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1화 〉 6.5 고요한 밤, 성스러운 밤(3)
* * *
“넌, 넌 진짜 나쁜 새끼야…….”
취기에 젖어 울먹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이었으나, 내 맞은편에 앉은 인물은 이미 높은 도수의 술에 의해 흐물거리며 녹아내린 지 오래였다. 심지어 이곳은 단 둘뿐인 실내.
만일 상대가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었을 텐데.
나는 개탄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삼켜야 했다.
내 앞에서 추태를 부리고 있는 사내와 이미 면식이 있던 탓이었다.
루핀 라이넬라.
내 소중한 동료이자, 약혼을 맺을지도 모르는 여인의 남동생이었다. 차라리 엘시 선배라면 술에 취해 울먹이는 모습이 귀엽기라도 하지.
그렇다고 무작정 미래의 처남을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루핀의 한탄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내 술잔에도 독주가 찰랑이고 있었으나, 이미 취기 따위는 얼마든지 몰아낼 수 있는 경지에 오른 나였다.
그 증거로 내 숨결에서는 한 톨의 주향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취한 이는 오직 루핀뿐이었다.
그리고 일방적인 술 주정은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또 그럴 수만은 없는 사정이 있었다.
일단 죄인은 내 쪽이었으니까.
나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침음을 삼켰다.
“어떻게… 어떻게 우리 누나를 버릴 수가 있어?!”
“글쎄, 버린 적 없다니까.”
“그럼 그 소문은 뭐야!”
탁, 탁.
루핀의 얇은 팔이 파닥거리며 책상을 내리쳤다. 아마도 ‘쾅쾅’거리는 소리를 내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술에 취한 마법사에게 그만한 근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성국에서 낭만 소설 한 편을 썼던데?! 누명을 쓴 성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온 기사… 그리고 그 헌신에 감동한 천신이 기적을 내리기까지?”
“내가 봐도 멋진 이야기긴 해.”
“벌써 온 대륙에 소문이 다 퍼졌어!”
한참을 씩씩거리던 루핀은 그제야 힘이 빠졌는지 책상 위로 엎어졌다.
무기력한 한탄이 이어졌다.
“우리 라이넬라 가문의 꼴이 우스워졌다고… 기껏 약혼까지 추진했는데, 이게 뭐야……!”
내 시선이 슬쩍 품속을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 뜯어보지 않은 라이넬라 가문의 편지가 한 통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라이넬라 백작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만은 했다.
난데없이 가문의 대마법사 중 하나가 죽더니, 약혼을 추진 중이던 상대는 성국에서 열애담을 퍼트리기까지.
당장 뒷목을 잡고 쓰러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끄응, 하고 나는 옅은 신음을 흘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어떻게 할 거야? 상대는 무려 성인(?人)이라고… 우리 라이넬라 가문이 아무리 고위 귀족이라지만, 급이 딸려도 너무 딸려. 중혼조차 가당찮은…….”
“……그래!”
루핀의 넋두리를 들은 직후였다.
무심코 손뼉을 마주치며. 나는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루핀의 의아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뇌리에서 번뜩이는 밤상에 깊이 몰입한 뒤였다.
“그러면 되겠네, 중혼!”
물론, 루핀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돌려줄 뿐이었다.
“너 미쳤냐? 내 이야기 못 들었어? 중혼을 하고 싶어도, 성국이나 민중이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니까? 지금 온갖 곳에서 네 이야기를 본뜬 연극이 성행 중인데…….”
“제국의 5대 귀족 가문이 상대라면? 혹은, 황실이라면?”
내 반문에 루핀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대신 그는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더 있냐?”
그러든 말든, 나는 재차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을 따름이었다.
그간 곤란했던 문제가 한 번에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일단 중혼을 인정 받기만 하면, 아내가 둘이든 셋이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겠지. 루핀, 너 은근히 머리가 좋……!”
“죽어, 이 바람둥이 새끼야!”
정작 루핀은 눈이 돌아가 내게 술병을 휘두르려 들었지만 말이다.
당연하지만, 루핀의 반란은 금세 제압되고 말았다.
마법사의 비애였다.
나는 그렇게 취기와 충격으로 곯아떨어진 루핀을 뒤로 한 채 방을 나섰다. 그러고 보면, 슬슬 찾아가야 할 때가 되긴 했다 싶었다.
바로 엘시 선배.
그녀로부터 연락이 끊긴 지도 벌써 열흘이 넘었다. 또, 마침 돌려줘야 할 물건도 있던 참이기도 했고.
품속에서 칠흑의 막대가 웅웅 울고 있었다.
