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2화 〉 6. 존재 증명(70)
* * *
세계가 찬란한 은빛으로 물든다.
별빛의 파도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하나같이 색채를 잃어갔다. 채도와 함께 운동량을 빼앗긴 만물이 서서히 그 속도를 줄여갔다.
종래에는 모든 것이 정지한다.
무채색의 시야, 힘의 진공 상태 속에서 오직 나만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망막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금빛의 마력이 넘실거리며 내 시각에 낯선 정보를 기입했다.
무수한 궤적과 시공의 실선들.
여태껏 내가 보아 왔던 세상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전투 때마다 목도해 온 가상의 궤적과 공간의 실낱들은, 이 풍광을 인지하기 위한 포석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이조차도 피상적인 인식에 불과했다.
세계의 진정한 실체는 이 너머에 위치하고 있었다. 찰칵, 하고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통째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시선이 느껴진다.
무수하면서도 단일한 존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덧 끝없는 공허가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를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가 감히 올려다 볼 수조차 없는 영역이었다. 무구한 힘의 급류가 소용돌이 치며 온갖 천재지변을 낳고 있었다.
지진, 해일, 태풍, 그 외에도 인류가 감당하기 힘든 대자연의 진노들.
그야말로 그 한계를 알 수가 없었다. 감각이 확장될수록,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있어 얼마나 티끌만도 못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지를 강제로 깨달아 갔다.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이곳은 어디지? 나는 누구지?
너무나 예민해진 감각은 온 세상을 하나로 묶어 인지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나의 존재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느덧 나는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내게 내리쬐는 수많은 시선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얼어붙은 몸뚱어리로부터 의식이 점점 더 멀어져 갔다.
휩쓸린다.
본능적인 위기감이 머리를 스쳤으나, 나는 어찌할 도리를 모르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생물로서의 본능이 무너져 내리며, 이전에는 당연하기만 했던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근육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호흡은 어떻게 조절하고, 세계와 ‘나’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는가.
그 무엇 하나 당연한 사실이 없었다. 흐름은 도도하지만, 아무런 원인 없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새로운 관조가 자아를 파괴하고 재창조하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숨소리조차 막연하다.
진리의 바다는 무심히 파도치고 있었다. 그 밀물과 썰물에 맞추어 내 의식 또한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일개 인간의 정신력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문득 탈력감이 엄습한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끝일 텐데, 모든 것이 부질 없는 발버둥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불현듯.
“……무너지지 마세요.”
어떤 속삭임이 귓가를 스친 듯했다. 희미해지던 정신이 단숨에 각성했다.
어디지, 어디서 들려온 말이지.
시야가 되돌아온다. 나는 무채색의 세계를 딛고 서 있었다.
수만에 달하는 인파도, 드높은 절벽의 판관들도, 심지어는 성녀와 성자조차 미동하지 않는 정적의 땅.
내 등 뒤에 어느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피로에 젖은 금빛 눈동자가 무심히 나를 향했다.
“맞설 수 있겠나?”
내 눈이 다시금 세계의 뒷면을 향했다.
휩쓸리지 말라고 했던 사내의 조언이 단박에 이해가 갔다. 단 한 번이라도 목격한다면, 마땅히 자아를 잃고 저 흐름의 일부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솔직히 말해 쉽사리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검 손잡이를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경련은 이내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아프고 힘들다.
이것이 정녕 내가 가야 하는 길이란 말인가?
눈물이라도 흘리며 징징거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져 내릴 수는 없었다.
결의를 다진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이야말로 심상을 이루는 근간이었다.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은빛의 오러가 다시금 찬란한 빛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별의 조각들이 알알이 허공에 틀어박히며 내 검을 이끌었다.
그 인도에 맞추어 검극을 바로 잡기 직전.
못내 버리지 못한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나아가야 하지?”
한동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속내를 알 수 없는 눈길로 나를 묵묵히 응시하다가, 사내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한 걸음을 내딛어.”
그렇게 내가 걸음을 내딛은 직후.
“그 후에는, 맞서지 말고.”
세계가 암전한다.
