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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93화 (493/649)

〈 493화 〉 6.5 고요한 밤, 성스러운 밤(5)

* * *

앙증맞은 입술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말라 가는 혀를 침으로 적시고.

엘시 선배의 머뭇거림은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다. 나는 굳이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공방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곳곳에 피땀 어린 노력의 흔적이 엿보이는 장소였다.

수많은 필기가 남은 책이라든지,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가득 찬 도화지나 알 수 없는 문자로 쓰인 논문 따위가 하나둘씩 눈에 띄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쓰디쓴 미소를 깨무는 수밖에 없었다.

공부와 연구, 수련 중 그 무엇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엘시 선배는 마냥 절망에 빠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절망의 밑바닥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도록.

그 점이 못내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그때였다. 엘시 선배가 자그마한 목소리를 짜낸 것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난데없는 고백을 따라 내 시선이 서서히 옮겨졌다. 그 끝에, 고깔모자를 푹 눌러 쓴 소녀가 하나 서 있었다.

꾹 움켜쥔 모자 챙이 얼굴을 반절이나 가리고 있었다. 낯빛을 읽어 내기는 힘들었지만, 악물어진 잇새로 그 심정을 짐작해 볼 만했다.

분한 걸까.

이를 입증하듯, 소녀의 입술이 옅은 떨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잖아? 지난 전투에서, 나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까… 짐덩이 노릇이라면 몰라.”

“엘시 선배…….”

내 입에서 절로 한숨 섞인 호명이 새어 나왔다.

오해라고, 나는 엘시 선배를 대신해서 변명해 주고 싶었다.

밀실은 마법사에게 유리한 환경이 아니었다. 레이놀드 씨처럼 독특한 전투 방식을 채택하지 않는 한, 제한된 공간에서 마법사가 투사할 수 있는 화력은 한정적이었다.

더불어 포위도 쉽고, 거리를 벌리기도 마땅치 않다면야.

모로 보나 지난 전투에서 엘시 선배가 활약할 여지는 적었다. 다시 말해, 이처럼 자책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엘시 선배의 뜻은 이미 확고해 보였다.

“내가 너무 안일했던 거야.”

자그마한 빈틈조차 보이지 않는 단언이었다.

때때로 단단히 굳은 결심은 일말의 설득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무어라 반론이라도 해보려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모자 챙을 쥔 엘시 선배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네가 배신자의 칼에 찔리는 꼴을 보면서… 묶여서 고통 받는 꼴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알아? 삼촌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널 잃었을 거야.”

“선배…….”

“그리고 결국 삼촌을 잃었고.”

어느덧 물기로 함뿍 젖은 목소리였다.

나는 이 무렵에서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했다. 그저 한 걸음을 내딛어, 엘시 선배와의 거리를 좁혔을 따름이었다.

“다시, 다시는…. 흐윽, 잃고 싶지 않아…….”

이윽고 흐느끼는 소녀가 내 품에 안겼다.

나는 엘시 선배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말없이 엘시 선배의 등을 토닥였다. 키 차이로 무릎을 꿇으니 내 몸이 살짝 엘시 선배를 떠받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자 묘한 충족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오직 엘시 선배만이 선물해 줄 수 있는 감각이었다.

“너만큼은, 흑… 너만큼은, 절대로…….”

“떠나지 않아요.”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는 엘시 선배를 달래면서, 나는 강한 확신을 담아 말했다.

“처삼촌과 약속했잖습니까. 이렇게 약혼자가 눈물이 많은데, 제가 어딜 가겠어요?”

내 위로를 들은 엘시 선배는 더욱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여태껏 몇 번이고 울고 싶었을 터다.

공방에 틀어박혀, 홀로 눈물을 훔친 적도 많았겠지.

그래서 나는 엘시 선배가 터트리는 감정의 격류를 묵묵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엘시 선배가 더는 외롭지 않기를, 더 나아가 내가 자그마한 힘이라도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후로도 엘시 선배는 한참 동안이나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소녀를 품에 안고 있었을까.

“……나, 강해질 거야.”

습기로 눅눅히 가라앉은 선언이 이어졌다. 내 손이 말없이 엘시 선배의 등을 쓸어내렸다.

“다시는, 다시는 널 뺏기지 않기 위해… 그러니까, 아주 잠깐 동안은 양보할게.”

완곡한 거절이었다.

설마 엘시 선배한테 차일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자그맣게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이미 엘시 선배의 각오까지 들어버린 마당이었다.

나로서는 기꺼이 엘시 선배를 응원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결단을 내린 내 손이 품속을 더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엘시 선배에게 돌려주어야 할 물건을 찾아낼 수 있었다.

칠흑의 막대.

레이놀드 씨의 유산이었다. 산상법정에서는 도움을 받았으나, 이제 제 주인에게 되돌아갈 차례였다.

나는 막대를 건네며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엘시 선배.”

“……?”

엘시 선배의 의아하다는 눈빛이 나를 향했다. 이제야 마주하는 푸른 눈동자에, 나는 픽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절 믿어 주셨잖아요. 그 막대 덕에 많은 용기를 얻었어요. 그리고, ‘경계 너머’를 볼 때도 도움이 됐고.”

다시 되짚어 봐도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경계의 너머.

그곳에는 세계의 이면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의미의 파도, 그 안에서 자아 따위는 티끌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할 뿐이었다.

그때 칠흑의 막대가 도움을 주었다.

어떠한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칠흑의 막대가 끝없이 울고 있었던 기억이 났다. 본능적으로 나는 이 막대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러므로 칠흑의 막대는 더더욱 엘시 선배에게 되돌아가야 했다.

‘대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진리’를 마주해야만 했으니까.

