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85화 (485/649)

〈 485화 〉 6. 존재 증명(73)

* * *

장작이 타닥거리며 타고 있었다.

어두운 밤, 달을 등지고 주저앉은 내 눈이 멀거니 불꽃을 향했다. 산상법정의 드넓은 공터 한가운데 피어오른 불길은 드높고 거셌다.

저 안에, 이름 없는 여인 하나가 자리하고 있으리라.

‘정화 재판’이었다.

신에게 죄의 유무를 따져 묻기 위해, 제 몸을 장작 위에 내던지는 최후의 수단.

당연히 여태껏 살아 돌아온 죄인은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성녀는 굳이 이 어려운 길을 택하고 말았다. 그 까닭 또한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안, 당신까지 죽을 필요는 없어요.”

이제라도 그만 두자고, 내가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자마자 성녀를 찾아가 말했을 무렵이었다. 성녀는 단호한 태도로 내게 선을 그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 없다는 투였다.

나로서는 성녀의 고집이 못내 원망스럽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죽지 않습니다… 직접 보셨잖습니까? 성자께서는 절 죽일 생각이 없으시다고요! 어떻게든, 견디기만 한다면……!”

“보았기 때문이에요.”

침착한 목소리로, 성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살그머니 붙잡았다.

보드랍고 따스한 감촉에 내 몸이 흠칫 굳었다. 두개골이 박살 나고, 내장이 으깨지기를 반복한 지가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은 참이었다.

이처럼 애정 어린 접촉이 낯설게 느껴질 만도 했다.

성녀도 이러한 내 사정을 짐작했는지, 그 낯빛에 걸린 호선이 퍽 처연해졌다.

“내 앞에서, 당신이 몇 번이나 죽은 줄 알아요? 그때마다 내 가슴이 얼마나, 얼마나 찢어지던지…….”

물기 어린 목소리였다.

이대로 두면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아서,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성녀를 품에 안고 말았다.

곳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상관없었다. 그보다 울먹이는 성녀를 달래 주는 쪽이 더 중요했으니까.

흙투성이가 되어도 성녀는 성녀였다.

여전히 좋은 냄새가 났다. 눈물에 함뿍 젖은 소리가 귓가를 구슬프게 적셨다.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성녀님…….”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에요.”

부탁이 아닌 단언이었다.

사실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나는 금세 성녀의 결의를 눈치 채고 말았다.

어차피 내가 만류해 봐야 들어먹지도 않으리라.

모로 보나 설득은 포기하는 편이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단 하루… 오늘 하루만 절 의지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매일 당신을 의지해 왔어요.”

“한 번만 더, 절 믿어 주시면…….”

“……이안.”

나지막한 호명은 거부하기 힘든 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슬픈 눈을 하고 성녀를 바라보았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단 한 번의 눈짓이 더 많은 심정을 전달하곤 했다.

내 눈을 마주한 성녀의 손에 꼬옥, 하고 힘이 들어갔다. 맞잡은 내 손에 보드라운 압박감이 더해졌다.

그리고 성녀의 입가에 맺히는 흐릿한 웃음기.

눈꼬리에 옅은 이슬을 맺은 채로, 성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바라보더라도 안 돼요.”

“그럼 어떡하자고요? 이 끝이 뻔한 도박에, 당신이 목숨을 거는 꼴을 지켜만 보고 있으란 말입니까?”

“살아 돌아올게요.”

나를 달래듯 잔잔한 어조로 이어진 설득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살아 돌아오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누구라도 불 붙는 장작 위에서 밤을 지새울 수는 없었다. 이는 오직 몇몇 초인에게만 허락된 기적이었으며, 반면 성녀는 어디까지나 치료를 전담하는 사제에 불과했다.

이 재판의 끝은 너무나도 뻔했다.

온몸이 불에 타는 아픔은 상상을 초월한다. 차라리 죽더라도 좀 더 나은 사인이 있을 터였다.

그렇게 더욱 초조한 낯빛을 하는 나였으나, 성녀는 고집스러울 만치 내 뜻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안, 나는 지금껏 이름을 버린 채 살아왔어요. 이제 와서 그 시절의 이름을 다시 주워 담을 염치도 없고요. ‘성녀’로만 살아온 지난 몇 년… 악에 받쳐 살았던 고아 계집애는, 너무 달라져 버렸으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내 시선이 망연해지자 성녀는 어렴풋한 미소를 머금었다.

또 다시, 그리고 몇 번이나.

성녀는 슬그머니 맞잡고 있던 손을 풀어, 힘 있게 나를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따스했다.

“더는 껍데기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불타 죽겠다는 말입니까?”

“묻고 싶거든요.”

내 거친 반문에도 성녀의 대답은 평온하기만 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었다.

“신은 존재하는지, 그리고 ‘성녀’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진 나를 아직도 사랑하는지… 죽더라도 한 번쯤은 따져 봐야 속이 후련하지 않겠어요?”

“제발, 성녀님……”

“나를 믿나요?”

무릎 꿇고 애걸이라도 하려던 내 말문이 단숨에 틀어막혔다.

어느 기억 속에서 들었던 물음.

