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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95화 (495/649)

〈 495화 〉 6.5 고요한 밤, 성스러운 밤(7)

* * *

그 밤하늘을 닮은 암청빛 머리카락만 봐도 알 만했다. 내 동료 중 하나인 제국의 제5황녀, 시엔이었다.

드물게도 황녀의 곁에는 아이린 경 대신 또 다른 여인이 동행 중이었다.

내게도 그리운 얼굴이라, 나는 대번에 반색하며 손을 흔들고 말았다.

“황녀 전하, 엠마!”

엠마는 늘 그렇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신분 차이 탓에 나와의 관계를 숨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반면 황녀는 종종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반가움을 유감 없이 뽐내고 있었다.

“드디어 뵙네요, 이안 경!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성국에서도 활약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과연 이안 경… 제 기사가 되어 주실 분은 이안 경밖에 없어요!”

두 손을 모은 채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을 보내는 황녀의 모습은, 그래.

동경하던 배우를 만난 소녀의 모습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정작 나는 난감한 미소를 지어야 했지만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기사가 되어 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니.

아이린 경이 듣기라도 하면 눈물을 뚝뚝 흘릴 소리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재회한 황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따스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전하께서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이안 경 덕에요! 그리고 또……”

그러면서 황녀의 눈이 은근슬쩍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공손한 자세를 한 엠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것으로 보아, 아직 황녀가 못내 어색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황족과 평민의 관계였으니.

엠마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편이 더 이상했다.

“……엠마 선배께서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엠마가, 말입니까?”

나는 얼떨떨한 음색으로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귀족과 거리를 두고 다니는 엠마였다. 그런데 그녀가 황녀와 어울려 다닌다니,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는 구도였다.

수수께끼는 엠마에 의해 해결되었다.

다소곳이 내게 다가선 엠마가 이윽고 한 마디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전하께서 많이 챙겨 주셨어.”

그제야 나는 아, 하고 옅은 탄성을 터트렸다.

내가 없는 사이에도 황녀가 엠마를 신경 써 준 모양이었다. 혹시나 그동안 쓸데없는 시기심에 가슴을 앓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황녀가 손을 써 주었다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엠마는 내게 소중한 여인 중 하나였으니까.

나는 괜히 죄스러운 심정이 되어 황녀에게 고개 숙여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러지 않아도 엠마가 워낙 끼니를 대충 때워 걱정이었는데…….”

“누, 누가 그런담?! 얘는 참, 이상한 소리를 하네.”

엠마가 손부채질을 하며 나를 타박했으나, 황녀는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황녀 또한 버섯 일색의 식단을 목격한 듯했다.

그럼에도 엠마는 끝까지 억울한 낯빛을 지우지 못했다.

“지, 진짜 괜찮은데… 버섯…….”

물론, 평민의 애환이 담긴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엠마의 식단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모두가 동감하고 있었으니까.

대신 나는 또 다른 고민에 잠기고 말았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엠마에게 베푼 호의는 곧 내게 베푼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나 또한 보은에 응해야 마땅했다.

그 무렵이었다.

“참, 이안 경! 혹시… 성야제 때, 함께 춤출 짝은 구하셨나요?”

내 눈치를 흘깃흘깃 살피며, 황녀가 던진 물음이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황녀를 바라보아야 했다.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이었으나, 황녀는 너무 긴장한 탓인지 내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단지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

엠마가 중재에 나선 것은 그때였다.

“다름이 아니라, 전하께서도 성야제에서 춤출 상대를 찾고 계시거든.”

“……그래?”

그럼에도 내 낯빛에 어린 의문의 기색은 지워지지 않았다.

황녀가 성야제의 짝을 찾는다?

온갖 가문의 귀공자들이 줄을 서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신분은 물론이고, 외모 또한 출중한 황녀를 모실 영광을 거부할 사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이를 모르고 있을 엠마가 아니었다.

이내 조곤조곤 새로운 설명이 덧붙여졌다.

“아무래도 염문설에 민감할 나이잖아? 또, 무도회에서 짝을 이루려면 급이 맞아야 하기도 하고… 그러니 상대적으로 소문에서 자유로운 네가 짝을 맺어 주었으면 해서.”

그제야 나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마침 나와 성녀의 염문설이 온 대륙을 진동시키고 있는 참이었다. 그 이름 높은 ‘성야제’에서 짝을 이루더라도, 나와 황녀의 사이를 의심할 여지는 적었다.

기껏해야 제국 황실이 나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겠지.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어차피 성녀도, 엘시 선배도 나와 짝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렇게 나는 순순히 황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려 했다.

탁, 하고 내 손을 붙잡는 서늘한 감촉만 아니었다면.

바로 세리아의 손이었다.

“……선배?”

후배는 웃는 낯이었지만, 나는 알았다.

이것이 완곡한 경고의 뜻이라는 사실을.

무려 가문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를 차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온 세리아였다. 설마 황족까지 건드릴까 싶었지만, 혹시 몰랐다.