질풍이나 빛살이라는 뻔한 비유조차 모자란 감이 있었다. 검은 하나의 직사광선이 되어 성자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나는 어느덧 헐떡이며 무릎을 땅바닥에 맞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세계가 색채를 되찾는다.
팍, 하고 핏물이 터져 나오는 소리.
“……성자께서 피를 흘리신다!”
온 산을 뒤흔드는 경악성, 뒤늦게 찾아온 검격의 여파가 전신의 근육을 쥐어짜냈다.
신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울컥, 하고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핏물을 억지로 삼켜냈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내 이가 악물어졌다.
얕았다.
은빛의 오러가 일렁이는 내 검은 강철조차 푸딩처럼 자를 예기를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자를 참할 때의 감촉이 너무나도 얕았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살점이 강철보다 단단할 수 있단 말인가.
어서 몸을 일으켜서, 다음 충돌을 대비해야 하는데.
어디선가 더듬더듬 내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 눈이 서서히 정면을 향했다. 맑아져 오는 시야와 함께, 뚝뚝 내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이슬이 느껴졌다.
성녀였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듯, 그 연분홍빛 눈동자에서는 끊임없이 물방울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울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이 끅, 끅, 하고 억눌린 신음을 토해 냈다.
힘들었구나.
이상했다. 온몸이 아프다고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는데, 이제 힘들어서 그만 두고 싶다며 울고불고 했었는데.
성녀의 눈물을 보자마자 그까짓 고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고개를 떨군 채, 눈물만 뚝뚝 흘리는 성녀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왜, 왜… 흐윽, 그랬어요…….”
온몸에 힘이 빠진 나는 숨을 헐떡이느라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는 내 모습을 본 성녀의 울음은 더욱 짙어져 갔다.
“아, 아프잖아요… 힘들잖아요, 진작 포기하고 싶었을 텐데… 왜, 왜애……!”
꾹꾹 눌러 담은 의문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아마도 성녀의 숨김 없는 본심이겠지.
비통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멋 모르고 들떠 우쭐거리기만 했던 고아 출신 계집애에 불과해요! 나, 날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그 어디에도!”
“당신을 믿으니까요.”
흠칫, 하고 성녀는 몸을 굳혔다가.
이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내가, 내가 ‘성녀’라서……?”
“당신이니까.”
나는 흐, 하고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그렇게 단언했다.
직전까지 울컥이며 차오르던 핏물이 잠잠해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기도 힘들었는데, 내 목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평온해져 있었다.
일종의 허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내 눈앞의 여인을 믿고 있었다. 곧은 의지를, 그리고 약자를 향한 진심을 신용했다. 누군가 내게 천신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이제 와서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신이 아닌 한 명의 인간을 믿었다.
또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기적을 믿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성녀’든, 고아 출신의 울보 아가씨든… 당신이잖습니까.”
연분홍빛 눈동자에 다시금 눈물이 핑 도는가 싶더니, 이내 성녀는 엎어진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고 있다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성녀와의 해후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이 너무나도 강해서.
나는 검을 움켜쥔 채 온몸의 근육을 팽팽히 당겨야 했다.
그러고 웅성거리는 소음 사이로, 폭발.
“으흐, 후후… 하하하하하하하하하!”
터져 나온 웃음 소리가 웅웅거리며 대기를 진동시켰다.
땅이 울리고,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고, 수만에 달하는 인파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온갖 소음이 뒤섞인다.
피어오르는 마력이 아지랑이를 이루었다. 녹아내리는 풍광 사이로, 나를 내리쬐는 창백한 안광.
일순 시야 위를 명멸하는 눈동자가 가득 채우다 사라졌다.
이만한 위압감, 나는 벌써부터 떨려 오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성자가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가 입은 법복의 옆구리는 날붙이에 찢겨 너덜너덜했다. 핏물을 머금은 천이 한때 그의 몸에도 상처가 나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지만.
흥분과 기쁨에 젖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과연 주께서 빚으신 세상은 끝없이 경이롭도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형제여?! 어떻게 이 모자란 종의 눈을 피해 갈 수 있었냔 말입니다!”
헐떡이는 숨소리, 들뜨다 못해 핏발마저 선 눈동자가 성자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의 낯빛에 희열이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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