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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97화 (497/649)

〈 497화 〉 6.5 고요한 밤, 성스러운 밤(9)

* * *

나는 성녀의 자태에 일순 넋을 놓고 말았다.

인간의 오감은 의외로 쉽사리 피로해진다. 아무리 아닌 척을 해도, 반복되는 자극에 익숙해지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예를 들어 후각이 대표적이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조차 몇 분이 지나면 의식조차 하기 힘들다. 일부러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 한, 악취의 존재조차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다.

오감마다 둔감해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예외는 없었다. 촉각마저 반복되는 자극에는 더욱 둔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시각도 마찬가지였다.

성녀의 미모는 대륙을 통틀어도 단연 으뜸이었다. ‘천신이 가장 사랑하는 처녀’라는 별명을 어김없이 증명하듯, 우연의 산물이라기보다 정교한 공예품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볼 때마다 단 한 번도 감탄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보다 보면 그 성스러운 외모에도 적응을 마치는 법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오늘에야 깨달았다.

낯선 복장을 입은 성녀를 앞두고서.

이전보다 신성하다는 느낌이 물씬 묻어나오는 복식이었다. 은근히 노출이 많아 눈 둘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었지만, 그 이상으로 성녀의 외모가 주는 시각적 파괴력이 막강했다.

나는 한동안 할 말을 잃고 성녀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뇌리에서 온갖 찬사가 피어오르다 말았다. 무슨 표현으로도 지금 내 심정을 온전히 전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자 불안해진 쪽은 성녀였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흘깃 제 몸을 훑었다. 살짝 홍조 띤 얼굴로, 여인은 조심스레 내게 물어왔다.

“……어때요?”

“예쁩니다.”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이었다.

누구라도 그랬을 터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불안하다는 듯 눈치를 살피고 있다면.

덕분에 나는 가장 원초적이며 순수한 감상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성녀가 무어라 반문하기도 전에, 나는 급히 몇 마디를 덧붙였다.

“너무나도… 잠시 말문이 막힐 정도로.”

성녀도 당장 대답을 돌려주지는 않았다.

다만 일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슬쩍 시선을 피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내 흠흠, 하고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쭉 펴기까지.

성녀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를 타박했다.

“그새 아부가 늘었네요, 이안.”

“진심입니다.”

성녀는 애써 태연한 체 하고 있지만, 히죽거리며 치솟는 입꼬리마저 숨기지는 못했다.

일부러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제 복장을 살피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내가 칭찬해 준 복장이 꽤나 마음에 드는 기색이었다.

“성국에서 마련해 준 예식용 복장이에요. 이전의 사제복이 ‘성녀’로서 갖춰야 할 복식이라면, 이 옷은 ‘성인(?人)’으로서 입는 복식이죠.”

“그럼 앞으로는 ‘성 루시아’라 불러 드려야 됩니까?”

내 농담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성녀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에 드네요. 하지만, 당신만은 예외.”

연못을 헤치면서, 성녀는 내 바로 앞에 섰다. 흠뻑 젖은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러지 않아도 얇은 천옷이었다.

물에 젖어 달라붙기까지 하니, 그 죄 많은 육체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은근히 안쪽이 비치는 착각마저 일 지경이었다.

설마 성인이 입는 옷이 그렇게 파렴치할까 싶었지만.

또 몰랐다. 성녀는 의외로 날 놀리기를 즐겼으니까.

오늘만은 특별히 예복에 변화를 주었을지도.

훅, 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내 살결을 간지럽힌 것은 그때였다.

“당신만큼은, 날 ‘루시아’라 불러줘요.”

어느덧 성녀의 낯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뒤섞이고, 연분홍빛 동공이 거울처럼 내 얼굴을 반사하는 거리.

내 시선이 무심코 성녀의 입술을 향했다.

이대로 덮쳐 버릴까.

수컷으로서의 본능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나는 헛웃음을 깨물었다.

“……이제 ‘님’ 자도 필요 없습니까?”

“당연하죠. 우리 사이잖아요?”

‘우리 사이’가 도대체 무엇일까.

온 대륙에 열애담이 잔뜩 퍼져, 매일 같이 두 사람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가 연극으로 상연되는 사이?

애매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 둘이 아닌 남들의 평가에 불과했으니까.

