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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90화 (490/649)

〈 490화 〉 6.5 고요한 밤, 성스러운 밤(2)

* * *

제국의 북부에는 사자가 살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이는 대륙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이야기였다. 동부에서나 종종 보인다는 사자가 북부를 떠돌 가능성은 오직 하나였다.

동부에서 쫓겨난 것이다.

유르디나 가문은 그렇게 탄생했다. 먼 옛날 대륙을 일통한 나라의 신하였으나, 당시만 해도 불모지였던 북부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숨을 죽였다. 그리고 끝내는 제국 탄생의 공신 중 하나가 된 곳이 바로 유르디나였다.

북부의 각박한 환경과 오랜 인고의 세월은 유르디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동부의 루페미온을 제외하면, 최고의 무가(?家) 자리를 두고 다툴 상대조차 마땅치 않은 실정이었다. 제국의 군권을 거머쥔 유르디나의 지위는 그만큼이나 오롯했다.

그리고 북부의 심장이라 불리는 유르디나 성.

그곳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주의 집무실은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그 악명 높은 유르디나 성의 삼엄한 경비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집무실 안에 대치한 두 여인의 신분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이 또한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금과 은이 상반된 몰골을 한 채 앉아 있었다.

우선 회색의 머리카락을 한 소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곳곳이 찢겨나간 옷과, 자상을 비롯한 무수한 생채기로부터 옅은 핏물이 배어 나왔다.

집무실의 구석에 몰린 여인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소녀의 푸른 눈동자에 서리처럼 차가운 살기가 들끓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앉아 있었다.

의자에 앉아 술잔을 걸친 새하얀 손가락이 고혹적인 얼굴이었다. 다리를 꼰 채로,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의 낯빛은 누가 보아도 좋지 않아 보였다.

짜증이 어린 얼굴이었다.

흐트러진 연분홍빛 가운 사이로 여체의 곡선이 보일 듯 말 듯했다. 더불어 살짝 거칠어진 숨과 피부에 맺힌 약간의 땀방울이 전투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세리아 유르디나와 델핀 유르디나.

각각 은과 금을 상징하는 여인이자, 유르디나 가문의 실권을 쥔 이복자매인 인물들이었다.

당연히 일개 경비 따위가 막아설 수 있는 지위는 아니었다.

“……세리아, 이 언니는 무척이나 실망했단다.”

그 난데없는 힐난에 세리아는 울컥, 하고 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화를 내고 싶은 쪽은 오히려 세리아였다. 지난 전투의 최전선을 정비하고, 유르디나 성으로 돌아온 지도 며칠 되지 않은 마당이었다.

세리아는 오랜만에 사랑하는 선배의 모습을 본뜬 인형 사이에서 잠을 청할 생각에 행복했었다. 사랑하는 선배가 입고 있던 외투 속에 얼굴을 파묻고, 그렇게 오늘도 즐거운 휴식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는데.

이 달콤한 한때를 무참히 깨트린 장본인이 바로 델핀이었다.

느닷없이 호출을 받은 세리아는 집무실에서 온갖 도발을 마주해야 했다. 주로 사랑하는 선배와 불태웠던 밤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러지 않아도 의가 좋지 않았던 세리아는 곧장 검을 뽑아들고 말았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세리아는 패했다. 언제나와 같은 풍경이었고, 이제 가신들이 웅성거리며 올라오는 일조차 없었다.

유르디나 가문이 콩가루 집안이 된 지는 오래 되었으니까.

으득, 으득.

세리아가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암캐년.”

“뭐라고 했니?”

세리아는 델핀의 추궁에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슬쩍 시선을 돌리는 세리아의 낯빛에 짜증이 가득했다. 마음 같아서는 오체분시를 하더라도 속이 시원치 않겠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 난 뒤였다.

굳이 무의미한 매를 벌 만큼 세리아는 멍청하지 못했다.

