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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96화 (496/649)

〈 496화 〉 6.5 고요한 밤, 성스러운 밤(8)

* * *

내 여동생을 닮은 소녀가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닮았다’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다. 일단은 눈앞의 소녀 또한 내 여동생 중 하나였으니까.

리아 페르쿠스.

한때는 그렇게 불렸던 여인이었다. 또한 가족에게 버림받은 이후, 그 이름과 인생마저 송두리째 빼앗긴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물론 나도 그 죄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소녀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단지 불치병을 치료하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끝내는 소녀를 되찾지 않기로 한 어리석은 결단의 희생양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우리 가족의 책임이다.

따라서 나의 책임이기도 했다.

소녀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까닭은, 죄책감이 칼날이 되어 나를 힐난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럼에도 나는 도저히 따스한 낯빛을 할 수 없었다.

내 악물어진 잇새로 달구어진 위협이 연달아 뱉어졌다.

“아카데미는 네 놀이터가 아니야… 아무리 너라도 살아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겠지?”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내 말은 오로지 담백한 진실만을 담고 있었다.

아카데미는 단지 귀한 신분의 자제만을 맡아두는 탁아소가 아니었다. 재능 있는 인재들을 배출하는 산실이며, 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온갖 명사 또한 포진해 있었다.

현 시점에서 가장 유력한 차기 마스터 후보로 평가받는 델레모어 총장님.

전설적인 마수 사냥꾼 데렉 교수님부터, ‘안개 숲의 마녀’라 불리는 아드리아나 교수님까지.

나를 제외하고도 대마법사와 하이 익스퍼트가 무려 셋이었다.

아무리 칠죄성이라지만, 이만한 전력이 넷이나 되면 최소 호각 이상으로 겨룰 자신은 있었다. 상대가 마스터와 같은 규격 외의 강자가 아닌 이상 지당한 결론이었다.

소녀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소녀의 낯빛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당당하고 고혹적으로, 소녀의 입술이 요사스러운 호선을 그었다.

“세심한 배려, 감사드려요. 기사님…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저 또한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러면서 소녀는 슬쩍 턱을 치켜들어 제 쇄골어림을 보여 주었다.

자그마한 점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리아가 그렇듯이.

“참고로, 내 본체는 이쪽에 점이 없거든. 언젠가 알게 될 사실이니, 미리 가슴에 새겨둬.”

나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헛웃음을 머금었다.

여전히 나를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어조였다. 언젠간 알게 될 거라니, 설마 내가 친동생과 나체로 마주하기라도 한단 소리인가.

물론 그와 별개로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본체가 아니라지만, 소녀가 이곳을 피로 물들일 방법은 차고 넘쳤다. 예를 들어 일전에 보여 주었던 실험체처럼 자폭을 한다든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참사였다.

나는 우선 상대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는 않기로 했다.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온 거지? 아카데미의 경비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을 텐데…….”

“잊어버린 거야? 나는 그 가짜랑 유전자부터 일치한다는 사실을… 오빠처럼 근친상간에 미친 인간이 아니라면, 눈치 채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쯧, 하고 혀를 차며 검 손잡이에 올려 두었던 손을 뗐다. 주위 사람들이 슬슬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와 소녀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 심기까지 편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덧 소녀는 내 눈앞에 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나는 그 손을 마주잡았다. 싸늘한 목소리고 절로 내 성대를 긁으며 흘러 나왔다.

“잘도 얼굴을 들이밀 생각을 했어… 네가 한 짓은 생각도 나지 않나 보지?”

“어머, 글쎄? 대신 오빠의 가족들이 내게 한 짓은 잘만 기억나는데… 어때, 말해 줄까?”

결국 먼저 말문이 막힌 쪽은 나였다.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며 시선을 피하자 소녀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삼켰다. 나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실로 즐겁다는 투였다.

그리고 은은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연회장의 중앙에 모인 남녀들이 서서히 서로의 합을 맞추고 있었다. ‘성야제’의 절정, 자정까지 이어지는 춤사위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아직 자정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소녀와 대화를 나눌 여유는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오래 전에 배운 춤을 재현하면서, 나는 여전히 가시가 돋친 목소리로 물었다.

“……네 탓에 셀린이 어떤 꼴이 났는 줄 알아?”

으득, 하고 이까지 갈아가며 던진 물음이었다.

그럼에도 이에 응하는 소녀의 목소리는 태평하기만 했다.