**
엠마는 무심코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탁자의 맞은편에 앉은 상대가 너무 거물이었던 탓이었다. 아직도 귀족을 상대할 때마다 가슴이 떨리곤 했는데, 설마 황족이 독대를 요청할 줄은 꿈에도 말랐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
비록 황위 계승서열은 한참 밀린다지만, 엄연히 용의 피를 잇고 있는 소녀였다. 평민은커녕 고위 귀족조차 마땅히 우러러 보아야 할 존재를 단 둘이 보고 있는 판이었다.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편이 더 이상했다.
사실 초면까지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미 북부에서 서로 낯을 익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이야.
혼란을 이기지 못한 엠마의 동공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반면 황녀의 안색은 평온하기만 했다.
“들었어요, 최근 씀씀이가 나아졌다고… 듣기로는 라이넬라 선배께서 도움을 주셨다던데, 맞나요?”
“네, 네… 그렇습니다, 전하…….”
엠마는 일단 순순히 사실을 읊으며 눈치를 살폈다.
도대체 황녀의 뜻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대략적으로는 감이 오긴 했지만, 보다 정확한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평민의 애환이었다.
혹시라도 귀족의 눈에 거슬리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어질 테니까.
그래서 황녀는 일부러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엠마의 심정은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
“하지만 최근 들어 다시 생활이 궁핍해졌네요? 설마, 저 바구니에 든 버섯으로 끼니를 때우시나요?”
황녀의 연회색 눈동자가 슬쩍 어딘가를 향했다. 그곳에는 바구니가 하나 위치하고 있었다.
그 위로 수북히 쌓인 버섯이 드러나 있었다. 엠마가 숲에서 따온 식용 버섯이었다.
마력이 풍부한 아카데미의 숲은 사시사철 영양소가 풍부한 버섯을 키워내곤 했다. 궁핍이 삶에 밴 엠마가 이처럼 좋은 식재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더불어 운이 좋으면 연금술 재료로 쓸 만한 버섯을 딸 수 있기까지.
나름대로 합리적인 동기에 의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엠마는 부끄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고개를 푹 떨구어야 했다.
이러한 까닭조차 구질구질해 보일 테지.
황녀는 엠마와 동떨어진 세계의 주민이었으니까.
이를 증명하듯, 황녀의 얼굴에는 어느덧 연민의 빛이 서려 있었다.
“아무래도, 라이넬라 선배가 금화를 넉넉히 챙겨 주지 않았나 보군요.”
“아, 아니에요!”
엠마는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싶어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황녀의 지긋한 시선이 엠마를 향했다.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엠마는, 얼어붙은 심장을 다독이며 조심스레 어휘를 골라 갔다.
“단지 제 낭비벽이 너무 심했을 뿐입니다. 라이넬라 아가씨께서는 넘치도록 많은 금화를 주셨지만, 연금술 재료나 본가에 송금해야 할 비용이 있어…….”
“네, 부족하네요.”
엠마의 말은 채 끝맺어지지도 못했다.
시시하다는 듯, 황녀는 그렇게 말하며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빙빙 돌렸다.
그 향긋한 다향조차 황녀의 낯빛에 파문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마치 황녀와 엠마가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듯.
“넉넉하다는 건 말이죠, 선배… 아무리 쓰고 써도 남는 금화가 있어야 한단 뜻이에요. 하물며 연금술 재료와 본가에 부칠 생활비? 어떻게 그걸 낭비라 부를 수 있죠?”
그러면서 황녀는 눈짓으로 탁자 위에 올라간 금화 주머니를 가리켰다.
엠마의 멍한 시선이 묵직한 주머니에 고정되었다.
“5,000 골드.”
상상도 못한 금액에 엠마의 숨이 턱, 하고 틀어막혔다.
대다수의 평민은 평생을 벌어도 쥐어 볼 수 없는 금액이었다. 심지어 어지간한 귀족들조차 선뜻 내놓을 수 없는 거금이기도 했다.
고위 귀족이 아닌 이상, 이만한 금액을 개인이 휴대하고 다니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그 정도의 현금을 앞두고도 황녀는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자그마한 선물이에요. 부디 받아주시길.”
싱긋, 미소를 짓는 황녀의 낯빛에서는 일말의 계산이나 음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순수한 호의로 지불하는 금액이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엠마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저, 황녀 전하? 아무래도 이 금액은 제게 너무 과분한…….”
그렇게 고개를 내저으며, 엠마가 금화 주머니를 황녀 쪽으로 다시 밀치려 하던 찰나.
“……선배.”
황녀의 입에서 예의 바른 어조가 새어 나왔다.
맑고 청아했지만, 한편으로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 목소리였다.
“물론 주제를 아는 건 중요해요. 하지만, 바보를 자처할 필요까지는 없죠.”
“무슨 말씀이신지…….”
“얌전히 받기나 하란 소리에요.”
그 한 마디가 신호였다.
