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9화 〉 6.5 고요한 밤, 성스러운 밤(1)
* * *
결과적으로 성국 원정은 성공으로 끝났다.
가슴 아픈 희생도 있었으나, 그 죽음이 헛되지 않을 만큼 무수한 성과를 거둔 몇 주였다. 성국 내에서 암약하고 있던 암흑교단의 세력을 대거 색출했을 뿐만 아니라, 일행 중 하나인 성녀는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더불어 염원하던 성국 정계의 주도권을 쥐기까지.
앞으로 제국뿐만 아니라 성국의 대대적인 지원도 기대해 볼 만도 했다. 성녀는 무려 천신의 간택을 받은 몸이었으니, 그 부탁을 거절하기는 힘들 터였다.
성녀가 내 부탁을 무작정 들어줄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 외에도 성과는 많았다.
우선 나는 ‘하이 익스퍼트’에 올랐다. 대륙에 단 스무 명 남짓 있는 강자의 경지로, 이제 어지간한 이들은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또 내 동료들은 어떤가.
엘시 선배는 삼촌의 죽음 이후 칩거에 들어가 수련에 힘 쓰고 있었으며, 성녀는 천신의 계시를 받은 이후 그 신성력이 대폭 증가해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치료 능력으로 대륙 최고를 논하던 성녀였다.
이제는 감히 역대 최고를 겨루어 볼 만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일보한 성녀의 치료 능력은 가히 ‘기적’이란 표현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생물뿐만 아니라 무생물의 시간마저 되돌리는 경지.
아직 ‘마스터’를 칭하기에는 일렀으나, ‘하이 익스퍼트’나 ‘대마법사’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볼 만했다. 이로써 우리 일행 중에는 대륙에 스무 명 안팎밖에 없는 실력자가 무려 둘이나 포진하게 되었다.
다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좋은 일에는 으레 나쁜 일이 수반되게 마련이었다. 당장 내 앞에 앉아 있는 불청객의 존재가 그랬다.
건장한 체격을 지닌 중년의 사내였다.
기묘하게도 그 머리카락만이 희끗해 노인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탄탄한 근육과 불길과 같은 눈동자, 넘치는 활력을 볼 때 도저히 노화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그는 칠흑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제국의 그림자들, 첩보부의 고위직을 상징하는 복장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소리 높여 칭송하기로는, 검공(??).
대륙의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가 바로 이 중년의 정체였다.
그는 드물게도 흥분한 낯빛이었다.
“……자, 보게.”
백지 위를 만년필이 슥슥 누비더니, 이윽고 완성된 그림이 내 앞에 내밀어졌다.
현란하던 손놀림과 달리 도화지 위에는 짤막한 글귀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의무 대 사랑’
내 떨떠름한 시선이 절로 검공을 향했다. 그러든 말든, 검공은 다소 위협적일 만치 목소리를 내리깔며 내게 물었다.
“둘 중 무얼 택하겠는가?”
“……꼭 대답해야 합니까?”
“어허.”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뚱한 표정으로 한동안 도화지를 내려보았다.
힐끗 눈치를 살피니 검공이 바라는 대답은 명확했다.
그래도 제국 황실의 큰 어르신이니, 나는 한 번 맞춰 주는 셈 치기로 하고 ‘의무’에 동그라미를 쳤다.
예상대로 검공은 내 선택에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만히 두면 박수라도 칠 기세였다.
“훌륭하네… 제국의 귀족이라면 마땅히 그래야지, 암!”
“이제 됐습니까?”
내 무기력한 물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검공은 곧장 다음 질문을 짜냈다.
도화지 위에 새로운 선택지가 그려졌다.
‘제국 대 성국’
슬슬 그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나는 어이가 없다는 눈빛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검공은 뻔뻔스럽게 내게 대답을 강요했다.
“이건 어떻겠는가?”
기왕 어울려 준 김이었다.
사실 이 질문은 고민의 여지가 없기도 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제국’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러자 검공은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네, 좋아… 자, 그럼 마지막.”
드디어 해방인가.
나는 안도감 반, 귀찮음 반을 담아 최후의 선택지를 내려다 보았다.
‘제국 대 성녀’
결국 견디다 못한 내 손이 도화지를 북북 찢어 버렸다.
“아니, 지금 무얼 하는 겐가? 설마 제국과 연인 중에 그 무엇도 고를 수 없단 소리를 하려는 건……!”
“제 충심을 너무 의심하는 것 아닙니까?! 저 성국 안 갑니다, 곧 죽어도 제국에서 죽을 몸이라고요!”
그렇게 고성이 오고 간 뒤에야 검공은 다소 진정하는 기색이었다.
여전히 끄응, 하고 신음을 삼키는 꼴이 그닥 마음에 들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팔짱을 낀 채 침음을 삼키던 중년의 눈이 슬쩍 측면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시엔 그 아이가 자네와 친했었지… 한때는 황궁의 꽃이라 불리던 아이였네만.”
그러면서 검공의 시선이 흘깃흘깃 나를 향했다.
누가 보아도 눈치를 주는 모양새였다.
“혹시 마음에 드나? 얼마 전에, 자네 때문에 조카 녀석과 속닥속닥 상담까지 하던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끄응, 하고 검공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짜증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제2황녀는 어떤가? 아이리스, 그 아이가 다소 쌀쌀맞은 면은 있어도 차기 황제로 유력하기도 하고… 설령 황위 계승에서 밀리더라도 자네와 결혼하면 죽음은 면하겠지. 여러모로 좋은 선택일세.”
“얼굴도 뵌 적 없는 분입니다.”
“아니라면, 그래! 알펜하우저의 쌍둥이는? 알펜하우저는 대대로 황실에 충성을 바쳐 온 가문이지… 신용할 만해. 무엇보다, 예쁘지 않나?”
