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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83화 (483/649)

〈 483화 〉 6. 존재 증명(71)

* * *

“아니, 아니… 실례했군요. 그대도 이제 ‘진리’를 본 바, 그까짓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겠죠. 그렇다면 우리의 대화 방법은 오직 하나뿐!”

쾅, 하고 사내가 내던진 쇠막대가 땅을 파고들자 수십 미터에 이르는 흙먼지가 기둥처럼 솟구쳤다.

지반이 쩌적, 하고 갈라지며 군중들의 눈에 희미한 공포가 떠올랐다.

자칫하면 오랜 역사를 이어 온 산상법정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성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아니.

살짝 정신줄을 놓기만 해도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육체, 그래… 육체로 대화합시다! 어서 오십시오, 심상의 세계에!”

마치 무기가 구속구라도 되는 양, 쇠막대를 내던진 성자의 얼굴을 홀가분하기만 했다.

기대로 부푼 표정을 짓는 소년의 낯이 해맑았다. 재미있는 놀이를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몸을 바짝 굳혀야 했다. 단 일순간의 방심조차 허용되지 않는 전투가 이어지리라.

내가 자세를 바로잡자, 엎어진 채 눈물을 뚝뚝 흘리던 성녀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이안,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당신 몸은, 이미 만신창이……!”

“이 또한 주의 뜻입니까?”

언젠가 입에 담은 적이 있던 질문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을 터였다.

‘탐욕’도, 유렌도, 심지어는 우리가 예전에 맞섰던 길포드조차 이러한 의문을 품었을 테지.

천신은 어디에 계신가?

그는 왜 우리를 구하지 않는가.

사실 성녀가 대답해 주기를 바라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다만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은 목소리가 하나 있어서.

“그렇다면, 순명(??)해야지요.”

무어라 반론을 제기하기도 전이었다.

나는 한 걸음을 내딛었고, 성자는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응시했다.

한 번 더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뜻이었다.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내가 하아, 하고 숨을 내뱉고 들이마신 직후.

다시 은빛의 파도가 세상을 휩쓸고 지나간다.

하나둘씩 멈추기 시작하는 만물, 허공의 빈 자리로 떠오르는 무수한 별빛들.

나는 이를 악물고 또 한 걸음을 내딛었다.

삭제.

공간과 함께 과정이 소실했다.

어느덧 나는 성자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미동조차 없는 성자의 낯에는 여전히 희열에 젖은 미소가 맺힌 채였다.

벌써 두 번째.

이 정지한 세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심지어 이마저도 각성 직후라서 어떻게든 가능한 수준이었다. ‘진리’를 본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내가 이 세계에 머물 수 있는 기간도 짧아지리라.

상관 없었다.

지금만 끝을 보면 됐다. 성녀를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칼날을 타고 은빛의 불길이 넘실거린다. 지난 참격은 얼떨결에 이루어진 탓에 다소 얕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지만, 또 다시 실수를 반복할 만큼 나는 멍청하지 못했다.

깊이 들어가야 한다.

최소한 내장이 상할 정도. 그렇지 않으면, 이 괴물을 무너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력을 다해서. 아니, 그 이상이어야 했다.

으득, 하고 악물어진 이가 파쇄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한 일격이, 무채색으로 물든 세계 속에서 은빛의 열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때였다.

우드득, 하는 묘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시에 내 몸이 정지했다.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내 시선이 황급히 소음의 진원지를 쫓았다.

빛이 돌아와 있다.

성자의 하늘빛 눈동자는 어느덧 제 혼자서 색조를 되찾은 채로, 내 검로를 쫓고 있었다. 멈춘 세계 속에서 희미한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내 정신이 일순 멍해졌다.

어떻게.

내 심상은 가속 따위로 설명 가능한 능력이 아니었다. 완전히 정지한 시간 속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텐데.

그래, 분명히 그럴 텐데도.

성자의 미소가 소름이 끼칠 만큼 짙어지고 있었다.

달싹이는 입술이 느린 음파를 전달했다.

‘잡았다.’

그리고 다시 흐르는 시간 속.

성자의 팔이 시공을 찢어발기며 검을 내지르는 내 팔을 움켜쥐었다.

지친 몸뚱아리는 훅, 하고 잡아당기는 인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아차, 하는 사이 나는 어느덧 성자의 등에 업혀져 있었다.

낯익은 연속 동작이었다.

뒤이어질 충격을 직감한 내 몸이 마지막 발악이라는 듯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무기를 버린 성자의 근력은 내 상상을 아득히 상회하고 있었고, 최후에 언뜻 하늘빛 눈동자를 마주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느덧 세계가 반전해 있었다.

성국 비전, 달 뒤집기.

운석이 떨어진 호수처럼, 지반이 출렁이며 폭발했다.

**

또 다시 한 줌의 핏물이 질퍽이며 허공을 날았다.