일순 눈이 가늘어지긴 했으나, 델핀은 이내 관심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 술잔을 기울이는 자태마저 매혹적이었다.

“하여튼, 세리아… 나는 네게 기대를 걸고 있었단다. 내가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하니, 너라도 나서서 서방님을 꼬셔 왔으면 하는 바람이었지.”

“발정기라도 온 건가요? 그럼 홀로 처리하는 법을 배우지 그래요, 늘 암퇘지에게 어울려 줄 만큼 이안 선배는 한가한 분이 아니시잖아요?”

“너도 서방님과 하룻밤을 보내면… 아니, 됐다. 네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으득, 하고 세리아는 다시 이를 갈며 목청을 높일 뻔했다.

델핀의 입가에 노골적인 조소가 맺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또 하나의 정보가 뱉어지자, 세리아는 눈을 부릅뜬 채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성녀가 선수를 쳤더구나.”

그 한 마디에, 세리아는 입을 다문 채 두 눈을 깜박거려야 했다.

‘선수(?手)’, 연애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당장 세리아가 델핀에게 이처럼 수모를 당하는 까닭도 선수를 빼앗긴 탓이 아니던가.

델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긋한 목소리를 이어갔다.

“공개 구혼을 해 버렸어. 그것도 수만의 증인 앞에서… 마침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서 상처 하나 없이 되돌아온 기적을 선보인 직후였지. 우매한 민중들은 신이 나서 연극이라도 벌일 기세더구나.”

“그, 그럴 리가…….”

바닥을 향한 세리아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안 선배가 기다려 달라고 했을 텐데.

설마 단 몇 주 사이에 그만한 대사건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세리아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을 여유조차 가지지 못했다.

또 한편으로는 델핀의 태도가 이제야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델핀이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나쁜 이유.

질투였다. 추하게도, 이 성욕에 미친 암컷은 제 서방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세리아를 불러 괜히 두들겨 팬 것이다.

언제 보아도 감탄이 나오는 인성이었다. 세리아는 근시일 내에 독극물을 활용한 암살을 계획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세리아, 알고 있겠지? 서방님은 어떤 의미로든 우리 유르디나에 필요한 인물이란 사실을… 무려 하이 익스퍼트에 이른 무인을 이렇게 강탈당할 수는 없어.”

아직 충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세리아였다. 무심코 새어 나온 실소를 금할 도리는 없었다.

어떤 의미로든 필요하다고?

그 속셈이 뻔히 들여다 보였다.

세리아가 갖은 애를 써서 이안을 유르디나 성에 데려오면, 내킬 때마다 사랑하는 선배를 유혹할 심산이겠지.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미래였다.

미친 년.

그러나 델핀의 논리는 정론에 가까웠고, 세리아도 굳이 반박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대로 이안을 빼앗길 수 없다는 의견 자체에는 공감이 갔던 탓이었다.

당장은 누구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자매의 탈을 쓴 철천지원수더라도 말이다.

델핀은 과연 눈치가 빨랐다. 세리아가 아무런 반론도 없이 머뭇거리자, 이를 단박에 무언의 동의로 받아들였을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지해.”

담백하고 건조한 지시였다.

‘델핀’이 아닌 유르디나의 가주로서 내리는 명령이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언니를 증오하는 세리아라지만, 가문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진짜였다.

결국 세리아는 한 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주의 명을 받드는 가신의 자세였다.

“돈이 필요하다면 가산이 거덜날 때까지 써 버려. 무력이 필요하다면 사병을 동원하고, 유혹이 필요하다면 그 몸뚱어리를 바쳐서라도… 아, 이건 무리려나.”

“제, 제 몸이 뭐가 어때서요?!”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논쟁에 불이 붙긴 했지만 말이다.

세리아는 더듬거리며 제 몸의 굴곡을 강조해야 했다.

“저도 어디 가서 꿀리는 몸은 아니거든요?! 언니와 별 차이도 없는…….”

“쯧쯧.”

