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84화 (484/649)

〈 484화 〉 6. 존재 증명(72)

* * *

성자와 검공의 결투.

그날, 성국이 자랑하는 산맥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지 않았던가.

살아남을 수 없다.

당연한 결론이었다. 아무리 육신을 수복하려 들더라도, 몸뚱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되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려 산을 분쇄하는 일격이었다.

한낱 인간의 몸이 견뎌낼 턱이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어째서인지.

검으로 땅을 짚은 채 제자리에 섰다.

가슴이 부풀었다 가라앉으며 사내의 호흡이 안정된다. 눈을 감더니, 이윽고 검극을 앞으로.

곳곳에서 울려 퍼지던 비명이 잦아들었다.

무섭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기묘하게도 수만에 달하는 인파 전원이 사내를 주목하고 있었다.

폭풍이 다가온다.

*

성녀는 와들와들 떨리는 눈으로 두 사내의 대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이 죽음 끝에서 부활해 곁에 섰을 때, 성녀는 울면서 이안을 말릴 생각이었다.

이제 그만 두라고, 소용 없다고.

성녀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안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봐야, 그의 고통만 가중될 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내가 수백 번에 이르는 죽음을 당하는 꼴을 어떻게 지켜볼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이안은 이미 한계였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 그랬다.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더라도 한계는 존재했다.

울고 싶을 텐데.

진작에 그만두고 싶었을 텐데, 포기하고 싶었을 텐데.

왜 아직도 고집을 부리는지.

성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울며 물었다.

왜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내심은, 재차 묻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해야 만족하겠느냐고.

얼마나 더 내가 당신한테 빠져야 하는지, 이미 당신만 보면 가슴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데.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부끄러워 괜히 뒷짐을 지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린 적도 많았다. 사랑은 처음이었지만, 온 마음을 다해 사모하고 있노라고 성녀는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보다 더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사내는 성녀의 정신을 송두리째 휘어잡아 버렸다. 그래서 성녀는 더더욱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시달렸다.

이안이 죽는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비극이었다. 하지만 성자가 일으키는 기세는, 얼핏 보기에도 보통이 아니었다.

저 일격에 직격당하고도 살아남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울며 매달릴까?

기각이었다. 이미 수없이 시도해 보았으나, 성자는 철인이었다. 사적인 부탁에 의해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무슨 수를 써야 이안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극한까지 내몰린 성녀의 턱 근육이 덜덜 떨리며 딱딱 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성녀는 손톱이라도 짓씹고 싶었지만, 아직 두 손은 구속된 채였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성녀가 그렇게 되뇌일 때마다 뇌리가 한계까지 가속했다. 수많은 화상들이 성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침착한 목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스스로 증명하게.”

무엇을, 이라고 성녀는 되묻고 싶었다.

“그대가 누구인지를…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 단지, 여태껏 누구도 그 길을 걸어 본 적이 없기에 ‘길’이라 부르지 않을 뿐. 빌고 애원한다고 해서, 없던 길이 생겨나지는 않네.”

길은 이미 있다고?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손으로 가르쳐 주기라도 한다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안을 살리고 싶다.

제발, 제발 대답을 알려 줘.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죽어도 좋았다.

사랑하는 사내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순명(??)해야지요.”

새하얗게 달아오른 뇌리 속을 내달리는 또 하나의 목소리.

순명이라니?

이 승산 없는 싸움이 그의 운명이란 말인가. 무의미한 피를 흘리고 흘려서, 성녀를 위해 헛된 목숨을 바쳐야 ‘순명’한다는 소리인가.

“말도 안 되잖아……!”

비명, 발악, 절규.

그 무엇이든 내지를 여유는 없었다. 뒤죽박죽 얽힌 사고의 실타래들이 일순 하나의 기억을 훑고 지나갔다.

어느 날, 사랑하는 사내 앞에서 말했던 적이 있었다.

“첫 번째, ‘교리 재판’. 대부분은 이 재판을 받는다고 보면 돼요.”

그래, 그랬지.

이안은 성녀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두 번째, ‘명예 재판’! 먼 옛날 신마전쟁 때 앞장서 오메로스의 군대를 참한 대성인 아리우스를 기념하는 재판이에요.”

성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흘러나온 핏물이 비릿한 냄새를 풍겼지만, 개의치 않았다.

잘난 듯이 떠들었던 과거의 자신을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재판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안이 이토록 무모하게 나서지는 않았을 텐데.

얌전히 자신만 죽고 끝났을 텐데!

원망스럽고 후회스러웠다. 그러던 찰나에, 또 다시 성녀의 뇌리를 스치는 한 마디.

“그리고 마지막 재판은…….”

