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7화 〉 6. 존재 증명(75)
* * *
성녀의 물음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신은 오로지 굽어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성녀의 가슴에 불을 당겨진 것은 그때였다.
울컥, 하고 치솟아 오르는 감정의 불길에 성녀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나, 날 언제나 보고 있었어……?”
비틀거리며, 성녀는 몸을 일으켰다.
놀라고 당혹스러워 문장이 제대로 성립하지 않았다. 하지만 토막 난 언어로도, 파묻어 왔던 진심을 내뱉기에는 충분했다.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이 성녀의 목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내, 내가 넘어질 때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짖을 때도, 구해 달라고… 비명을 내지르며 애원했을 때도!”
팍, 하고 온 힘을 다해 발을 구른 성녀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짓씹은 입술에서 핏물이 새어 나왔다. 순식간에 고조된 감정이 성녀의 이성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날 보고 있었냐고, 묻고 있잖아… 대답해! 왜 보고만 있었어! 당신을, 당신을 내가 얼마나……!”
휘청, 하고 한 걸음을 내딛던 성녀의 몸이 기울었다.
제 분을 이겨내지 못한 탓이었다.
팍, 하고 여인의 주먹이 애꿎은 지면을 두드렸다. 아니, 빛으로 가득한 이 공간에 지면이 존재할까.
여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구슬픈 흐느낌이 그 잇새로 새어 나왔다.
“얼마나, 얼마나아아악!”
폐부를 쥐어짠 울부짖음이 텅 빈 공간을 찢으며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신은 대답이 없었다.
“얼마나, 믿어왔는데… 그런데 당신은, 단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었잖아!”
충혈된 두 눈이 지독한 원망과 증오를 담아 정면을 향했다.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왜, 어째서?! 대답해… 대답하라고! 왜 내가 고통 받는 꼴을 보고만 있었지?! 날 가장 사랑한다며! 우리를 사랑한다며! 그런데 왜 세상은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신의 앞에서, 이름 없는 여인이 울부짖고 있었다.
“전능하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켜만 보고 있지?! 당신이 창조한 세상이 엉망진창이야… 이까짓 게 당신의 뜻인가?! 당신의 잘난 계획이야?! 도대체, 왜… 왜, 왜, 왜애애애!”
몸부림과 아우성의 끝.
여인은 이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대답해 주세요… 그래 줄 수는 있는 거잖아, 당신을 평생 섬겨 왔는데! 당신의 불쌍한 어린 양이, 이렇게 빕니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대답해 줘… 대답해 달라고!”
흐느끼면서, 여인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당신 따위가 신이야?”
목젖까지 치솟아 오른 울음을 가까스로 삼키며, 여인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눈시울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지 오래였다.
“당신은 신 따위가 아니야! 우리를 불구덩이에 던져놓고, 단지 관망만 하는 비열한 구경꾼에 불과해! 우리가 몸부림 치는 꼴이 재밌던가?!”
원망과 배신감에 미쳐 여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조차 모른 채로, 여인은 한 걸음을 내딛으며 비난을 이어갔다.
“난 당신을 증오해… 부정해! 설령 지옥의 끄트머리에 떨어지더라도 그래야겠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당신이 먼저 날 배신했으니까!”
그럼에도 신은 대답이 없었다.
늘 그랬듯이.
여인은 더욱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흥분에 젖은 목소리가 재차 높아졌다.
“왜 날 이토록 기구한 운명에 밀어 넣었지?!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그러다가 문득.
여인은 신의 시야가 보다 넓다는 사실을 느꼈다. 빛이 응시하고자 하는 것은 여인뿐만이 아니었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멍하니 제 품을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빛을 뿜고 있는 은빛의 로자리오가 자리하고 있었다.
턱, 하고 여인의 숨이 멎었다.
기억 속의 목소리가 재생되고 있었다.
‘나를 믿나요?’
“왜, 하필… 나여야…….”
사내는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니까.’
느닷없이 안개가 개인다.
뇌리가 맑아지며 머리가 팽팽 돌기 시작했다. 연달아 쏟아져 내리는 기억들이 있었다.
‘너는, 천신께서 우리 부부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야… 언젠가 세상이 널 알아줄 때까지, 그리고…….’
달구어진 목소리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연분홍빛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리고, 여인의 음색이 잘게 떨렸다.
“나, 나여야…….”
‘……진정으로 널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네 얼굴을 감추며 살아가라.’
울컥, 하고 여인의 눈가에 차오른 눈물이 뺨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만났다.
‘성녀’가 아닌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나의 운명, 나의 사랑.
털썩, 하고 여인의 무릎이 꺾이며 몸이 엎어진다.
돌이켜 보면, 옥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아이가 침울한 눈빛으로 물었던 적이 있었다.
‘누님, 언젠가 우리 같은 고아들이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이 올까요?’
그래서 나는 뭐라 대답했더라?
‘내가 만들 거야.’
그래, 그랬었지.
