 흘렀다.
끝내 여인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를 믿나요, 이안?”
그 짤막한 물음에 나는 금세 수천 가지의 대답을 떠올렸으나.
기껏 끅끅대며 내뱉은 말은, 고작해야 한 마디뿐.
“……임마누엘(immanuel).”
부디 주께서 함께하시기를.
**
일대 소란이 일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산상법정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판관들마저 심각한 낯빛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움찔, 하고 사내의 손가락이 움직인 직후였다. 쓰러진 사내는 아직 몸을 일으킬 기미가 없었다.
무려 수백 번에 달하는 죽음을 경험한 뒤였다.
몸이 얌전히 말을 듣는다면 그 편이 더 이상했다. 모든 생명은 살기를 바라고, 가장 깊숙한 곳에 죽음을 기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왜.
탁, 하고 사내가 이를 악물고 내딛은 발은 그대로 디딤돌이 되었다.
손으로 무릎을 억누른다. 짙은 신음과 함께, 사내의 몸이 비틀비틀 일으켜지고 있었다.
이미 수없이 반복된 광경이었다.
언제 보아도 감탄이 나오는 정신력이기는 했다. 하지만 벌써 수백 번이나 증명된 바 있는 사실에 수만에 이르는 인파가 동요를 보일 이유는 없었다.
만약 그래야 할 까닭이 있다면, 오직 하나.
무언가 다르다.
아직 명백한 증거는 없었지만, 이 자리에 선 모두가 직감하고 있었다. 수만에 달하는 인파가 의견을 나누는 소리가 산상법정을 뒤덮었다.
이는 성자의 모습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넋을 놓아 버린 성녀를 뒤로 한 채, 성자는 깊이 가라앉은 눈동자로 이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파직, 하고.
어디선가 희미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이러한 점까지 포함해서, 성자는 사내의 몸짓 하나하나를 시야에 담았다.
자그마한 손짓에 불과했다.
몸을 일으키는 와중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그럴 때마다 땅을 내리치듯 주먹으로 지지대를 세워,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는 그 처량한 몰골.
하지만 그 와중에 수 차례나 주위의 마력이 반응했다.
고개를 떨군 사내가 자세를 바로 잡고, 호흡을 가다듬는 그 짤막한 틈새.
사내의 숨소리에 호응한 대기가 별의 가루를 흩뿌렸다.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만물이 그 의지에 호응하는 경지.
이채가 성자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미동조차 않은 채, 사내의 온전한 기상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사내가 다시금 고개를 치켜든 찰나.
몰아닥친 질풍이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높이 솟구쳤다.
“꺄아아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군중 사이를 가득 메우며 터져 나왔다.
팍, 팍, 팍!
백열하는 세계가 웅장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내를 중심으로 허공에 무수한 별빛이 어린다. 밤의 장막이 다가올수록 그 빛은 더욱 찬란히 빛나리라.
마치 밤하늘을 등진 듯한 풍경이었다.
지상에 강림한 은빛의 은하수, 그 사이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별은 따로 있었다.
그 중심에 위치한 사내의 눈동자였다.
금빛의 광채가 사내의 망막을 넘어 일렁이고 있었다. 이는 무인이 어떠한 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성자의 입에서 흐, 하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이 익스퍼트.”
그 담백한 감상에 산상법정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하이 익스퍼트가 어떤 경지인가.
마스터를 진정으로 앞둔 강자들만이 그 명예로운 호칭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심상이 현실을 압도하여, 세상의 법칙을 왜곡시키는 단계에 다다랐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륙을 통틀어 대략 스무 명 남짓.
그 명단의 마지막 줄에 또 하나의 이름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수백 번의 죽음 끝에, 비로소 심상을 각성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성자는 미심쩍은 시선을 지우지 못했다. 아무리 한계에 다다르는 경험을 했다지만, 하이 익스퍼트는 만만한 경지가 아니었다.
손도 못 쓰고 당한 이가 닿을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최소한 수천 번, 혹은 수만 번은 더 죽어야 되리라 생각했는데.
그러던 성자의 하늘빛 눈동자가 어디 지점에서 멎었다. 이안의 품속에서, 무언가가 웅웅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칠흑의 막대.
옷 속에 숨겨져 있다고 해서 성자의 오감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제야 성자는 깨달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경계 너머를 볼 때 도움을 주는 물건이었다.
이처럼 귀한 물건을 어디서 전해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칠흑의 막대는 착실히 주인의 뜻에 호응하고 있었다. 그 도움으로 '진리'를 보았으리라.
이윽고 닫혀 있던 성자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하늘빛 눈동자가 어느덧 희열로 물들어 있었다.
하이 익스퍼트에 달한 무인은, 비로소 심상의 진정한 힘을 깨우친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법칙을 한정적이나마 뒤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과연 저 사내의 심상은 어떤 기적을 보여줄 것인가?
실로 오랜만에 성자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후후, 무수한 죽음의 끝에서 진리의 편린을 목격했습니까? 좋지요.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자, 오십시오!”
사나운 미소를 머금으며, 성자는 흥에 겨워 두 팔을 벌렸다.
선공을 양보해 주겠다는 신호였다.
절대적인 자신감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제안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성자는 단 한 번도 상처를 입은 적이 없었다. 아니, 상처를 입기는커녕 옷깃조차 베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온 대륙의 실력자들이 가르침을 청해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수십 년 전, 검에 미친 꼬맹이 하나만이 성자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혔을 뿐.
'명예 재판' 또한 성자의 무패 신화에서 예외는 되지 못했다.
명예 재판이 시작된 이후, 성자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아무도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상관 없었다.
성자는 단 한 번도 무기를 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전력을 보일 만한 상대가 없었다는 의미였다.
아마 오늘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한 판단과 함께, 성자는 기대감으로 몸을 잔뜩 긴장시켰고.
팍, 하고.
제 몸을 관통하는 은빛의 궤적을 목격했다.
어떻게?
일순 성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위해서는 미세한 시차가 필요했다.
상대는 자세조차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당연히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하물며 이만한 거리를 단숨에 주파해서, 검격을 날리다니.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또 그 외의 가능성을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직전까지 사내가 서 있던 자리는, 텅 비어 바람만이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서서히, 성자의 시선이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사내 하나가 성자를 등지고 서 있었다. 온 몸의 힘을 마저 불태웠는지, 숨을 헐떡이며 풀썩 무릎을 꿇으려던 참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럴 수가.
마치 악의적인 장난에 당한 느낌이었다. 사내가 검을 뽑고, 걸음을 내딛어, 저 자리에 도달할 때까지의 장면 하나하나를 누군가 일부러 지워버린 것만 같았다.
오로지 공세의 시작과 끝만이 남아 이어 붙여졌다.
그러지 않고서야, 성자의 눈을 피할 수는 없을 텐데.
찰나를 찰나로 쪼갠 시간 동안 이어진 성자의 고민은 이윽고 종언을 맞이했다.
핏물이 팍, 하고 터져 나오고.
“……성자께서 피를 흘리신다!”
경악에 가득 찬 아우성이 산상법정을 뒤흔들었다.
명예 재판이 시작된 뒤로 처음.
성자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