황녀의 분위기가 대번에 일변했다. 입꼬리는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뇌수를 꿰뚫기라도 할 듯 날카로운 그 시선.
어느덧 소녀의 연회색 동공이 세로로 찢어져 있었다.
“과분하다고요? 그걸 왜 선배가 판단하죠? 나는, 용의 피를 이었어요.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라면 강자의 오판을 이용할 줄도 알아야죠.”
“하, 하지만…….”
“정 부담스럽다면, 자그마한 도움을 주어도 괜찮아요. 이 또한 가진 자의 미덕일 테니.”
엠마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지난 귀향제 이후, 황녀는 발톱을 숨긴 채 얌전히 살아가는 쪽을 택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과거의 본색을 다시 드러내다니.
그 느닷없는 변심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엠마는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되물어야 했다.
“제 출신이 미천한 탓에, 도무지 전하의 저의를 짐작하기 힘듭니다. 도대체 무얼 원하시는 건지…….”
크흠, 하고 황녀가 귀여운 헛기침을 한 건 그때였다.
다시 한 번 분위기가 일변했다.
속내를 알 수 없던 뱀 한 마리는 어디 가고, 쩔쩔 매며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귀여운 소녀 하나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극적인 변화에 엠마는 더욱 의아한 눈빛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황녀는, 이내 결심했다는 듯 속삭였다.
“서, 성야제…….”
모기만한 목소리였다. 엠마의 고개가 갸웃 기울자, 황녀는 더욱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치고 말았다.
“성야제에서, 이안 경과 짝을 맺고 싶어요!”
너무나 소소한 바람이었다.
엠마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유였다. 여인은 넋이 나간 채로, 한동안 황녀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들어야 했다.
“그, 라이넬라 선배나 성녀님이 무서운 건 아니니까요? 딱히, 예전에 혼났다고 해서 기가 죽었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저, 용의 피를 이었으니까요! 단지 엠마 선배는 착해 보이고, 또 이안 경과도 가까워 보이니까… 또, 또 약혼이니 하는 소리에 초조해진 것도 아니에요? 지, 질투는 아니에요. 네, 절대로 질투는…….”
이윽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황녀의 고개가 툭 떨구어졌다.
그리고 힐끔힐끔 엠마의 눈치를 살피다가, 애처로운 목소리를 짜내 한 마디.
“도, 도와 주시면 안 될까요……?”
엠마는 저도 모르게 픽, 하고 얕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황녀가 좀 사람처럼 보였다. 그 나이대의 소녀는 별반 다를 바 없구나, 하고 엠마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엠마 또한 황녀와 같은 사내를 연모하고 있었으니.
그래서 엠마는 한결 편안해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라이넬라 아가씨한테 여쭤 보고요.”
의외로 엠마는 의리 있는 여인이었다.
황녀가 2만 골드나 되는 현금을 제시할 동안 꼼짝도 하지 않을 만큼.
결국 황녀는 그날 종일 울며 매달려야 했다.
**
그렇게 성야제를 앞두고 각각의 인물들이 교차하는 사이.
아카데미에 또 한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소녀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자연스레 수많은 시선이 몰려들었다. 찰랑이는 회색 머리카락을 배경으로, 눈으로 빚은 듯한 새하얀 피부와 얼음 호수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도도하고 차가운 낯빛을 본 몇몇 행인이 속닥거렸다.
“유르디나의 싸가지잖아… 언제 돌아왔지?”
“언제적 별명이야? 이제는 ‘얼음 공주’라고 불러 드려야지, 무려 유르디나 가문의 실세 중 하나이신데..”
소녀의 이름은 ‘세리아 유르디나’였다.
한때는 멸시와 냉대 속을 살아가던 그녀였다. 하지만 단 몇 달만에 여론은 반전되어, 아카데미의 몇몇 학생들은 세리아를 동경의 시선으로 우러러 보기까지 했다.
그야 대륙의 어둠과 맞서 싸우는 일행 중 하나가 아닌가.
저 차가운 낯빛에 가려진 고심이 얼마나 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정작 세리아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뿐이었지만 말이다.
‘이안 선배 보고 싶다.’
넋을 놓고 걸으며, 세리아는 욕망에 찌든 뇌리로 멍하니 사고했다.
‘이안 선배의 품에 안기고 싶다. 이안 선배의 냄새 맡고 싶다. 이안 선배를 덮치고 싶다…….’
델핀과의 연이은 전투는 세리아에게 강한 피로와 스트레스를 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집착증이 심했던 세리아가 이성의 끈을 놓기 충분할 정도로.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스산한 광채를 흩뿌렸다.
만일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죽여버려야지.’
델핀이 세리아에게 몸소 가르쳐 주었듯이.
그렇게 망가진 소녀 하나가 아카데미에 당도했다.
폭풍의 전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