그리고 내가 단언했던 문제가 다시금 내게 던져졌다.

당신을 믿냐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계집애에 불과해요. 모든 것을 스스로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딛고 서 있었죠… 심지어 ‘성녀’라는 이름조차 잃어버린 나를, 당신은 믿고 있나요?”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나는 울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도저히 성녀를 웃으며 떠나보낼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단지 성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을 따름이었다.

“……임마누엘.”

흐릿하게 떨리는 내 목소리에, 성녀는 안심했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부디 이 시간이 영원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도.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성녀는 말없이 몇 단으로 쌓인 장작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에 잠긴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성화와 같았다.

불꽃이 낼름거리며 달을 핥는 와중에도, 성녀는 아직도 두 손 모아 응답 없는 물음을 던지고 있을까.

그러던 내 눈이 문득 측면을 향했다.

오랜 전투의 반작용인지, 수만에 이르는 인파 중 내 곁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나름대로 나를 배려해 주려는 의도일지도 몰랐다.

성녀를 떠나보낸 나는 누가 봐도 저기압으로 보였으니까.

그러던 차에 보인 풀 한 포기가 있었다.

이 메마른 공터에도 생명이 움튼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소심하게 고개를 치켜든 잡초였다. 이미 수없이 짓밟혀 예전의 활력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말이다.

그 꼴이 문득 성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코 내 손이 풀을 향해 뻗어졌을 찰나.

“……생명이란 놀랍지 않습니까?”

봄바람처럼 자상한 목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혔다.

흠칫, 얼어붙은 내 시선이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이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더불어 짓밟힌 풀 한 포기를 내려다보는 하늘빛 눈동자는 연민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어, 나를 수백 번이나 죽인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바짝한 긴장한 내 몸이 제멋대로 임전 태세를 취했다. 손이 허리춤을 더듬으며 검 손잡이를 찾았으나, 정작 성자는 내게 한 줌의 시선조차 던지지 않았다.

그의 망막 위에는 시들해진 잡초만이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가혹한 환경에서도 생명은 피어납니다. 그리고 짓밟고 짓밟아도, 기어코 제 목숨을 부지해 살아가죠… 자연이란 이토록 질기고 강인합니다.”

그러면서 성자는 무릎을 꿇고 상체를 낮추었다. 거진 엎드린 자세가 되고 나서야, 소년은 조심스레 숨을 불어넣었다.

후우, 하는 소리와 함께 풀잎이 살랑이더니.

기적이 일어났다.

짓밟혀 찢긴 풀잎이 되살아났다. 다시 대를 꼿꼿이 세운 잡초는 성장을 반복하더니, 이내 자그마한 꽃망울을 맺었다.

그리고 팍, 하고 펼쳐지는 꽃잎.

잡초답게 소박한 꽃이었다. 그러나 그 자그마한 하얀 꽃이 못내 아름답다는 듯, 성자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것이 제가 추구하는 길입니다. 주를 섬기며, 주의 섭리를 따르고자 했고, 끝내는 자그마한 성취를 이루게 되었죠… ‘대자연’이란, 실로 경이롭지 않습니까?”

“두렵던데요.”

뇌리를 거치지 않고 튀어 나온 말이었다.

내뱉고 나서도 아차, 싶었으나 성자는 그다지 화가 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마치 귀여운 아이를 바라보는 노인과 같은 눈빛이었다.

그야 수백 년을 살아온 위인이었으니, 내 연령대를 고려하면 당연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무언가 멋쩍은 느낌이 들어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성자께서 닮으려고 하셨던 대자연 말입니다… 눈앞에서 마주하니, 그보다 무서운 게 없더군요.”

그러면서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듣는 이에 따라 비꼬는 말이라 여겨도 이상하지 않은 감상이었다.

대자연을 추구한 성자.

그의 강함은 무시무시했다. 심지어 전투 중에 보이는 투지는 가히 광증에 가까울 정도였다.

솔직히 말해 두려웠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거역할 수 없는 힘의 흐름이 나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데.

성자는 내 무례한 표현에도 후후, 하고 웃음을 터트리기만 했다.

“그래, 그렇군요… 그럴 만도 합니다. 자연은 때때로 잔혹무비하지요.”

“이 또한 주의 뜻입니까?”

또 다시 무심코 내뱉어진 물음이었다.

타오르는 장작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그렇게 되물었다.

“왜 천신께서는 우리에게 이겨내지 못할 시련을 주십니까? 최선을 다해서, 몸부림 쳤는데… 어째서……!”

“형제여.”

성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 음색이 너무나 따스해서, 나는 그만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아름답다거나, 잔인하다거나 하는 표현은 한낱 인간의 감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뜻을 가지고 부는 바람이 있습니까? 혹은, 의도가 있어 흐르는 물이 있던가요?”

“궤변 아닙니까?”

흘러넘치려는 울음을 애써 숨기기 위해, 나는 더욱 가시를 세우며 물었다.

“천신께서는 우리를 사랑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조물주의 뜻이 분명한데, 어째서 세상은 그와 정반대로 만들어졌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말문이 턱, 하고 막히고 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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