탁, 하고 전원이 내려가듯 성녀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모든 이야기들이 얽히고설킨다. 추억과 기억, 조언과 경고가 어우러지며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마치 폭죽이 터져 나가듯이.

가까스로 답을 찾은 성녀가 황급히 부르짖었다.

“……그만!”

한계까지 짜낸 목소리였다. 이미 두 사내는 충돌 직전이었다.

이 미약한 울부짖음이 닿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전력을 다해서.

성녀는 폐부를 쥐어짜며 외쳤다.

“다들 그만하라고… 하잖아!”

찢어질 듯 높은 고성이었다.

일순 성자의 눈이 흘깃 성녀를 향했다. 수만에 달하는 인파와 드높은 절벽 위에 선 판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봐야 찰나에 불과한 관심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 무력하고 불쌍한 죄인에게 많은 관심을 투자할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 선 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서로 마주 보고 선 두 사내였으니까.

성녀는 그 점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재판이야.

내 운명이고, 내가 감당해야 할 죄야.

그 외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

그렇게 외치고 싶은 심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성녀는 목소리를 한도까지 높였다.

“……’정화 재판’!”

느닷없는 외침이었다.

하지만 그 한 마디의 효과는 어떤 말보다도 뛰어났다. 이내 사위가 고요하게 잠겼다.

심지어 성자조차도 움찔 몸을 떨며 기세를 누그러트렸을 정도였다.

‘정화 재판’이라니.

너무나 오래 전에 사장된 규정이라, 그 전통을 기억하고 있는 자조차 드물었다. 대부분의 이들은 그 존재만을 희미하게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으니까.

깎아지를 듯 가파른 절벽의 상층, 교황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뭐라?”

“산상법정에 선 죄인으로서… 정당한 권리에 따라 ‘정화 재판’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침묵.

군중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속닥이기 시작했다. ‘정화 재판’에 대해 서로 알고 있는 지식을 나누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정화 재판의 내용은 그 어떤 재판보다도 간단했으니까.

죄인이 꿇어앉은 장작을 태우고, 살아남으면 무죄.

그리고 불타 죽으면 유죄다.

인간이 아닌 신에게 죄의 유무를 묻는 방식이었다.

‘교리 재판’도, ‘명예 재판’도 인간에 손에 의한 재판일 뿐이다.

그러나 ‘정화 재판’만은 유일하게 신에 의해 유죄와 무죄가 갈린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존중 받는 재판 방식이며, 셋이나 되는 종교재판 중에서도 우선 순위가 가장 높았다.

당연히 ‘명예 재판’보다도.

물론 이 ‘정화 재판’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죄인이여, 알고 있겠지? 여태껏 ‘정화 재판’을 요청하여 살아남은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의 뜻은 태양과 같아서, 모든 곳을 비추지만 티끌만한 죄조차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럼에도 묻고자 합니다!”

이를 악물면서, 성녀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주께 버림 받은 자는 주의 뜻조차 물을 수 없단 말입니까?!”

교황은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며 슬쩍 성자의 눈치를 살폈다.

한창 흥분한 기색이던 성자는 어느덧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기세를 거두고 있었다. 반면 그 반대편에 선 사내는,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성녀의 말을 들은 사내의 낯빛이 무참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차마 소리를 지르지는 못했지만, 사내는 온 마음을 다해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지 마.’

하지만 성녀는 옅은 눈웃음을 지으며, 사내를 일별할 뿐이었다.

살아남은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홀로 죽을 수만 있다면, 바라던 바였다.

성녀는 바짝바짝 말라오는 입술을 침으로 축였다.

“……좋다, 가련한 운명의 죄인이여. 주의 뜻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피조물로서, 주님의 뜻을 묻는 것은 모든 신도들의 당연한 권리다. 다만 신성한 의식을 준비하기 전에, 주의 뜻을 묻고자 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이름 없는 자!”

쿵, 하고 교황이 땅을 구르자 다시 산상법정이 웅웅거리며 울렸다.

짐짓 위엄 넘치는 얼굴을 한 교황이 재차 엄숙한 전통을 재현했다.

“좋다, 이름 없는 자여! 그렇다면 그대는 주께 무엇을 묻고자 하는가?”

“주여,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Eloi, Eloi, lama sabachthani!)”

쿵, 하고 다시 한 번 지축이 진동했다.

모든 문답의 끝에서.

달빛과 함께 고요가 내려앉았다. 수만 쌍에 이르는 눈동자가 말없이 교황의 입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킨 직후.

"……산상법정의 오랜 율법에 따라, '정화 재판'의 개회를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수백 년만의 정화 재판이 시작되었다.

버림 받는 어린 양이 주의 뜻을 묻기 위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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