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2화 〉 6.5 고요한 밤, 성스러운 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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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지도자라면 시각을 지배할 줄 알아야 한다.”
어느 날 밤, 황제를 독대한 자리에서 시엔이 들은 말이었다.
최근 급변하고 있는 정국에 관해 논하기 위해 불려온 참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막 귀환한 황녀로서는 느닷없는 소리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산상법정(山上??)에서 벌어진 사건은 성국의 권력 구도에 대규모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는 곧 대륙의 판도에도 변화가 있으리란 소리와 다름없었다.
그동안 답이 없던 천신이 사랑하는 딸을 내려보냈다.
천신을 믿는 이들은 대륙 전역에 퍼져 있었다. 굳이 성국이 아니더라도, 천신의 자녀를 자처하는 신도는 어디에나 있었다. 물론 그 수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기도 했다.
과연 그들이 산상법정의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 것인가.
고민조차 할 필요 없었다. 기적의 당사자인 성녀의 이름값은 나날이 고점을 갱신하고 있었고, 거리마다 천신을 찬미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고로 민중의 지지는 위정자의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인 법.
제국으로서도 성녀를 주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성녀와 함께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젊은 기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안 페르쿠스.
어느덧 ‘어둠을 걷어내는 별’이라는 찬사마저 받는 사내였다. 그가 산상법정에서 보여준 활약은 수많은 대중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랑 이야기란 대개 그렇지 않은가.
‘악신의 권속’이나, ‘암흑교단의 음모’보다는 장삼이사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주제였다. 하물며 수백 년 동안 성국 최강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성자의 몸에 생채기를 내기까지.
대륙의 이목은 어느새 사내의 다음 행보에 몰려 있었다.
황녀가 황궁에 불려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시엔은 황실의 일원일 뿐만 아니라, 이안의 동료로서 성녀와도 면식이 있었다. 당연히 일련의 사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볼 만했다.
그때였다.
한창 사모하는 사내의 자랑으로 소녀의 가슴이 부풀었을 무렵, 황제는 뜬금없는 조언을 건넸다.
“시엔, 알고 있느냐? 인간은 눈에 많은 것을 의존하지… 누구든 제 시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너도, 나도… 심지어 마스터에 이른 초인들이라도 마찬가지지.”
“네, 네. 알고 있지만요…….”
황녀는 그 저의를 짐작할 수가 없이 흘끗흘끗 황제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황제는 언제나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소 지치고 피로한 눈빛, 주름이 지기 시작한 얼굴에는 옅은 그늘이 져 있었다.
오직 청색의 동공만이 흐릿한 애정을 담아 시엔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 성야제가 얼마 남지 않았더구나.”
“……?”
시엔의 고개가 다시 한 번 갸웃 기울었다.
그러든 말든, 황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성야제는 천신의 강림을 기념하는 날, 함께 짝을 이루어 춤을 춘 남녀는 천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 천신의 존재가 입증된 이상, 올해의 성야제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관심을 받을 거다.”
황제의 손이 턱, 하고 시엔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시엔은 설마, 하는 눈으로 제 아비를 바라보았다.
“네가 이안 경의 짝이 됐으면 좋겠구나.”
그 짧은 바람에 소녀의 연회색 눈동자가 멍청해졌다.
그조차도 잠시, 이내 시엔은 몸을 바르르 떨면서 한껏 겁 먹은 얼굴이 되었다.
“저, 저, 저 따위가 어찌 감히……!”
“왜 안 되겠느냐?”
피식, 하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황제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따라 소녀의 얼굴이 찌푸려지고 펴지기를 반복했다.
“너는 용의 딸인데… 이 기회에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무나.”
허허로운 미소를 지은 황제의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그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무얼 비추고 있는지, 용의 눈을 가진 시엔조차 맞추지 못한 문제였다.
“천신께서 사랑하시는 딸이 있듯이, 내게도 사랑하는 딸이 있단 사실을.”
그래서였다.
황녀는 아카데미에 돌아온 이후, 보다 적극적인 개입에 나섰다. 비단 황제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는 뒤쳐질 수 없다.
조급증처럼 황녀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황제의 말처럼, 모든 사람들의 인식에 자그마한 균열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기회는 ‘성야제’가 유일했다.
성녀뿐만이 아니다.
이안 경의 주변에는 나 또한 있다.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황녀는 음험한 모사꾼으로 돌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황녀에게는 천운이 따르고 있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성녀는 암흑교단의 잔당을 축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다음으로 유력한 후보자인 엘시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고, 그 외의 여인들 또한 마땅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멍청하게도.
몇 번 순진한 척을 해주니, 황녀를 귀여운 애완동물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야 이안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애완동물이라도 상관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황녀의 입가에 스산한 조소가 맺혔을 무렵이었다.
“저, 황녀 전하……?”