어쩌면 오늘이 우리의 관계를 결정 짓는 날이 될 수 있겠다고,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한창 바쁠 때로 아는데, 어떻게 아카데미에…….”

“당신과 성야제를 보내고 싶어서.”

이제는 숨기지도 않고 내뱉어지는 진심이었다.

솔직한 성녀의 파괴력은 막강했다. 나는 일순 할 말을 잃어 버렸고, 성녀는 그제야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훅 몸을 뒤로 물렸다.

“내가 내 남자를 만나겠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그러면서 뒤돌아 연못을 첨벙첨벙 가로지르기까지.

달빛의 커튼 사이로, 여신이 연못의 한가운데에 섰다.

다시 나를 마주한 성녀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자, 들어오세요.”

무슨 속셈일까.

나는 무언가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전이라면 성녀의 말을 따라 냉큼 연못까지 따라 들어갔겠지만, 묘한 예감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던 내 입에서 소심한 변명이 새어 나왔다.

“옷이 젖을 텐데…….”

“어서요.”

물론, 성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내 반항은 금세 진압되고 말았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연못으로 발을 내딛었다. 여름을 지나 계절은 이제 가을, 서늘한 밤 공기와 어울리는 차디찬 물이었다.

어디서 지하수가 샘솟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연못은 크지 않았다. 몇 걸음만 내딛었을 뿐인데, 어느덧 성녀의 바로 앞까지 당도해 있을 정도였다.

성녀는 두 손을 모은 채 기도를 올리던 중이었다.

이윽고 성녀의 두 손이 내밀어졌고, 나는 말없이 그 위로 내 손을 포갰다.

달이 유독 밝은 밤이었다.

“주여, 오늘 당신의 앞에서 또 한 쌍의 연인이 변치 않을 사랑을 약속하려 합니다… 당신의 눈이 이리도 밝고, 잔잔한 수면이 우리의 모습을 비추니, 이 자리에 선 모두가 한 점의 거짓 없이 물음에 응할 것을 맹세하겠나이다.”

눈을 감고 목소리를 높이는 성녀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맹세는 노래하듯 이어졌다. 은빛의 빛무리가 안개처럼 떠다니며 신성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깜박, 하고 성녀의 머리 위에 빛나는 헤일로가 한 차례 점멸했다.

“이안 페르쿠스, 달과 물 앞에서 그대에게 묻습니다.”

나는 술에 취한 듯 몽롱해진 정신으로 사고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귀 같은데.

그러나 성녀는 내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애절한 연분홍빛 눈동자가 나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 눈빛만으로도 가슴이 쿵, 하고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화들짝 놀란 내 입에서 반사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 사랑합니다.”

그러자 성녀는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너무나도 듣고 싶은 말이었다는 듯이.

은은한 행복에 겨운 물음이 이어졌다.

“나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나요?”

“네, 물론.”

“삶은 유구하고, 인간의 감정은 비겁합니다. 타오르는 심장 앞에서 간사한 혀는 때때로 거짓을 일삼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맹세할 수 있나요?”

“맹세합니다.”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 대답이 이어질 때마다 성녀의 눈빛은 애정으로 더욱 깊어졌다. 눈앞의 여인을 행복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재차 약조했다.

“흔들림 없이 사랑하겠노라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하아, 하고 성녀가 애달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고개 숙인 채 서 있었다.

내 맹세의 여운을 더욱 길게 간직하고 싶다는 듯.

이윽고 다시금 고개를 치켜든 성녀의 눈망울에는, 옅은 물기가 맺혀 있었다.

슬픔 탓은 아니리라.

“저 또한 맹세합니다. 루시아는, 이안 페르쿠스를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랑하겠노라고… 영원한 사랑의 언약이 오늘 이 자리에 맺어졌나이다. 우리의 주 천신 아루스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지고불변한 결합을 선언합니다.”

그 직후였다.

몽롱한 정신 사이로, 나는 희미한 이성이 싹 트는 것을 느꼈다.

어디선가 들어본 선언인데?

일단 깨어난 사고가 제멋대로 가속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머릿속에 몇 가지 상식이 떠올랐다.

혼인성사(????)였다.

천신이 사제에게 허락한 일곱 가지 성사(??) 중 하나, 연인의 불가역적인 결합을 신 앞에서 공포하는 행위였다. 말하자면 종교적인 혼인신고나 다름없다고 할까.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내가 무어라 반항해 보려던 찰나였다.

