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501화 (501/649)

〈 501화 〉 7. 질투는 나의 힘(1)

* * *

몽롱히 부유하던 의식이 서서히 떠올랐다.

나는 사내의 꿈을 꾸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내가 나의 꿈을 꾸고 있는지도.

안개가 걷히듯 맑아진 시야 사이로 낯선 풍광이 새겨졌다. 뒤이어 오감을 자극하는 것은, 철그럭대며 갑옷의 이음새가 맞부딪히는 소리.

사막이었다.

어느덧 내 몸뚱어리는 메마른 황무지를 거닐고 있었다. 코끝을 파고드는 금속과 기름 냄새, 그리고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높이 솟구친 강철의 탑이 위치한 곳이었다.

내 무심한 눈길이 흘깃 탑의 정점을 향했다.

그곳에는 새하얀 광구가 떠올라 있었다. 끝없이 흘러 내리는 전하의 근원이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균열을 일으키는 마도공학의 정수이기도 한 장치였다.

‘인류 최후의 희망’.

저 빛의 구체를 부르는 말이었다. 그래봐야 드높은 성벽을 쌓아 스스로를 고립시킨 패배자들이 붙인 이름에 불과했지만.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소리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당장 나조차도 저 구체에 일말의 기대를 져버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 일부러 이곳까지 발걸음을 한 것이 그 증거였다.

그렇게 내가 다시금 시선을 정면으로 되돌렸을 무렵이었다.

“……오셨습니까, 사령관.”

갈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내 앞에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연녹색 눈동자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미남자였다. 또한 나와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막역한 친구지간이기도 해서, 내 입에서는 이내 한숨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또 지랄이야, 레토.”

“하, 말씀이 너무 험하시네.”

내 힐난에도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먼저 걸음을 내딛었다. 어차피 화가 난 레토를 말릴 수단은 없었으니, 내 할 일이나 끝내 놓자는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레토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투덜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안, 말이 되냐? 도대체 이 예산을 가지고 뭘 하라는 거야? ‘인류 최후의 희망’이라며! 그럼 당연히 전력을 다해서 지원해 줘도 모자란 거 아니냐고!”

아무래도 연구를 담당하며 금전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 또한 보급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본 적이야 수없이 많았다.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나로서는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 한정적이었다.

“……레토, 난 일개 군인일 뿐이야.”

“웃기고 있네.”

너무하다 싶을 만큼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헛웃음을 터트리며, 레토는 재차 나를 추궁했다.

“인류 최후의 마스터, 칠죄성을 셋이나 떨어트린 별 사냥꾼이 일개 군인에 불과하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거짓말을… 네 한 마디에 ‘의회’가 벌벌 떤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알아?!”

“의회에서 제국을 대표하는 분은 황제 폐하셔. 예산 문제는 폐하께 여쭈어 봐.”

“그러니까, 그 황제 폐하께서 우리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시니 너한테 이러고 있지! 야, 예산을 조금만 더 긁어 오면……!”

“연구의 진척도는?”

대답 대신 던진 반문이었다.

내 피로가 물씬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레토는 일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일그러진 낯빛에서 은은한 불만이 드러나고 있었다.

예산이 무척 간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또 지칠 대로 지친 나를 채근할 수만은 없어서, 레토의 입에서는 자그마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짜증스럽게 내 시선을 피하기까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토는 언제나 그렇듯 소인배가 되지 못했다.

그는 의무를 방기할 만큼 무책임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이를 증명하듯, 레토의 성실한 설명이 이어졌다.

“……일단, 인위적으로 ‘경계’를 여는 데까지는 성공했어.”

짐작하고 있던 대로였다.

저 빛의 구체 주위로 번진 균열이 유독 낯익었다.

이미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는 광경이었다. 공간 그 자체가 무너져 내리면, 숨겨져 있던 세상의 이면이 드러난다. 그리고 마스터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미지의 장소에 출입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인류 최후의 마스터’라 불리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저 균열이 익숙할 수밖에.

내가 말없이 탑 위의 광구를 바라보는 동안, 레토는 좀 더 자세한 해설을 덧붙여 갔다.

“너도 알다시피, ‘경계’는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공간이야. 그 대신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이루어 주지만.”

“애초에 우리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니까.”

