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6화 〉 6. 존재 증명(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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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논쟁을 염두에 두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당연히 깊은 생각이 있을 턱이 없었고, 이처럼 난해한 물음에 내놓을 해답도 없었다.
혹시 레토라면 몰라.
성자는 내가 욱해서 한 말을 굳이 탓하지 않았다.
그저 옅은 미소를 머금었을 따름이었다.
“알 수 없어서 두렵습니까? 주의 뜻이 무엇인지, 과연 주께서 우리를 굽어살피시기는 하는 건지.”
“그야, 당연…….”
“왜 신을 부정할까요.”
성자는 아리송한 물음을 던지며,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하늘빛 눈동자가 하늘 높이 치솟는 불 그림자를 담았다. 나는 자연스레 성녀를 떠올리고 말았다.
성녀는 신을 부정했다.
그리고 시에네 선배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신을 부정할 때, 성직자가 유독 흥분하는 까닭은 신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라 했던가.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이와 비슷한 답을 입에 담았다.
“그야, 신이 없을지도 몰라서……”
“신이 존재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내 눈동자가 슬쩍 성자를 향했다. 그는 말없이 등 뒤를 눈짓했다.
그것에는 수만에 달하는 군중들이 서 있었다.
멍하니 치솟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신앙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불합리하고 잔인한 세상 속에서, 신의 존재를 믿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어찌 만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소리 높여 외칩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이를 부정하고, 신의 존재를 증명해 주기를 바라면서.”
무어라 반박을 할까 하다가,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성녀도 그러한 심정이었을까.
한참이나 침묵하던 나는, 결국 이를 악물며 눈물을 삼켰다.
“……할 수 있을까요?”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기적을 일으켜서, 살아서 되돌아온다.
내 간절한 의문에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성자는 묵묵히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볼 뿐이었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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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말간 빛 속에서 눈을 떴다.
이곳은 어디지, 라는 의문이 표백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의식이 부상하며 하나둘씩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장작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었지. 솔직히 말해 무섭고 두려워 몸이 떨리긴 했지만, 애써 침착한 척을 했다.
사랑하는 사내가 조금이라도 덜 불안해 하기를 바라면서.
주마등인가.
불꽃이 살갗을 태우며 달려들었다. 들이마시는 숨조차도 뜨거워 폐부가 쪼그라들고, 상상하기 힘든 통증이 몰려들었다.
성녀는 속으로 읊조렸다.
주여, 정녕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이 또한 주의 뜻이라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끝끝내 사랑하는 사내 하나를 구할 수 있다면, 성녀는 기꺼이 제 목숨 따위 내던질 각오를 다진 지 오래였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순명(??)’해야만 한다면.
기꺼이 해 주리라.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뜨니 이곳이었다.
넋을 놓고 있던 성녀의 눈에 어떠한 풍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저 멀리에서 빛이 보인다. 성녀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녀의 몸은 점차 어려졌다.
그리고 언제부터일까.
어느 소녀가 길을 걷고 있었다.
자그마한 꼬마아이는 힘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보석과도 같은 외모로 높은 칭송을 샀으나, 가난한 자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독이나 다름없었다.
술에 취한 어른 하나가 다짜고짜 소녀의 집에 쳐들어왔다.
소녀는 영문도 모른 채 방 안에 숨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다투는 소리가 난 직후,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잔뜩 피를 흘리는 아버지가 들어와 말했다.
“도망가거라.”
소녀는 겁에 질려 눈망울 가득 물방울을 머금었다.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네 얼굴을 숨기는 것을 잊지 마라. 너는, 천신께서 우리 부부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야… 언젠가 세상이 널 알아줄 때까지, 그리고 진정으로 널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네 얼굴을 감추며 살아가라.”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었다.
몇 번이고 넘어지고 다치면서, 소녀는 낡은 천으로 제 얼굴을 칭칭 감으며 방랑을 시작했다.
어느 고아원에 정착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말이 없었고, 얼굴을 드러내는 법도 없었다. 역병에 걸려 이목구비가 뭉개졌다는 소문이 소녀의 미모를 감추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대신 핍박과 멸시가 이어졌다.
더러운 고아가 붕대를 칭칭 감고 돌아다니다니.
재수 없다고 침을 맞기 일쑤였고, 이유 없이 끌려가 맞은 적도 많았다.
심지어 고아들 사이에서도 소녀는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세상에게 짓밟힐 때마다 힘없는 계집아이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천신의 선물이야.
이런다고 내가 꺾일 것 같아? 천신께서 나를 보우하시고 계셔.
그래, 아직은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수없이 오랜 세월이 지나 구세주가 이 땅에 내려왔듯이, 성녀 또한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성녀는 밑바닥에서 세상의 온갖 진실을 목도했다.