세리아의 반론 따위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델핀은 혀를 차며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러니까 네가 숫처녀라는 거야. 서방님이 괜히 널 건드리지 않았겠어?”

“……이, 창녀가.”

아픈 상처를 찔린 세리아의 눈동자에 다시금 불꽃이 튀었고.

이내 가주의 집무실에서는 다시 한 번 폭풍이 몰아치고 말았다. 그 문 너머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는 가신들을 뒤로 한 채로.

유르디나 가문의 서글픈 근황이었다.

**

나는 앞섬을 여미며 외출을 준비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난 사건 이후 아카데미에서 나를 주목하는 인파가 늘어난 참이었다. 특히 나를 본 여자들이 수군대는 빈도가 높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하나였다.

과연 내가 성야제에서 누구와 춤을 출 것인가.

대세는 성녀였다. 수만 명 앞에서 고백이나 다름없는 입맞춤을 한 이후, 이미 내 짝은 성녀로 공인된 지 오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중의 기대가 그만큼이나 높았다.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던 여인이었다.

위기에 처한 여인을 구출하기 위해 단신으로 명예 재판에 도전하고, 수백 번에 이르는 죽음 끝에 성녀가 기적을 일으킨 이야기는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만일 내가 성녀를 짝으로 고르지 않으면 폭동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하지만 그에 맞서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페르쿠스 선배, 라이넬라 선배와 약혼한다고 하지 않았어?”

“요즘 라이넬라 선배가 보이지 않는 이유가 혹시…….”

“오늘은 유독 날이 좋지 않아서 그럴지도 몰라.”

후우, 하고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실 내 고민도 저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미 벌려놓은 일이 너무 많았다.

당장 북부에는 델핀 선배와 세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불어 약혼을 하기로 한 엘시 선배나, 비공식적인 연인 관계에 놓인 엠마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 같아서는 날이라도 잡고 이에 대해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당장 성녀도 사건의 뒤처리를 위해 성국에 남은 판이었다. 나 또한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셀린이나 리아를 돌봐야 할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그러나 업보는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되돌아오는 법.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너, 이 개새끼야……!”

증오와 원망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에 내 시선이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곱상한 외모를 지닌 갈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서 있었다.

정작 그 푸른 눈동자는 뒤집히기 직전이었지만 말이다.

엘시 선배의 남동생, 루핀이었다.

나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탁, 하고 짚었다. 두려운 마음에 라이넬라 가문의 편지조차 열어보지 못했지만, 그 심정은 십분 공감이 갔다.

딸과의 약혼을 앞둔 사내가 느닷없이 염문설을 뿌린다?

나 같아도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싶을 터였다.

“너, 너, 너 따위가 감히… 우리 누나를 배신해?! 그러도고 네가 희희낙락할 수 있을 줄 알아?!”

어디까지나 잘못한 쪽은 나였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조용한 곳에서 얽힌 고리를 풀고자 했다.

“미안한데, 루핀… 내가 지금 ‘좀’ 바쁘거든? 그러니까 이따 밤에 내 방에서…….”

“뭐?!”

그러나 이성을 잃은 루핀은 내 말에 더욱 광분하기 시작했다.

부릅떠진 그 눈동자에 실핏줄이 터져 나갈 정도였다.

“네 ‘좆’이 바쁘다고?! 이 미친 난봉꾼 새끼가!”

결국 나는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낯가죽을 덮어야 했다.

“제발 꺼져……!”

구경꾼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괜히 내 가슴을 푹푹 찌르는 듯했다.

아카데미의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

탁, 하고 묵직한 주머니가 탁자 위로 떨어진다.

엠마는 얼떨떨한 눈으로 맞은편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암청빛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사랑스러운 소녀가 생글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마면 될까요?”

터무니 없는 소리를 입에 담으며.

“그 암캐… 아니, 라이넬라 선배가 얼마나 주던가요?”

막후의 암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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