이제는 형체조차 갖추지 못한 죽음이었다.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고 있던 성녀의 정신이 붕괴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악! 그, 그만해! 안 돼, 안 돼, 제발… 이안. 이러지 말아요!”

그야말로 압도적인 풍광이었다.

말 그대로 세상이 뒤집혔다.

메쳐지던 이안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일순간에 불과했지만, 이 자리에 서 있던 모두가 목격했다.

세상 그 자체가 뒤집어졌다.

성자는 이안을 땅바닥에 내팽겨치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 위에 처박아 버렸다.

고작해야 인간의 몸뚱어리다.

행성 하나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온몸의 혈관이 터져 나가고, 뼈와 근육이 질척한 반죽이 되어 뒤섞였다. 코와 입에서는 핏물과 뇌가 뒤섞인 액체가 뿜어져 나올 정도였다.

참담한 몰골이었다.

지금껏 보아 왔던 죽음 중에서도 단연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참상이었다. 성녀가 두 눈을 가린 채 비명을 내질러도 하등 이상하지 않았다.

이안이 하이 익스퍼트에 도달했다지만, 마스터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승패의 행방은 명백했다. 단 두 번에 걸친 공수교환 끝에, 또 다시 성자는 완전한 승기를 잡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하지만 이안을 고꾸라트린 성자는 멍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반에 수십 미터에 달하는 구덩이가 생긴 직후, 그의 어깨에 뒤늦은 자상이 생겨났다.

팍, 하고 터져 나오는 핏물.

성자의 눈이 서서히 하늘 위를 향했다. 그곳에는 은빛의 궤적을 그리며 쏘아진 손도끼가 빙글빙글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넋 나간 중얼거림이 소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분명, 죽었을 텐데…….”

달 뒤집기에 직격당한 이안의 몸은 조각 날 틈도 없이 으깨졌다. 당연히 손도끼를 던질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던졌다.

그것이 성자의 몸에 두 번째 상처를 남겼다. 마스터에 오른 이후, 이만큼 깊은 상처를 입은 적은 손에 꼽았다.

끽해야 검에 미친 그 꼬맹이 정도나 중상을 입혔던가.

하지만 성자가 놀랄 만한 일은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허억, 허억, 하고.

장대한 여파를 남긴 폭심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문에 찬 하늘빛 시선이 그 진원지를 향했다.

만신창이가 된 사내 하나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영혼이 떠나기 전, 육체는 착실히 복구시켜 두었다. 하지만 연이은 전투의 여파로 곧장 몸을 일으킬 정도는 되지 않을 텐데.

저 사내가 물리적인 법칙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었다.

마치 삶과 죽음을 뒤집는 성자처럼.

몇 초나 되는 침묵 끝에, 성자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렇군.”

큭큭, 하고 성자의 성대를 긁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그것이 그대의 심상이었군요, 형제여! 죽어도, 죽어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 그것이 죽어 마땅한, 움직이지 못해야 할 현실마저 뒤틀고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탄성과 함께 분위기가 일변했다.

툭, 투둑, 투두둑.

성자의 몸이 급격히 부풀기 시작했다. 그의 상체를 가리고 있던 법복이 커지는 몸집을 감당하지 못해 터져 나갔다. 탄탄한 근육이 성자의 척추를 강제로 곧추 세웠다.

한계까지 팽창한 육체는 비현실적일 만큼 근육질이었다. 온몸의 근육이 부풀고 부풀어, 더는 성장할 수 없게 된 뒤에야 성자의 변신이 일단락되었다.

2m를 훌쩍 넘는 장신.

그 넓은 면적을 가득 채운 근육의 향연은 신이 전쟁을 위해 직접 빚은 조각과 같았다. 그야말로 전신이 흉기, 육체를 무한정으로 단련하는 무투가들의 궁극에 어울리는 몸이었다.

몸집과 함께 성자의 목청이 더욱 우렁차졌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심약한 몇몇은 귀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였다.

“허나, 하나의 심상은 하나의 기적밖에 담지 못할 텐데! 어떻게 시간을 정지할 수 있었는지, 참 의문입니다만… 좋습니다! 그대라면 이 미천한 종의 진심을 받아낼 만한 자격이 있지요!”

하늘빛 안광을 불태우며, 성자가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취하는 자세가 웅혼한 기세를 퍼트리며 세계를 진동시켰다.

웅웅웅!

빛과 열, 바람을 비롯한 온갖 힘들이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전조만으로도 심상치 않았다.

이안은 덜덜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려 했으나, 울컥 토해지는 핏물이 그보다 먼저였다.

흐릿해진 눈동자가 성자를 향했다.

“자랑스럽게 여기셔도 좋습니다… 이 일격을 마지막으로 받아낸 이는, 수십 년 전에 단 하나! 검에 미친 제국의 꼬맹이를 제외하면, 당신이 유일합니다!”

이글이글 들끓는 목소리에 다시금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의 혼란이었다. 성자가 말한 ‘수십 년 전의 사건’을 모르는 이 따위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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