담백한 진실이었다.

본래 ‘경계’를 인위적으로 여는 일 따위는 불가능했다. 그따위 편법이 가능했다면, 이미 오래 전부터 이를 이용한 기술이 존재했을 터였다.

다시 말해, 저 빛의 구체는 인류 사상 최초로 등장한 장치란 뜻이었다.

이러한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까닭은 단순했다.

인류가 절멸의 위기에 몰려 있기 때문이었다.

레토는 내 차가운 감상에 흐, 하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나마 네가 칠죄성의 목을 셋이나 따줘서 살았어. 설마, 암흑교단도 칠죄성의 힘을 우리가 이용할 줄은 몰랐겠지.”

“엄밀히 말하자면 관심도 없었겠지. 어차피 승패는 정해진 지 오래니까.”

남들 앞에서는 단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인류의 수호자가 이따위 비관적 전망을 내놓고 다닌다니, 그러지 않아도 바닥을 치고 있는 사기를 나락까지 떨구기에는 딱 좋았다.

사령관으로서 무책임한 언행은 삼갈 의무가 있었다.

단, 레토만은 예외였다.

그는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비장의 한 수가 필요한 거지. 인구가 줄어 칠죄성을 억누르고 있던 천신의 권능이 약해지고, 그 덕에 인류가 칠죄성의 힘을 다루게 되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레토는 그러면서 탁, 하고 내 어깨를 한 대 쳤다.

내 낯빛이 워낙 딱딱히 굳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안 페르쿠스… 네가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으면 어떡해? 넌 세상을 구할 남자잖아. 과거로 돌아가서, 인류를 구원할 영웅!”

“가능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내 입에서는 신음 섞인 소리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칠죄성의 힘이 강대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기껏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시간선이 분리되겠지.

그럼에도 인류는 이 불합리한 도박으로부터 차마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델피렘으로부터 승리를 거둘 유일한 가능성이었던 탓이었다.

헛된 희망이다.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정작 나 또한 이 무모한 계획을 멈추지는 못했다.

희망 없이는 누구도 살아갈 수 없으니까.

이는 생존의 문제였다. 숫자와 확률 따위는, 모든 생명의 대전제 앞에서 무의미할 따름이었다.

레토 또한 이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는 아직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쓴웃음이기는 해도, 아직 웃을 여유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의 정신적 역량을 증명했다.

“이안, 조심해야 돼… ‘경계’를 넘어 과거의 시간으로 향한다는 건 두 시간대가 연결된다는 뜻이기도 해. 특히, ‘경계’는 물리법칙이 아닌 심상과 무의식이 지배하는 곳이지.”

“그래서?”

“잘하면 너를 제외한 사람도 ‘경계’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야. 이 길은 한동안 일방통행이니까, 주로 과거가 현재의 영향을 받겠지.”

미리 걱정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인 시점이었다. 돌아간 이후의 일을 계획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조언을 가슴에 꾹꾹 눌러 담기로 했다.

다름 아닌 레토가 한 말이었으니까.

우리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빛의 구체를 응시했다. 그러기를 얼마쯤, 레토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이안… 혹시 말이다. 네가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시간선이 달라질 수도 있는 거잖아?”

‘혹시’가 아니라 십중팔구는 그럴 터였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대신 묵묵히 레토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되면 부탁이 하나 있는데…….”

그때였다.

쾅쾅쾅!

어디선가 거슬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어찌나 큰 소리였는지 레토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이려던 찰나.

팍, 하고 시야가 흐려졌다. 단단한 지반 위에 서 있던 육체가 끝없이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나는 헐떡이면서 눈을 떴다.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두개골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래, 낯익은 방이었다.

나와 아카데미 생활을 함께 한 기숙사였으니 당연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는 듯한 갈증과 숙취로 인한 두통이 차례대로 내 현실 감각을 일깨웠다.

이제는 익숙해진 과정이었다.

나는 머리맡에 놓아 두었던 물통을 낚아 채 꿀꺽꿀꺽 냉수를 들이켰다. 정신이 되돌아오자, 내 눈은 곧장 원하던 물건을 찾아냈다.

편지 봉투였다.

딱히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싸구려 느낌도 아니었다. 오히려 은은하게 피어 오르는 향이 상쾌한 느낌을 준다고 해야 할까.