“시에네 선배가 짜증나요.”
결국 검공은 쯧쯧, 하고 혀를 차며 포기한 낯빛을 하고 말았다.
불만스러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자네는 참 욕심이 많은 사내로군.”
“반대로 과분한 영광을 사양할 만큼 겸양 있는 친구라고 해주시죠… 아니, 애초에 아이리스 황녀 전하는 무려 황위 계승서열 2위 아닙니까. 그만한 인물을 제게 붙여 주시겠다고요?”
진심을 담은 내 의문에 검공은 흐음,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머뭇거리던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인간한테 한 방 먹였다고 들었다.”
“네? ‘그 인간’이라니요?”
“당연히 ‘성자’, 그 망할 능구렁이 이야기지!”
그러면서 쾅, 하고 책상을 내리치는 검공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따라 드물게 감정적이다 싶더니.
천하의 검공조차 호적수 앞에서는 어린애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성국을 경계했는지도.
“자네는 그 노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몰라! 수천 조각으로 토막 냈는데도 죽지 않는 게 말이 되나? 심지어 주먹질 한 번에 산이 날아가더라니까!”
성자를 상대해 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 칼조차 들지 않던 괴물을 수천 조각으로 토막 냈다는 사실이 더 경악스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마침 좋은 기회다 싶어, 나는 두 마스터에 얽힌 비화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분과는 왜 싸우게 된 겁니까?”
“그야……!”
크흠, 흠. 하고 검공은 그제야 제정신을 되찾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나이까지 먹고 너무 주책을 떨었다 싶은 모양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시종일관 태연한 낯빛을 하던 성자와 차이가 느껴지기는 했다. 벌써 노인이라 불릴 나이라도 마스터 중에서는 가장 막내였으니.
이러한 내 시선을 의식한 듯, 검공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말했다.
“사소한 다툼이 있었네… 그, 뭐냐. 무의 길을 걷다 보면 종종 있는 일이지.”
“도대체 무슨 주제였길래……?”
기대와 긴장이 반쯤 섞인 내 눈빛을 마주한 검공은 슬쩍 눈을 돌렸다.
중년의 목소리가 절로 작아졌다.
“어느 무기가 최고냐고 다투다가…….”
허, 하고 내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무어라 타박을 하기도 전에, 검공은 울컥해서 멋대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이 되나?! 만병의 왕이라 불리는 검이 있는데, 무인의 육체야말로 최고의 무기라니! 실험해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네!”
“그래서 결론은 뭐였습니까?”
“당연히 검이 최고였지!”
어쩐지 성자에게 물어보면 정반대의 대답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물론 이제 와서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슬슬 본론에 들어가고자 했다.
“성자께 한 방 먹인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무려 유력 차기 황권 계승자를 혼처로 주선해 줄 만큼?”
“흥, 남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가능성을 느낀다. 마스터란 단순히 재능과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경지가 아니야.”
여태까지와 달리 무척이나 진중한 목소리였다.
태도는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내용의 무게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저절로 숨을 죽이고 말았다.
“운, 바로 운이 있어야 하지… 그리고 자네는 운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일세.”
“운을 움직이다니요?”
“운을 기다리는 자는 영원히 마스터에 다다를 수 없네. 오직 운을 제 손으로 움켜잡는 이만이, 마스터에 도달할 수 있지.”
알쏭달쏭한 소리였다.
하지만 검공은 더는 그에 대해 논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꼬장꼬장한 태도로 고개를 내저었을 따름이었다.
“만일 제국에 대한 충심을 조금만 더 보였더라면, 내 가르침을 주었겠네만…….”
“이미 충성하고 있잖습니까.”
“됐네, 됐어! 이미 식어 버렸네. 마침 중요한 소식도 하나 전해주려 했더니만, 쯧.”
중요한 소식?
그 한 마디에 나는 슬슬 몸을 일으키려는 검공을 붙잡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전에, 검공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곧 아카데미가 떠들썩해질 걸세. 그럼, 그때 다시 보지.”
나타날 때도 그랬듯이, 검공은 떠나갈 때도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 후에도 나는 한동안 고민에 잠겨야 했다.
아카데미가 떠들썩해지다니.
그럴 만한 까닭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검공쯤 되는 인물이 기밀을 유지해야 할 사안이 무엇일까.
어차피 답이 나올 턱은 없었다.
이내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잡념을 털어냈다. 그보다는 당장 직면한 난제가 따로 있었다.
검공이 떠난 아카데미 기숙사의 방 안, 나는 조심스레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안내문을 들었다.
‘성야제(???)’
천신이 지상에 강림한 날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천신교 최고의 기념일 중 하나인 만큼, 규모가 큰 무도회가 열리기로 유명했다.
그 백미가 바로 ‘성야의 춤’이었다.
시간이 자정에 다다르기 직전, 수천 쌍의 남녀가 쌍을 이루어 춤을 추는 성야제의 절정.
짝을 이룬 남녀는 천신의 축복을 받아 향후 1년 간 관계가 진전된다고 했던가.
아카데미에 돌아온 이상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는 행사였다.
도대체 누구와 춤을 추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내 골치를 아프게 하는 편지는 두 통이 더 있었다.
우선 첫 번째, 라이넬라 가문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무서워서 아직 개봉조차 하지 않은 채였다. 또 하나의 편지는 바로 유르디나 가문으로부터 날아온 쪽지였다.
‘아카데미로 출발함.’
건조한 정보였다. 발신인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성야제의 안내문과 함께 두 통의 편지를 정리했다.
아무래도, 난제가 나를 덮쳐올 듯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이 이야기는, 단 며칠에 걸친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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