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4화 〉 6.5 고요한 밤, 성스러운 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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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첩보부의 요원이자, 아카데미 지부장인 네리스 핀들스턴.
운 좋게도 제국의 5대 귀족 가문 중 하나에 입양된 여인이었다. 다만 권리의 총량은 대개 의무의 무게와 비례하는지라, 네리스의 인생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부터 받아 온 훈련이 그랬다.
하루 네 시간이라도 잠들 수 있는 날이 드물 정도였다. 한창 수면을 취해야 할 연령대임에도 불구하고, 네리스는 종일 외국어를 공부하거나 몸을 단련해야 했다.
성장 자체는 제대로 이루어졌다.
핀들스턴 가문이 지닌 비전의 약물 덕이었다. 육체의 피로를 강제로 해소하고, 어린 아이의 성장을 촉진하는 놀라운 효능의 물약이었다.
유일한 단점은 강한 통증을 수반한다는 것뿐.
핀들스턴 후작은 유독 고통 내성 훈련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약물마저 투여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네리스는 점점 더 약물과 고통에 공포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공포는 숭배를 수반한다.
네리스가 고문과 독을 유달리 사랑하는 까닭은 어린 시절의 상처와 관련이 있을 터였다. 이러한 성장 환경 속에서, 여인은 부동심을 배웠다.
어떠한 일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한때 이안에 의해 무참히 깨져 나갔다고는 하나, 네리스는 제국 첩보부의 일원으로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어지간한 사안으로는 결코 냉정을 잃지 않으리라 다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네리스의 결심은 또 다시 위기를 마주했다.
“근래 들어 알펜하우저의 쌍둥이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건 맞습니다. 대개는 제국의 유력 인사들과 접촉하고 있고, 특히 아카데미의 수뇌부와도…….”
후우, 하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가 네리스의 귀를 간지럽혔다.
무시해야 한다. 무시해야 한다.
네리스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던 문장을 반복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수뇌부와도 접촉 빈도가 상당히 늘어났습니다. 다만 이는 비단 알펜하우저의 쌍둥이에 한정된 경향은 아닌 듯합니다.”
“어째서요?”
“아카데미 자체가 부산스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알펜하우저의 쌍둥이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내의 유력 인사들의 동향 대부분에서 이상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흐음, 하고 네리스의 보고를 들은 사내는 눈을 감고 침음을 삼켰다.
그의 낯빛에 은근한 고민의 기색이 스쳤다. 아무래도 알고 있는 정보가 있는 듯한데, 네리스는 굳이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내에게 배운 처세였다.
‘제국의 까마귀는 까막눈이어야 한다.’
네리스는 그 지시를 철저히 가슴에 새겼다.
“다만, 실질적인 정보를 지닌 인사는 극소수로 보입니다. 대개의 인사들은 혼란을 숨기지 못하는 기색…….”
킁킁.
지나치게 노골적인 소리였다. 결국 평정이 깨진 네리스의 이마에 빠직, 하고 실핏줄이 돋았다.
그러자 이안 또한 난감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거슬리는 소음의 근원은, 이안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니까.
세리아 유르디나.
‘유르디나의 싸가지’라는 별명으로 유명했으나, 그 이름값이 올라간 이후에는 ‘얼음공주’라는 고상한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느 쪽이든 쌀쌀맞은 소녀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말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세리아는 나른한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이안에게 매달려 있었다. 사내의 팔을 끌어안은 채로, 볼을 부비는 소녀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더불어 이따금씩 이안의 냄새를 맡기까지.
낯뜨거워 차마 두 눈으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드물게도 네리스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저, 이안 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제국 첩보부의 일원으로서 보고를 받는 자리에 외부인이 동석하는 건…….”
“괜찮아요.”
대답은 이안이 아닌 소녀의 입에서 나왔다.
정작 눈길 한 번을 던지지 않으면서, 세리아는 볼을 이안의 팔에 부비적댔다.
“제가 왜 외부인이에요? 이안 선배가 이곳에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이안이 어디에 있든 세리아가 제국 첩보부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당연히 이 자리에 동석해야 할 당위성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리스가 강하게 나가지 못하는 까닭.
그것은, 세리아의 전적 탓이었다.
집무실 바깥에는 신음을 흘리며 엎어진 부하들이 수두룩했다. 전원이 달려들었으나, 이 괴물 같은 여자 하나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실력이 확연히 늘었다.
네리스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그때였다. 이안이 한숨 섞인 질문을 던진 것은.
“……어떻게 찾아온 거야?”
“이안 선배의 냄새가 났거든요.”
세리아의 음색은 담담하기만 했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투였다.
“그렇게 한창 이안 선배를 찾아가고 있는데, 웬 이상한 사람들이 절 막아서지 않겠어요?”