내 손이 멍하니 편지봉투를 집어든 직후였다.

쾅쾅쾅!

다시 한 번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지 않아도 땀으로 흠뻑 젖은 옷과, 후덥지근한 공기에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참이었다.

나는 일단 편지 봉투를 품속에 갈무리하고 짜증 어린 발걸음을 옮겼다. 문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묘한 위화감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만, 덥다고?

계절은 이미 여름을 지난 지 한참이었다. 늦더위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를 고려하더라도 날씨가 너무 덥고 습했다.

더욱이 발달한 직감이 내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 무더위에는 무언가 숨겨진 사정이 있으리라고.

물론 고민에 빠져 있을 여유는 길지 않았다.

쾅쾅쾅!

다시 한 번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소음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이윽고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도대체 누구……!”

“이안!”

문 앞에는 울먹이는 루핀이 서 있었다.

거의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그는 울먹이며 내게 애원했다.

“우, 우리 누나가 이상해졌어…….”

나는 단숨에 기숙사를 뛰쳐 나왔다.

*

“누나가 자꾸 이상한 짓을 하더라니까! 느닷없이 날 찾아오더니 펑펑 눈물을 쏟질 않나, 며칠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그렇게 된 지는 얼마나 됐고?”

“오늘 아침부터!”

그렇다면 아직 늦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루핀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최대한 바삐 걸음을 옮겼다. 바깥은 실내와 마찬가지로 덥고 습했다.

달구어진 도로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였다.

이 납득하기 힘든 더위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으나, 일단은 엘시 선배를 찾아가는 쪽이 급선무였다.

‘경계’는 위험한 곳이다.

그 풍광을 목도했을 뿐인데도, 나는 그 거대한 흐름에 자아가 뿌리 뽑힐 뻔했다. 엘시 선배가 어떠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을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와 루핀의 동행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막 기숙사를 나서 달음박질을 치려던 내 몸이 멈칫했다. 뒤따라 나오던 루핀 또한 마찬가지였다.

열기로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풍경 속.

저 멀리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벅저벅.

망토에 고깔모자까지 걸친 복장이었다.

당연히 덥고 힘들어야 정상인데도, 태연히 걸음을 옮기는 소녀의 이마에서는 한 방울의 땀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고깔모자의 챙 탓에 그 낯빛은 제대로 읽어 낼 수 없었다. 다만 내가 본능적으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강하다.

나조차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다.

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며 긴장을 드러냈다. 호흡과 심장 박동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찰나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저 소녀의 외양은, 내게도 너무나 익숙한 인물과 똑 닮아 있었으니까.

의문은 이윽고 확신으로 이어졌다.

소녀가 검지로 슬쩍 모자 챙을 밀어 올리자, 한낮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엘시 선배였다.

나의 동료이자, 약혼자가 될 여인.

그런데 어째서 나는 이리도 낯설다는 느낌을 받는단 말인가.

아니, 사실은 가슴 한 켠에서 외치고 있었다.

언젠가 이러한 풍경을 보지 않았냐고.

‘엘시 선배’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묘하게 여유가 넘치는 행동거지부터, 그 자신만만한 미소까지.

어딘가 어른스러워진 모습이었다.

그래, ‘어른’.

내 뇌리 속에서 몇 달 전의 기억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덥고 습한 날씨, 묘하게 어른스러운 소녀.

그리고 편지 봉투에서 은은히 풍기던 약 냄새.

덜덜 떨리는 내 손이, 품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내가 찾던 물건이 손에 잡힐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편지 봉투를 뜯어, 그 내용물을 바라보았다.

당장 보아야 할 부분은 단 하나.

편지의 말미, 발신인이 쓰여진 곳.

그곳에는 짤막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너의 스승이.’

이윽고 얼빠진 내 시선이 정면을 향하자.

“……안녕, 후배님.”

소녀는 당당한 어조로 그렇게 인사를 건넸다.

일말의 존경심조차 섞이지 않은 말투였다. 당연히 엘시 선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본 적이 있었다.

저토록 성숙하고, 강인하며, 또 나를 기어코 '후배'라고 지칭하던 엘시 선배를.

‘대수림’.

미래에서 온 사내의 인연이, 아카데미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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