“아하, 셀린 언니? 어떻게 됐으려나… 내 소중한 고객 중 하나라, 그래도 좀 신경 쓰이긴 하네.”

천진난만한 낯으로 내뱉은 의문이었다.

진심으로 이제야 막 떠올렸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놓고 걱정이라도 되는 양 굴다니.

나는 울컥, 하고 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나 혼자 한 짓은 아니지.”

싱긋, 요사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소녀는 한 줌의 죄책감도 없는 음색으로 말했다.

“나는, 셀린 언니의 소원을 이루어주었을 뿐이야. 그리고 셀린 언니는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고.”

“남의 상처를 헤집어 놓고? 그딴 걸 정당한 거래라고……!”

“아아, 아무래도 좋은 조연 이야기는 이제 그만!”

더는 흥미 없다는 듯, 소녀는 그렇게 내 말을 자르며 품을 파고들었다.

무용의 순서에 따른 행위였다.

그러나 훅, 하고 깊이 품을 파고들며 요염한 미소를 짓는 그 저의가 순수하지는 않으리라.

이후 빙글 돌아 제자리로.

“그보다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래?”

“……무슨 속셈이지?”

사실 진작에 물어보았어야 할 내용이었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암흑교단의 칠죄성이나 되는 인물이, 굳이 적진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면 더더욱.

혹시 성야제를 망치기라도 할 셈인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의외로 소녀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단지 나와 짝을 맞추어 춤을 추고 있을 뿐.

내 노골적인 의심에 소녀는 살풋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 오빠. 말했잖아… 오늘은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짝을 이루는 날이라고. 우리 둘을 위한 날이잖아?”

“난 널 딱히 사랑하지 않는데.”

“곧 그렇게 될 거야.”

키득거리면서, 소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음영 속에서 홀로 타올랐다.

“나는 경고하러 온 거야, 오빠… 이제 곧 즐거운 일이 벌어질 것 같거든.”

‘즐거운 일’이라.

암흑교단의 미치광이들이 그렇게 평한다면, 대개의 인간들에게는 끔찍한 재앙이 찾아온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자연스레 내 낯빛이 딱딱히 굳어 버렸다. 그럴수록 소녀의 속삭임은 더욱 달콤함을 더해갔다.

“단 하나만 기억해 둬… 나는 오빠의 편이라는 걸. 필요하다면 내게 도움을 청해도 좋아.”

“당연히 ‘거래’겠지?”

“푸흐흐… 설마, 이 세상에 ‘거래’가 아닌 게 있어?”

소녀의 일그러진 세계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었다.

순수한 선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강한 인간불신.

다만 나는 차마 소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가족이었으므로.

소녀가 상반신을 뒤로 젖히며 쓰러진 것은 그때였다.

돌발행동은 아니었다. 무용 교본에 나와 있는 자세였으니까.

나는 자연스레 한 팔로 받치듯 소녀의 몸을 지지했다. 새하얀 다리가 치솟으며 고혹적인 곡선을 드러냈다.

괜히 민망해진 내 눈이 슬쩍 측면을 향했다. 그러자 소녀는 더욱 만족한 낯빛이 되었다.

향긋한 체형과 함께 유혹이 이어졌다.

“……날 가지고 싶지 않아? 오빠의 인생을 바쳐, 그럼 내 인생을 내줄 테니”

“지금 내 소원은, 네가 어서 꺼져 주는 것뿐이야.”

“하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은데? 뭐, 좋아… 욕망을 긍정하는 건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

소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내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건방지게도.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춤사위가 끝났다.

성야제의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에서 꽃가루가 흩뿌려지며, 박수 소리와 함께 화기애애한 웃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단지 이따금씩 나를 흘깃거리며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을 따름이었다.

“이안 님은 여동생 분과 함께 춤을 추셨네?”

“어머, 우애도 좋아라… 아니라면, 오빠를 뺏기기 싫은 여동생이 떼를 쓴 거려나?”

“설마, 친남매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건 그렇지.

꺄르륵 터져 나온 웃음 소리를 배경으로, 나는 묵묵히 소녀를 노려보았다. 소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허공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천신의 축복이라…….”

“왜, 악신의 성녀라도 천신의 축복은 받고 싶었나 보지?”

“궁금하네.”

그러면서 소녀는 살포시 미소를 깨물었다.

다만 그 호선이, 어째서인지 조금 쓸쓸해 보여서.