‘그까짓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 우리의 손으로, 우리가 이루어 가야 하는 거야. 배부른 돼지들은 아무것도 뒤엎지 못해.’
내가 아니면 안 돼.
밑바닥까지 떨어져 본 사람, 그들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
바로 나.
“……나여야, 합니까?”
뚝, 뚝.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며 맑은 소음을 일으킨다. 신은 여전히 말없이 여인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인은 소리 없이 울었다.
품속을 더듬거리뎐 여인의 오른손이 은색의 로자리오를 아플 정도로 쥐었다. 그 통증이 뇌리를 찌를 때마다, 성녀의 눈앞에 수많은 죽음이 재생되고 있었다.
두개골이 박살나고, 내장이 파열되어도.
수백 번이나 몸을 일으키던 사내.
“이것이 주의 뜻입니까……?”
아직도 신은 대답이 없었다.
늘 그랬듯이.
“수백, 수천 번을 무너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란 말씀이십니까? 이 기구한 운명! 고난과 시련이 예비된 가시밭길 위에서, 당신의 뜻대로 찢기고 부서지라고요?! 정녕 그래야만 합니까?!”
침묵 속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이를 악물고, 여인은 다시금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기어코 두 발로 선 여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정녕 그렇다면…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그리고 또 한 걸음을 내딛고.
탁, 하고 여인은 무릎을 꿇고 땅을 짚었다.
머리가 서서히 땅과 가까워진다.
깊고 깊이, 신의 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울었다.
“……순명, 하겠나이다.”
이를 으득으득 갈면서도, 여인이 다시 고개를 치켜드는 일은 없었다.
“당신 뜻대로 수백, 수천 번을 불구덩이 속에서 굴러 드리겠나이다… 기꺼이 눈 먼 자들의 돌을 맞고, 귀 먼 자들의 비난을 감내하며 살아가겠나이다… 이것이 나의 길이니까!”
눈물을 삼키며 여인은 재차 말했다.
“내가 가기로 한, 나의 길이니까……!”
그리고 다시 정적이 사위를 에워쌌다.
신은 묵묵히 이름 없는 여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면을 뒤덮은 구름이 갈라지며, 온 사방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말간 빛을 마주하는 와중에도 여인은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의식이 멀어지기 직전, 마치 환청처럼.
“……임마누엘(immanuel: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성녀는 언뜻 그러한 말을 들은 것만 같았고.
이내, 추락.
그리고 의식이 암전했다.
**
‘정화 재판’의 불꽃은 밤새도록 타올랐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산상법정을 떠나는 이는 없었다. 이안도, 성자도, 그리고 산 위에 선 판관들과 수만에 이르는 인파조차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일말의 불안과 기대를 담은 채 정중앙의 불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여명이 터올 무렵.
“……어라?”
누군지 모를 사람의 입에서, 멍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수만 쌍에 달하는 눈동자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기묘할 만큼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 본 군중은, 이내 저마다의 탄성을 내질러야 했다.
“비구름이다!”
“먹구름이 몰려온다!”
하나둘씩 드리우기 시작하던 비구름이 폭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기상 변화에 교황을 비롯한 판관들은 얼떨떨한 시선을 교환할 뿐이었다. 이안 또한 당황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오직 성자만이 말없이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쏴아아
쏟아져 내리는 빗물이 새하얀 김으로 화하며 치솟는 불길에 부닥쳤다.
그 드높던 불꽃이 전소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 몇 분만에, 산상법정의 중앙에는 새까맣게 탄 장작과 수증기만이 남게 되었다.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안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미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왔다.
그러자 장작 위를 가리고 있던 수증기가 사라졌다. 그 위에는, 새하얀 법복을 입은 여인 하나가 두 손을 모은 채 앉았다.
티끌 하나 다치지 않은 채로.
아니, 상처는커녕 옷마저 실 오라기 하나 타지 않았다. 수만에 달하는 인파는 탄성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어떻게든 이 기적을 눈에 담으려 애썼다.
아윽고 서서히 먹구름이 걷히고, 한 줄기의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하자.
“오오…….”
교황은 탄성을 터트리며, 곧장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성녀의 머리 위로 찬란한 금빛의 후광이 비치고 있었다.
헤일로(halo).
새로운 성인(?人)이 탄생했다는 뜻이었다.
교황을 시작으로, 수만에 달하는 군중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털썩, 털썩, 털썩.
폭우처럼 연달아 울려 퍼지던 소리가 비로소 멎었을 때.
이름 없는 여인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 위로 신성한 금빛의 광채가 어려 있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수만의 인파를 내려다보며, 이름 없는 여인은 단 한 마디를 내뱉었을 따름이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arti pisteuvete)?”
그러자 수만에 달하는 신도들이 부르짖기를,
“……임마누엘(immanuel)!”
천 년에 이르는 성국의 역사에서 처음.
이름 없는 여인 하나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제 결백을 증명해 냈다.
이 소식은 수만에 이르는 증인들의 목격담을 거쳐 온 대륙에 퍼져 나가리라.
그야말로 신의 기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