“아니, 잠깐……!”

보드라운 감촉이 살갗을 덮친다.

입술이었다.

어느덧 성녀의 손이 내 턱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와 여인의 입술이 마주칠 때까지는, 고작해야 눈을 깜짝하기도 모자란 사이.

그래, 입술이 입술을 덮치고.

이내 말캉한 살덩어리가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촉촉하고 예민한 혀가 뻣뻣이 굳어 내 혓바닥을 건드리다가, 이내 내가 혀를 얽기 시작하자 녹아내리듯 부드럽게 뒤섞인다.

짜릿하고 달콤한 감촉.

허리 부근을 간질이는 느낌, 달콤한 여인의 살내음, 서툴지만 애정이 가득한 여인의 손짓.

모든 할 말을 융해시킨다.

끝내 침이 은빛의 실선처럼 우리 사이를 이었고, 성녀는 몽롱한 미소를 지었다.

“……임마누엘.”

그것이 끝이었다.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밤, 황금빛 빛무리가 반딧불이처럼 춤을 추었다.

천신이 이 예식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제 성녀와 부부가 되었다. 비공식적이지만, 누구보다도 무서운 증인 앞에서.

장인어른이 천신이라니.

설마 누가 상상이나 해 보았겠는가.

성녀는 말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맹세를 철회하면 받아주겠다는 듯이.

그러나 차마 나는 그럴 자신은 없어서.

“……춥겠습니다.”

성녀의 어깨어림을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손길이 닿자마자 성녀는 움찔 몸을 떨었다. 이미 여름녘을 지난 밤바람은 쌀쌀했고, 성녀의 옷은 푹 젖어 있었으니 당연한 걱정이었다.

“슬슬 돌아가서 씻죠. 오늘은 고생하셨…….”

“그럼, 함께 갈래요.”

그 한 마디에 나는 말문이 턱, 하고 막혀 버렸다.

내 멍청한 눈빛이 성녀를 향했다. 루시아는 마른침을 꿀꺽, 하고 삼켰으나 이미 결의를 다진 얼굴이었다.

“오늘 밤은,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성야제’니까.

그 이상의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

어느새 나는 성녀의 궁에 도착해 있었다.

내 기숙사는 무언가 어울리지 않았고, 성녀가 본국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동안 ‘태양의 쉼터’에는 최소한의 인원만이 머무르고 있을 뿐이었다.

즉 밀회를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라는 뜻이었다.

먼저 몸을 씻은 나는 뻣뻣이 굳은 채 심호흡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리 둔감한 나라도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었다.

이후의 전개가 어찌 되리란 사실쯤은.

이를 증명하듯이, 이내 조심스레 욕실의 문이 열리고 새댁이 수줍은 자태를 드러냈다.

새하얀 수건으로 감싼 살갗이 보드라운 윤기를 발했다. 아무리 수건으로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굴곡이 절로 사내의 음심을 자극했다.

성녀는 애써 새침한 체를 하며 말했다.

“말했죠? 나중에,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공간에 단 둘에 있자고…….”

그 이후에도 온갖 핑계들이 이어졌다.

물론 내 귀에는 한 토막도 들어오지 않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보다 성녀의 자태에 얼이 빠지고 말았다.

너무나 아름답다.

그리고 이는 성녀의 결정적인 착각을 수정시킬 기회이기도 했다.

무심코 나는 몸을 일으켜, 저벅저벅 걸음을 내딛었다. 성녀가 당황한 틈을 타 내 손이 성녀를 벽까지 밀치고 들어갔다.

이 구도를 미처 예견하지 못한 성녀의 목청이 저절로 높아졌다.

“이, 이게 무슨 짓……!”

“벗어.”

그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성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내게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네, 넷……?”

하아, 하아.

달뜬 여인의 숨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한껏 기대감을 머금은 연분홍빛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답이구나.

이를 확신한 내 태도가 더욱 강경해졌다.

“벗으라고.”

그것이 끝.

성녀는 믿을 수 없이 순종적인 태도로, 달콤한 음색을 토해냈다.

“네, 네……!”

스르륵, 하고 여인의 몸을 가리고 있던 수건이 땅바닥에 떨어져 내리고.

성스러운 밤의 시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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