다름 아닌 세리아였으니까.

만일 세리아가 황녀를 건드리면 대참사는 확정이었다.

세리아뿐만 아니라, 황녀와 델핀 선배까지 엮인 대규모 사건으로 비화되리라.

이를 깨달은 내 등 뒤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 내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갈팡질팡하고 있을 그때.

“유르디나 선배?”

나지막한 호명에, 세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돌아갔다.

황녀를 응시하는 그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자꾸 거슬리게 군다면 망설임 없이 쳐내겠다는 의지가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그럼에도 황녀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을 정도였다.

이윽고 품속을 뒤적이던 황녀의 손에 무언가가 딸려 나왔다.

“……짜잔!”

나를 본뜬 인형이었다.

내가 볼 때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닮은 인형이라면 세리아도 이미 수십 개는 가지고 있을 터였다.

결국 내가 나서야 하나.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리던 나는, 이내 놀라운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앗, 아앗……!”

세리아의 두 눈이 부릅떠져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세리아는 두 손으로 입까지 틀어막은 채였다.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눈빛이 세리아의 경악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나 나의 의문을 해소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황녀는 도리어 우쭐한 미소를 지어 보일 따름이었다.

“과연 유르디나 선배… 단번에 알아보시는군요, 이 귀한 한정판을!”

“어, 얼마죠?!”

세리아는 다급한 목소리로 그렇게 되물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품 안을 뒤적이고 있었다. 마치 약물 중독자가 귀한 매물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이.

얼마를 내라든 그대로 낼 태세였다.

“아, 아직도 남아 있었다니… 무려 귀향제 때의 활약을 기념하며 만든 초기작이잖아요! 시범적으로 만든 물건이라, 단 세 개만 존재한다고 들었는데…….”

“후후, 맞아요. 이 물건이 바로 단 셋밖에 없는 한정판 중 하나랍니다.”

황녀의 은근한 회유에 세리아는 더욱 애가 닳고 말았다.

더는 견디지 못한 세리아가 금화 주머니를 통째로 꺼냈을 무렵이었다.

“……혹시, 성야제 때 이안 선배와 짝을 맺을 생각이신가요?”

뚝, 하고 세리아의 몸짓이 멎었다.

고장난 자동인형처럼.

“금화라면 저도 넘칠 정도로 있거든요. 원하는 조건이 하나 있긴 한데… 으응, 됐어요.”

“아, 그, 으…….”

황녀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세리아의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악신의 권속을 눈앞에 두고도 보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세리아 선배도 그 ‘미신’을 노리는 거겠죠? 성야제 때 짝을 맺은 남녀는, 그 후에 관계가 진전된다는… 후후, 그래봐야 미신에 불과하지만요? 이 인형은, 실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하고.”

“으으, 아, 으으으으……!”

어느덧 세리아의 동공은 초점을 찾지 못하고 핑핑 돌고 있었다.

뇌가 과열되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 인형이 뭐라고.

하지만 세리아에게 있어 나를 닮은 인형은 상상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세요.”

“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황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리아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분한 기색이었지만, 대세는 이미 넘어간 뒤였다.

결국 세리아는 눈물을 머금고 목청을 높여야 했다.

“주세요! 서, 성야제… 양보해 드릴 테니까!”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황녀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인형을 건넸고, 세리아는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인형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다, 다행이다… 딱 하나 부족했었는데.”

어찌나 좋았는지, 세리아의 눈꼬리엔 이슬까지 맺혀 있을 정도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엠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 내 마음에 공감해 줄 인물은 그 정도가 한계였다.

엠마는 어느새 황녀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그, 전하? 혹시 그 인형 남은 거 있나요?”

그래, 그렇구나.

나는 이만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

**

그리고 다가온 성야제 당일.

들뜬 얼굴로 연회장에 도착한 황녀는, 이내 복병을 맞이해야 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황금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였다.

그녀를 보자마자 황녀의 낯빛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이윽고 소녀가 황녀의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인 뒤에는, 눈에 띄게 낙담해 어깨를 축 떨어트렸을 정도였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참 딱해 보이기는 했다.

다만 내가 황녀에게 관심을 기울인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그보다는 사뿐사뿐 내게 다가오는 소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내 내게 다가온 소녀는, 치마를 양손으로 붙잡고 공손히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럼, 춤출까요? 나의 멋진 기사님.”

나는 잠시 침묵했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 손이 허리춤에 매달린 검 손잡이를 붙잡았다.

“미쳤나?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성대를 거칠게 긁고 흘러 나온 위협에, 소녀는 그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지만.

나만큼은 알았다. 이 소녀의 진정한 정체를.

“너무 그러지 마, 오빠…….”

금빛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홀로 타올랐다.

마치 온 세상의 빛을 빨아들이듯 강렬한 눈빛이었다.

“오늘은, 사랑하는 남녀가 짝을 이루는 날이잖아?”

성스러운 밤에, 난데없이 방문한 불청객.

그 이름은 ‘탐욕’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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