“앞으로는 종종 연락해요. 너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우리, 약혼자잖아요.”

이를 끝으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엘시 선배는 일순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는지 한껏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물에 젖은 낯이 퍽 매력적이었다.

“……응!”

그렇게 나는 엘시 선배와의 짧은 재회를 마쳤다.

슬프지는 않았다. 엘시 선배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를 보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소녀는 다시 한 번 땅을 짚고 일어날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

“저, 이안 님? 그래서 어떤 분과 짝을 맺을 생각이신지……?”

말간 햇살 속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문부의 상층, 부장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 위에는 낯선 주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나였다.

본래 이 집무실의 주인은 네리스 선배였으나, 오랜만에 찾아온 나를 얌전히 둘 그녀가 아니었다.

나보다 상석에 앉을 수 없단 핑계로 기어코 나를 이 자리에 앉힌 것이다.

물론 앉아 보니 편하기는 했다. 돈이 썩어 넘치는 제국 첩보부답게 의자도 고급품을 쓰는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 취해 나른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한사코 상석을 거부하던 과거가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내 미지근한 시선이 멀거니 네리스 선배를 향했다.

갈색 머리카락, 진녹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앞머리에 맵시를 준 머리핀이 유독 눈에 띄었다.

예전에는 좀 더 싸늘하고 까칠한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힐끗힐끗 내 눈치를 살피는 귀여운 선배가 하나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간 좀 친해진 덕에 날 무서워하는 기색은 덜했지만 말이다.

이쯤에서 나는 흐음, 하고 침음을 삼키며 살짝 시선을 돌렸다.

답할 말이 마땅치 않다는 신호였다.

“글쎄,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

“그, 외람된 말씀이오나…….”

네리스 선배는 내 시큰둥한 태도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이마에 맺히기 시작한 식은땀이 네리스 선배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좀 친해지긴 했어도 상관은 상관이었다. 그야 마냥 편히 대할 수만은 없을 터였다.

“전투가 그렇듯이, 무도 또한 함께 합을 맞출 상대가 중요합니다. 특히, 무도회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이끌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그럼 네리스 선배는 어떻습니까?”

내 장난스러운 반문에, 네리스 선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굳이 부연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성야제의 짝, 아직 정하지 않았죠? 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아, 그, 그, 그……!”

그제야 내 말뜻을 이해한 네리스 선배의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더듬거리며 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두 팔을 허우적거리기까지.

여태껏 봐 왔던 네리스 선배 중에서 가장 당황한 모습이었다.

너무 짓궃었나.

이윽고 나는 옅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젓는 수밖에 없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그래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싫어할 필요까지는…….”

“시, 싫지 않아요!”

반사적으로 높아진 목소리였다.

이제는 내가 의아한 낯빛을 할 차례였다. 황금빛 눈동자가 멀거니 움직이자, 네리스 선배는 쩔쩔 매며 더듬거리는 음성을 토해 냈다.

“절대, 절대 싫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조금……!”

그때였다.

저 멀리에서, 잔향처럼 어떤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와 네리스 선배의 몸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얼핏 귓가를 스친 그 소리가, 너무나 익숙했던 탓이었다.

비명?

“……들으셨습니까?”

내 은근한 물음에 네리스 선배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비명이 들려오는 빈도가 점점 짧아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소음의 진원지는 점점 더 집무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명백한 적습이었다. 그리고 이는 ‘경계 실패’라는 뜻이기도 했다.

네리스 선배의 표정이 참혹히 무너져 내렸다. 하필 직속상관 앞에서 이러한 추태를 부리다니, 죽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내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도대체 누구지?

들려오는 소리를 종합해 볼 때, 상대는 단 한 명뿐이었다.

단신으로 신문부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실력이 필요했다. 이미 나 또한 겪어 본 일이라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 익스퍼트.

그중에서도 꽤 실력 있는 축에 속해야 했다. 나는 흥미진진하다는 눈으로 문 너머를 응시했다.

마침 그곳에서는 보초를 서던 신문부원의 제지가 이어지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이곳은 출입 금지… 아악!”

단 일합.

아니, 충돌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당해 버렸다는 뜻이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네리스 선배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쾅, 하고.

그 의문에 대답하듯 집무실의 문짝이 터져 나갔다. 산산조각 난 목편 사이사이로 핏자국이 비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하던 네리스 선배의 몸이 멈칫했다. 그러든 말든, 상대는 말없이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었을 따름이었다.

푸른 눈동자가 먼지 구름 사이로 들불처럼 타올랐다.

이윽고 회색의 머리카락이 드러나자,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세리아 유르디나.

응당 북부에 있어야 할 후배가, 느닷없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뺨에 몇 방울의 핏자국을 남긴 채로.

묘하게 요사스러운 분위기였다.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차갑고 날카로운 기세가 인상 깊었다.

서늘한 낯빛을 한 소녀와 내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기를 잠시.

팍, 하고 소녀의 신형이 흩어졌다. 네리스 선배가 대응에 나서려 했으나, 그보다 소녀가 내 품을 파고드는 쪽이 더 빨랐다.

그러지 않아도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 있던 나였다.

책상을 뛰어넘어 내게 날아드는 소녀를 어찌할 방도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의자 채로 뒤로 넘어져,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볼을 비비적대는 후배를 바라보아야 했다.

“선배! 보, 보고 싶었어요… 흐윽, 흑… 그, 그 암캐년이 어찌나 괴롭히던지……!”

그렇게 세리아는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며, 내 옷가지에 코를 파묻은 채 심호흡을 시작했다.

나와 네리스 선배의 시선이 멀거니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 진녹색 눈빛이 내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오직 하나뿐.

'나도 몰라.'

나는 입모양으로 그렇게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로 뜬금없는 재회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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