나는 일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형편없는 편애꾼이, 과연 버린 자식에게도 축복을 내려줄지.”

그것이 끝이었다.

소녀는 한 마디도 더 얹지 않고, 그저 말없이 등을 돌려 떠나갔다.

의외로 깔끔한 마무리였다.

마지막까지 난동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혹시 몰라 소녀가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던 나는, 이내 낯익은 인물의 방문을 맞이해야 했다.

“즈, 즐거우셨나요. 이안 경…….”

일단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가 참 애처로운 소녀였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

암흑교단의 칠죄성을 상대하다 보니, 이제 황녀쯤은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픽, 하고 옅은 웃음을 터트리며 황녀에게 물었다.

“왜 양보하셨습니까?”

“그, 그건 여러 가지 사정이 얽혀 있어요! 저도, 양보를 하고 싶지는……!”

말이 길어질수록 황녀의 어깨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이윽고 황녀는 축 늘어져, 의기소침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려야 했다.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는 한동안 말없이 울적한 낯을 한 황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꽃가루가 떨어지는 천장을 바라보았다가, 옹기종기 모여 한담을 나누는 연회장의 사람들을 시야에 담았다.

아직 음악은 연주 중이었다.

“……연회는 이제 끝입니까?”

“네, 네?! 그, 그런 건 아닌데…….”

내 손이 조용히 내밀어졌다.

황녀는 깜짝 놀라서,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나를 멍하니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웠다. 결국 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황녀 전하, 감히 제가 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는 꽤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가, 눈망울에 옅은 물기가 비치다가, 끝내는 웃으며.

“……네!”

황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성야제는, 그 이후에도 좀 더 이어졌다.

**

아직 밤은 깊었다.

나는 누군가 전해 준 쪽지의 내용을 따라 걷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남쪽에 위치한 숲, 그 깊숙한 곳에는 오래 전 현자가 지었다고 알려진 유적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일명 ‘달의 연못’.

그 비밀스러운 공터는 연인들이 밀회를 나누기로 유명한 장소였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짝을 이룬 연인들로 붐빌 만한 곳이었으나, 아직 수렵제 때 등장한 마수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마당이었다.

남쪽 숲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조용히 곯아떨어진 새의 숨소리마저 들려올 듯이.

길의 끝, 무성한 나무를 지나 드러난 공터 위로 은빛의 달이 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연못을 동그랗게 에워 싼 유적의 기둥 뒤, 풀잎의 이슬이 물 위로 떨어지듯 맑은 음색이 흘러 나왔다.

“먼 옛날, 연인들은 달빛 아래의 샘에서 사랑을 맹세했다고 하죠.”

느닷없는 설교였다.

하지만 나는 딱히 놀라거나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진작에 그 기척을 눈치 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상대가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기도 했고.

나는 흐음, 하고 옅은 침음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이내 내 시선이 연못 위에 뜬 달을 향했다.

달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

“달은 천신 아루스의 눈입니다. 그리고 샘은 거울이고, 연인이 스스로의 행위를 인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죠. 그래서 천신 앞에서 맹세하는 겁니다. 영원히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겠다고…….”

찰박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나는 일부러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내 시선은 오직 달에 고정되어 있을 뿐.

천신 앞에서, 나는 물었다.

“하지만, 성야제는 이미 끝났는데요.”

“누가 그러던가요?”

이윽고 물소리는 내 지척에서 멎었다.

그제야 나는 서서히 시선을 내렸고, 그대로 우뚝 굳어 버리고 말았다.

달빛을 유순히 받아들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숨이 막힐 듯 아름다웠다.

새하얀 도화지 위에 찍힌 연분홍빛의 점과, 머리 위로 떠오른 금빛의 헤일로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한여름을 지난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반딧불이가 나는 환각이 보일 정도였다.

아니, 환각이 아닌가.

무엇이 현실이고 꿈인지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여인은 낯선 복장을 입고, 그 어느 때보다도 어여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살짝 달아오른 볼이 봄꽃처럼 내 가슴을 간지럽힌다.

“천신의 딸로서 말하건대…….”

본래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여인.

나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왔고, 날 언제나 지탱해 주었으며, 동시에 무너지지 않을 용기를 준 사람.

성녀, 아니.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우리들의 ‘성야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소녀가 그랬던가. 천신은 형편없는 편애꾼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소녀의 말에 공감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이 여인을 지상에 내려준 천신께.

고요한 밤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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