황녀의 첫 번째 사냥감이 곤혹스러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연회색빛 시선이 닿자, 평민에 불과한 엠마는 더욱 난감한 표정으로 애원해야 했다.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보여야 할 마땅한 예우였다.
“이, 이제 그만 하셔도…….”
“안 돼요!”
그러나 황녀는 평민의 애원 따위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히 고개를 내저을 따름이었다.
“많이 피곤하시잖아요. 앞으로도 한동안 고생하셔야 할 텐데…….”
결국 엠마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고개를 푹 떨구는 수밖에 없었다.
황녀의 가녀린 손이 엠마의 목과 어깨를 꾹꾹 주무르고 있었다.
누가 본다면 불경죄로 사형 언도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황녀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엠마 선배… 에헤헤.”
그렇게 오랜 설득 끝에, 엠마는 황녀를 지지하기로 했다.
황녀의 첫 번째 음모가 성공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
엘시 선배의 거처는 멀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대개 공방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마법학부의 고학년에 이른 학생들 중에는 기숙사를 신청하지 않는 학생마저 있을 정도였다.
어차피 대다수의 생활을 공방에서 해결하니까.
연구나 숙식은 물론이고, 수련까지도 가능한 장소가 공방이었다.
내가 도달한 곳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법학부에서도 수재로 손꼽히는 엘시 선배답게, 넓고 쾌적한 공간을 자랑하는 공방이었다. 아직 들어서지도 않았지만 문 너머에서도 그 규모가 짐작이 갔다.
한 층에 방이 단 두 개 밖에 없을 정도였으니.
나는 한동안 바깥에서 그 자태를 감상하고 있다가, 이내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재차 문을 두드리자, 이내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바쁩니다!”
상상 이상으로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러나 예상하고 있던 바였기 때문에, 나는 다시금 문을 두드렸다.
약이 바짝 올라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내 정체를 밝혀야 할까, 싶었을 무렵.
쾅, 하고 문이 거칠게 열어젖혀졌다.
그 너머에는 왼손을 이마에 앉은 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갈색 머리카락과, 낯빛에 선연한 피로가 여인의 상태를 드러냈다.
오랜 시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다.
제대로 꾸미지 못한 모습조차 흠 잡을 데 없이 사랑스러웠다. 나로서는 도리어 신선하다는 감상마저 받을 정도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나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신경질적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엘시 선배의 눈이 서서히 나를 향했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그리고 침묵.
나와 눈을 마주친 엘시 선배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고, 나는 무어라 인사를 건네야 할지 애매해 한동안 머뭇거렸다.
가까스로 짜낸 인사는 고작 한 마디.
“오랜만…….”
쾅, 하고 거칠게 문이 닫혔다.
뒤이어 소녀가 수치심에 가득 차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악! 악! 아아아아악!”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을까.
나는 한참 동안이나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얌전히 인내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엘시 선배 또한 나름 필사적인 노력 중인 듯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난 후에야 다시금 문이 열렸다.
다시 나타난 엘시 선배는 방금 전과 양 딴판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고깔모자는 물론이고, 단정히 정리된 옷매무새와 옅은 화장이 눈에 띄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세안까지 마친 건 물론이었다.
내가 엘시 선배의 변신에 얼이 빠진 사이, 엘시 선배는 생긋 미소를 머금었다.
“오셨어요, 주인님?”
“아니, 뭐…….”
무어라 말이라도 얹고 싶었지만, 엘시 선배의 미소가 내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방금 전의 조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나는 눈치껏 엘시 선배의 환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엘시 선배.”
“뭐, 이래저래 바쁘다 보니…….”
엘시 선배는 나를 공방 안에 들이면서도, 나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갑작스레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삼촌을 잃은 엘시 선배의 마음이 어땠을지, 나로서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당연히 골방에라도 틀어박혀 제 마음을 달래고 싶었을 테지.
오히려 지금껏 위로를 해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었다.
이제 곧 약혼까지 할 사이인데.
우물쭈물하던 엘시 선배가 물음을 던진 것은 그때였다.
“그, 그래서 왜 온 거야?”
내 눈동자가 슬쩍 엘시 선배를 향했다. 여전히 엘시 선배는 내 눈을 피하면서, 모자의 챙을 꾹 눌러 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애꿎은 마룻바닥만 발끝으로 긁으면서 말이다.
“할 말이 있어서 온 거 아니야? 미안하지만, 나 요즘 진짜로 바빠서…….”
“성야제.”
난데없이 꺼낸 한 마디에 엘시 선배의 몸짓이 멎었다.
블루 사파이어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멀거니 나를 향했다.
“함께 춤추시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위로는 고작 이 정도뿐이었다.
엘시 선배의 입술이 달싹거리다 닫혔다.
그리고 정적.
비로소 나와 엘시 선배의 시선이 나란한 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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