이상한 사람은 당신이야.
네리스는 목젖까지 치달은 일갈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일단 상대는 유르디나 가문의 실권자 중 하나였다.
굳이 갈등을 조장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전부 쓸어버렸어요. 에헤헤…….”
세리아의 귀여운 웃음소리에, 네리스는 끙끙거리며 불타는 가슴을 달래야 했다.
참야아 한다. 참아야 한다.
그렇게 되뇌이는 사이, 이안의 황당하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세리아…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바로 그때였다.
“그 년이 알아서 하겠죠.”
일순 주위의 온도가 몇 도나 내려가는 착각이 일었다. 네리스조차 깜짝 놀라 세리아를 다시 보았을 정도였다.
어느덧 소녀의 입가에는 싸늘한 호선이 맺혀 있었다. 어찌나 차가운 미소였던지, 그 푸른 눈동자가 한겨울의 서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살기였다.
그것도 솜털이 쭈뼛 설 만큼 강렬한 살기.
네리스는 본능적으로 제 품에 남은 단검의 수를 계산했다. 하지만 소녀의 감정은 네리스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일부러 허락까지 받아왔어요… 이안 선배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를 써도 된다고.”
생긋, 하고 눈웃음을 그리는 눈꼬리가 묘하게 요사스러웠다.
이윽고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이동했다. 사내와 단 둘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벗어나, 오랜만의 재회를 방해하는 불청객을 마중하기 위해서.
“그래서, 이안 선배… 이 여자는 누구에요?”
“일단은 내가 상관이야. 그리고 오늘 일은 비밀이니까, 어디 가서 말하지 말고.”
“……아하.”
세리아는 작위적인 탄성을 터트리며, 슬쩍 네리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보았다.
어째서일까.
네리스는 묘하게 불쾌한 기분이 들어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거짓 미소조차 유지하기 힘들었다.
“생각해 보니, 어디서 뵌 적이 있는 듯도 하고…….”
당연히 본 적이 있겠지.
네리스는 이안과 함께 북부에 동행했다. 처음에는 정체를 숨겼지만, 이후에는 전투에 나서며 어쩔 수 없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를 모를 세리아가 아닐 텐데.
어느덧 소녀의 낯빛은 딱딱히 얼어붙어 있었다. 네리스를 응시하는 그 눈동자에선 빛이 소멸한 지 오래였다.
“조심해야겠네요.”
누구한테 하는지 모를 경고였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지, 혹은 네리스에게 던지는 말일지.
어느 쪽이든 네리스는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소중한 일터와 부하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당사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저리 뻔뻔히 굴 수 있을까.
이래서 네리스는 귀족이 정말 싫었다.
무심코 새어 나온 한 마디를 참지 못할 만큼.
“……그러게요.”
얼어붙은 두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네리스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은 채로, 소녀의 싸늘한 응시를 받아넘겼다.
“조심하셔야겠어요, 여러모로.”
그렇게 침묵에 눌린 시간이 지나갔다.
일 초, 이 초, 삼 초…
직후, 소녀가 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네리스 또한 곧바로 두 손에 단검을 들며 응수했다.
아카데미 지부장으로서 마땅히 응해야 할 승부였다.
그래, 이곳에 자리하고 있던 사내만 아니었다면.
“그만해라, 진짜…….”
한숨 섞인 애원 끝에, 이안은 결국 손도끼를 뽑아들어야 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안의 애정 어린 지도가 이어진 뒤에야, 세리아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네리스는 손도끼를 보자마자 덜덜 떨며 엎어져 버렸고 말이다.
내게 새로 찾아온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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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도 세리아의 동행이 이어졌다.
그간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보상 받겠다는 듯, 세리아는 내게 강한 집착을 보였다. 오죽하면 기숙사 방문 앞에서 꼬박 밤을 새우며 나를 기다렸을 정도였다.
나로서는 다소 난감한 상황이었다.
예전에도 세리아의 의존심이 강하기는 했지만, 이만큼은 아니었다.
그나마 짐작이 가는 사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세리아가 내게 고백한 것.
이미 마음을 털어놓은 지 오래였으니, 세리아로서는 더 이상 스스로를 억눌러야 할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노골적인 집착을 보이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델핀 선배의 존재.
도대체 자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세리아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두 사람의 사이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였다.
그 기억이 세리아를 더욱 폭주하게끔 하는지도.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성야제’까지는 고작 하룻밤만의 말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러다가 작년처럼 레토와 함께 춤을 추어야 하나 걱정했는데, 마침 세리아가 돌아왔으니 이제 짝을 이룰 걱정은 없었다.
설마 세리아까지 나를 차겠어.
이처럼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앗, 이안 경!”
저 멀리에서, 어느 소녀가 폴짝폴짝 뛰며 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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