약자라고 해서 반드시 선하지는 않다.
도리어 그들은 더욱 거칠고 배려심이 없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있어 ‘나눔’이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던 탓이었다.
가진 재산이 보잘 것 없기에, 더욱 그러쥔 손에 힘을 풀지 못한다.
반대로 가진 바 힘이 약할수록 연대가 필수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집단을 이루고, 그 사이에서는 끈끈한 의리를 강조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폭력으로 이루어진 질서에 불과했다.
소녀는 이러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가난한 자는 악하고 싶어서 악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값싼 연민이나 적선 따위는 필요 없었다.
위로 올라가야 해.
아주 높은 곳, 이 모든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자리까지.
그러던 차에 소녀는 예쁘장한 사내아이를 만났다. 여자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지만, 소녀는 그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사내아이는 이내 남동생이 되었다.
“누님, 언젠가 우리 같은 고아들이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이 올까요?”
“내가 만들 거야.”
이를 으득으득 갈면서, 소녀는 다시 생긴 가족 앞에서 맹세했다.
“그까짓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 우리의 손으로, 우리가 이루어 가야 하는 거야. 배부른 돼지들은 아무것도 뒤엎지 못해.”
그리고 소녀는 자라 천신의 간택을 받았다.
‘성녀’가 되어, 얼굴을 드러낸 소녀의 미모는 꽃망울을 막 터트린 꽃처럼 아름다웠다. 수많은 이들이 찬미하고 찬송하며, 성녀의 이름은 드높아졌다.
그렇게 걷고 걸어, 이윽고 이 자리.
성녀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성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피눈물을 흘리는 사내아이와 여자아이.
더불어 그 뒤로 끝없이 이어진 고아들의 텅 빈 눈동자가 성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으로 가득 찬 입을 벌려 고아들이 울부짖었다.
“왜, 왜 우리를 버렸어요……?”
“우리를 위한 세상을 만든다고 했잖아! 우리를 구해 주겠다고 했잖아!”
성녀의 낯빛이 곧장 새파래졌다. 비명을 내지르는 고아들의 면면 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자리하고 있었다.
제임스와 메리.
성녀는 털썩 주저앉은 채,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났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니, 아니야… 나, 나는 그럴 생각이……!”
“거짓말쟁이!”
새까만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고아들이 한꺼번에 악다구니를 쓴다.
“신 따위는 없어! 그까짓 신!”
“……맞습니다, 이까짓 신!”
그 합창에 응해, 저 너머에서 누군가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림자로 뒤덮여 자세한 외모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체형만 보고도, 성녀는 단박에 상대의 정체를 짐작해 냈다.
한때 유일한 가족이라 여겼던 인물, 유렌.
그가 검을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이까짓 신을 아직도 믿습니까?! 말로는 약자를 사랑한다면서, 우리를 실제로 사랑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냔 말입니다! 그 잘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우리를 구해 주지 않죠? 왜 아직도 누님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습니까? 심지어 고아의 영혼을 바쳐 만든 끔찍한 물건마저 제물로 받고… 말해 봐요, 제발!”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재생되는 발악이었다.
성녀는 당장이라도 뒷걸음질을 쳐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주저앉은 성녀의 발목은, 이미 고아들의 손에 붙잡힌 지 오래였다.
망설임 없이 거리를 좁힌 유렌의 검이 날카로운 예기로 빛났다.
“아, 아아…….”
“내가 누님을 배신했다고요?! 웃기지 마! 우리를 배신한 건 천신이야! 그리고 우리의 꿈을 저버린 건, 바로 당신이고!”
고래고래 악을 내지르며, 유렌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성녀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단지 마지막에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성녀의 첫 번째 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될 사내.
“……이안!”
무심코 외친 그 한 마디에.
유렌의 검이 우뚝 멎었다. 성녀는 어디선가 흘러 넘치는 새하얀 빛 무리에 멍청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품속이었다.
은빛의 로자리오로부터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단 몇 초 후.
팟, 하고 불이 꺼지듯 유렌과 고아의 그림자가 가루처럼 흩날렸다.
어느덧 세상은 다시금 밝아진 뒤였다.
성녀는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었으나, 저 멀리에서 누군가 성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휘청이다 엎어질 뻔한 적이 몇 번, 성녀는 이를 악물고 걸어 끝내 구름이 가득한 공간에 진입했다.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털썩, 하고 성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찬란한 광채에 가려져 그 진정한 모습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알았다.
마치 햇살처럼 당연해서 잊고 있던 시선이었다. 그 우묵한 눈이 성녀를 향하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다, 당신이…….”
놀란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성녀는 나지막한 의문을 던졌다.
“……당신께서, 바로 천신이셨군요.”
길 잃은 어린 양이 비로소 신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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